[Opinion] 죽음과 욕망의 놀이 - 댄스 필름 'Clowns', Hofesh Shechter [공연]

인간의 엔터테인먼트는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글 입력 2024.03.06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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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fesh Shechter Company / Illuminations

 

 

Hofesh Shechter의 안무로 제작된 댄스 필름 "Clowns"(2016)는 무용을 통해 일종의 죽음의 ‘놀이’를 하는 시퀀스를 제시하며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죽음과 폭력을 보여준다.

 

"Clowns"는 샹들리에가 달린 작은 극장의 무대를 배경으로 시작한다. 중세 궁정 광대를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고 등장한 무용수들은 초반부 다 같이 손을 잡고 무릎을 굽히며 리듬을 타거나 한 발씩 리듬에 따라 스텝을 밟는다. 그러나 이내 한 무용수가 단장으로 보이는 인물에게 총을 쏘는 장면을 시작으로, 이들은 서로를 다양한 방식으로 ‘죽이고' 다시 함께 춤을 추기를 반복한다.

 

이때 가장 인상적인 점은 누군가를 ‘죽이는' 역할과 ‘죽임을 당하는' 역할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바로 전 장면에서 ‘죽임을 당했던' 인물도 쓰러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일으켜 춤을 추고, 누군가를 ‘죽였던' 인물도 살해의 동작 이후 아무렇지 않게 춤을 이어간다.

 

댄스필름에 사용된 음악은 작품 전체에 오묘하게 깔려있는 이 비인간성과 섬뜩함을 강조하며 공포심을 자극한다. 특히, 죽음의 장면들에서 사용되는, 제한된 선율의 타악기 위주 음악은 등장 인물(무용수)들을 ‘인간성이 탈각된 기계적인 존재'로 보이게 한다. 찰찰거리는 타악기 소리는 기계적으로 서로를 죽이는 무용수들의 모습과 만나 그로테스크함을 배가시킨다.

 

하지만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극중 누구도 실제로 죽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군무와 죽음의 시퀀스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이 일련의 과정은 이 광대들이 서로를 ‘죽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일종의 역할극일 수도 있겠다. 이들은 ‘죽음’을 활용한 죽음의 ‘놀이’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에게 ‘죽음'은 폭력 자체라기보다는 역할극의 소재이자 그 놀이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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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fesh Shechter Company / Illuminations

 

 

폭력과 죽음이 엔터테인먼트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어떤 것까지 엔터테인먼트로, 오락의 일부로 허용될 수 있을까?

 

오래 전 투우와 결투를 즐기던 이들을 생각하면 폭력성은 과거부터 인간이 즐겨오던 엔터테인먼트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이 윤리적으로 옳다고 할 수 있을까?

 

무용 작품 속에서 '죽음', '살인', '폭력'은 대수롭지 않은 일상적인 요소로 일반화되어 등장한다. 이에 따라 감상자들 역시 이러한 잔혹성에 점차 무감해지고, 이를 엔터테인먼트적 요소의 일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서로를 죽이는 장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함에 따라 처음 죽음의 장면을 목격했을 때의 충격이 점점 약해져서, 결국 무뎌진 이들은 죽음과 폭력 앞에서도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 채 이를 오락의 일부로 즐기게 되는 것이다.

 

시청각적으로 드러나는 죽음과 군무의 시퀀스뿐만 아니라, 작품을 감상할 때 감상자에게 일어나는 폭력에 대한 무감각화 과정 자체를 통해 우리는 현실의 엔터테인먼트가 폭력과 죽음을 오락적 요소로 허용할 때 발생하는 '건조한 비인간성'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다.

 

오늘날 현실의 대중매체가 제공하는 다양한 엔터테인먼트에서도 폭력이 오락적인 요소로서 광범위하게 이용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죽음과 폭력은 때로는 게임을 즐기며 성취감과 재미를 느끼게 하는 요소로, 때로는 유머의 소재로, 혹은 플롯의 진행을 위한 손쉬운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소비 행태가 장기적으로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엔터테인먼트라는 이름 하에 폭력과 잔혹성을 용인해도 되는지는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어딘가 섬뜩하기도 한 이 작품은 본질적으로 인간성과 인간 유희의 상충하는 지점을 짚어내며, 그 허용 범위와 책임에 대한 질문을 던져볼 것을 말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유희'로 포함될 수 있는 영역의 선이 적절히 그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이는 공포스러운 비인간성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는 듯하다.

 

 

[이소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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