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어떤 사실에 담백하고 단순해진다는 것 [도서/문학]

글 입력 2024.04.2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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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산 게이, '헝거', 문학동네, 2024.>

 여러 감상들을 몇 가지 덩어리로 묶어 보았다.

 

 

 

이해받고 싶다는 갈망


 

헝거. 몸의 허기이자 영혼의 허기. 비유적인 제목이었지만 어쩐지 직관으로 이 속에 담긴 의미를 짐작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공허한 마음을 채우려고 음식을 밀어넣을 때의 기분이 떠올랐다. 사실 나를 비롯한 대부분은 이 감각을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 만사가 허무하고 즐거운 일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것 같을 때, 감각적인 만족은 가장 빠르고 확실한 쾌감을 제공하지 않던가.

 

하지만 막상 글을 읽어내려가다보니, 단순히 우울함과 공허함에서 비롯한 마음의 허기라는 공통점만으로는 나의 경험을 이 고백에 감히 비할 수가 없었다. 가끔 겸허함을 절로 불러 일으키는 글들이 있는데 나에겐 '헝거'가 그랬다. 스치듯 읽을 내용이 아니다 싶어 집중할 수 있는 상황에만 꺼내 조금씩 아껴 읽었다. 이렇게 진실되고, 적확하고, 강력한 글은 어떻게 쓸 수 있는 걸까. 하지만 그의 치열했던 삶의 궤적과 고민들을 엿보고 나니, 나로선 감히 닿고 싶다 말하기도 어려운 깊이가 아닌가 싶었다. 절박할 정도로 솔직했다. 이렇게까지 드러난 맨 마음을 내가 봐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정도의 구체성과 생생함은 어디에서 기인했을까. 내 존재 자체를 설명해야 하는 순간, 나아가 그런 설명을 강요당하는 순간의 마음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내 존재가 의문시된다는 것, 곧 내가 부정당한다는 것. 어쩌면 그런 설명에 대한 요구 자체를 그만두라며 모든 걸 놓아버릴지도 모를 정도로 아픈 일이다. 그럼에도 록산 게이는 끝끝내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두었다. 그럴 듯한 '설명'이나 '이유'가 없는 존재들을 고려하지 못한 서술 방식이라는 지적도 있는 줄로 안다. 하지만 난 어쩐지 그렇게라도 이야기해야 했던 절박함을 알 것만 같았다.

 

그렇게라도 이해받고 싶은 것이 사람이니까. 이해받고 싶다는 갈망, 곧 몸의 허기와 마음의 허기가 되는 가장 근원적인 허기가 우리 모두에게 있으니까.


 

 

솔직할 수 있는 용기


 

스스로를 글 쓰는 사람으로 규정하기에는 이래저래 낯부끄러운 점이 많지만, 여러 이유로 잡다한 글들을 써야 하는 상황들이야 종종 있어왔다. 말 그대로 써야 하는 의무가 생겨서 무언가를 쓰기도 했고, 또 무언가를 써내지 않고선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순간에 활자를 감정의 배출구 삼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내가 나서서 글을 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글 같은 건 웬만하면 쓸 일이 없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안팎의 상황들이 나로 하여금 ‘기어코’ 글을 쓰게 만든 것이므로, ‘써야 했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왜 글 같은 건 쓰지 않는 편을 선호하는가,에 대해서 조금만 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일단 모두가 알고 있다. 백지 앞에 앉아서 머리를 쥐어찌내는 것만한 고역이 또 없다는 걸.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다는 건, 그 골치 아픈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만큼 자신을 몰아가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나는 펜을 들고 싶다는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는 나날을 보내고 싶고, 다른 이들 역시 그랬으면 하고, 나아가 나를 비롯한 모든 글쓴이들의 동인이 그저 외로움이나 슬픔만은 아니었으면 한다.


물론 글을 통해 전하고 싶은 마음의 성질은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 이것이 누군가에게 반드시 닿으리라는 희망과 긍정, 무언가를 요구하고 촉구하는 강력한 힘과 의지, 혹은 그런 거창한 목표의식 없이도 그저 누군가의 안부를 묻고 싶은 상냥함 따위로 쓰이기 시작한 글들이 세상에는 많다. 하지만 슬픔이 가득 차다 못해 새어나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비교적 글을 자주 접하게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들여다볼 것이 있어야 글을 쓰게 되니까. 그건, 눈 돌리지 말고 앞을 보고 달리라는 세상 속에서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무언가를 속에 품고 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시선을 붙잡는 힘을 가진 감정들 중, 내가 알기로 가장 강력한 것은 슬픔이다. 슬픔에는 이상한 중독성이 있어서, 내가 어쩌다 이런 마음까지 느껴야 하는지를 계속 곱씹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일들이, 사람들이, 나를 지금의 감정과 상황에 놓아두었나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러다보면 억울해지고, 속이 답답하고, 그걸 뱉어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글을 쓴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하지만 웃긴 건, 이렇게 토로하듯 글을 써 온 경험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난 내 글에서 묘한 가식을 느낀다는 점이다. 가끔 예전에 쓴 것들을 다시 읽어볼 때마다 간지럽다 못해 조금은 징그럽기까지 하다. 아무튼 사람들은 혼자 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쓴다는 드라마 ‘안나’의 대사처럼, 어느 순간에서든 완전히 솔직할 수 없는 비겁함에 관해서는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나를 드러내고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의 내밀함과 연약함이 누군가에게는 약점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 삐뚤어진 마음은 차마 고백할 것이 못 될 정도로 시커멓지는 않을까, 그런 것들이 항상 두려웠고 그래서 조금씩은 안전망을 쳐 두었다. 내가 무해한 존재로 남을 수 있는 선까지만 내보이고, 감정과 현실을 각색해서 짜맞추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해방을 위해, 혹은 글의 완결성과 논리를 위해 솔직함의 속성을 반만 이용할 때가 많았다. 솔직해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또 어려운 일인가를 글을 쓸 때마다 실감한다.

