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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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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야기를 실어 보려고 해. 괜찮을까?

  

예고 없이 던진 질문이었지만 친구는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실명을 싣지 않는다면 가명을 ‘토리’로 하고 싶다 말했다.

 

토리는 교환학생 시절 만난 친구였다. 토리와 같은 사람들 덕분에, 여름 즈음 처음으로 발을 내딛어 보았던 만리타향은 이듬해의 여름이 채 되기도 전 이미 내게 또 다른 고향과도 같은 곳이 되어 있었다. 살면서 보았던 것 중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웠던,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한평생 그와 같은 광경을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던 노을을 보았을 때 곁에는 토리가 함께 있었다. 그 노을을 목도하고 기억하는 사람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은 큰 안도감을 주었다.

 

토리와 나는 모두가 우리와 다른 언어를 쓰는 차갑고 낭만적인 도시의 복판을 누비며 초콜릿 도넛을 사 먹어 보았다. 페리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 환상적인 날씨의 여름 분수 위로 솟아오른 무지개를 보기도 했다. 반쯤 얼어붙은 공지천을 함께 구경하기도 했고, 에드워드 