 

그래서 록산 게이의 이 처절한 고백록을 읽고 있자니 어딘가 경외감까지 들었다. 가장 힘들고, 가장 용감한 글이었다. 새어나오는 슬픔을 꾸미지 않았고 그 슬픔의 바닥을 마주하는 단단함을 여지 없이 보여줬다. 솔직함이 가진 본연의 아름다움은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어정쩡한 자기 노출은 걸핏하면 신파가 되어 버리고, 심하면 추잡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차마 내보이면 안 될 것 같은 부분을 포장하면 사람들은 그 포장에서 비롯한 공백을 기막히게 알아챈다.

 

온전히 솔직할 수 있으려면, 온전히 자신을 바닥까지 드러내고도 그 심연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추악하지는 않은 사람이라야 한다. 가장 본연의 자신인 상태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 모든 어려움을 딛고 쓰여진 록산 게이의 글에서 나는 눈물겹도록 강인하고 또 부드러운 사람, 그래서 진실될 수 있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어떤 사실에 담백하고 단순해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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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오늘의 메뉴를 정할 때도 나는 이 음식의 칼로리가 내 몸을 어떻게 만들지를 매번 그려본다. 매일매일 다이어트 중이라고, 내일부터 진짜 다이어트라고, 농담처럼 덧붙이지만 사실 우리는 안다. 그건 정말 농담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 그 멋지고 예쁜 몸을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 속에서, 그 욕망으로 인한 노력을 실현하고 싶다는 욕망 속에서 산다.

 

탄수화물과 자극적인 양념으로 범벅이 된 떡볶이를 먹고 나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음식을 먹고 나면 참회하듯 끼니를 굶거나 풀떼기 조금으로 몇 끼 정도를 때운다. 그러면 배가 고프다. 아주아주. 외모와 몸무게에 대한 강박적인 감정을 느끼는 순간은 사실 셀 수도 없다. 그건 이미 체화된 것이니까.

 

내 몸은 나의 것이다. 내 의지대로 움직이고 공간을 차지할 권리가 있는 나의 것이다. 나는 나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 바디 포지티브의 구호로서 닳고 닳을 만큼 외쳐진 말들이지만 아직도 이 말은 사실 명제가 되지 못한 것 같다. 세상은 우리를 자꾸 배고프게 한다. 평가의 대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숨쉬듯 느끼는 아슬아슬함. 이 세상의 기준에 편입되지 못한 채로, 부정당한 채로 남게 되리라는 두려움. 사랑받을 만한 몸과 외모를 갖추지 못하면 나의 모든 매력이 부질없어지리라는 생각, 그리고 그 생각이 지나친 비약인 것을 알면서도 내가 받는 애정이 나의 몸에 걸맞은 것인지 끊임없이 의심하는 조바심.

 

감히 타인의 고통과 경험이 나의 것과 다를 바 없다며 그것을 완전히 이해했다는 오만을 범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결국 그 정도와 맥락은 조금씩 다를지 몰라도 본질은 같은 방향에 있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사실은 이해보단 이해하려는 노력만 가득할 뿐이겠지만, 나는 내가 읽은 이야기 속에서 문득문득 스스로를 봤다고. 책 속의 이야기들과 나의 경험이 확연히 ‘겹쳐지고 있다’는 느낌을 강렬히 받은 이유들에 대해서는 이야기해볼 수 있지 않겠냐고.

 

그러니까, 우리 모두 내 몸이 온전히 나의 것일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 그것만은 명료하다.

 

그래서 이 장황한 이야기들의 결론이 도대체 무어냐고 하면, 뻔하지만 나 역시 그냥 내 몸은 내 몸이고 싶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 담백하고 단순해지고 싶다. 세상 역시 그러길 바란다. 나의 고유한 부분인 내 몸을 이유로 비난 받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하고, 걱정 받고 싶지도 않고 칭찬 받고 싶지도 않다. 내가 나인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고서도 수용되고 싶다.

 

세상뿐만 아니라 내 스스로도 그러길 바란다. 다리 굵기에 내 존재를 가두고 싶지 않고 평균보다 작은 허리 사이즈에 만족감을 느끼고 싶지도 않다. 습관처럼 ‘스캔’하며 훑어보지 않으려는 노력 없이도, 나와 모두의 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란다. 마음 속으로 실례를 범하고 내 모순에 대해 조용한 사죄를 올릴 일이 없기를, 나의 바람과 나의 현실의 간극에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과연 정말 한 치의 거짓없이 내 비틀린 생각과 마음들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자신은 없다. 다만 적어도, “자유가 주는 해방감을 한껏 즐기고 있는”(339면) 게이처럼, 그 순간 내가 깃털처럼 자유로워지리라는 것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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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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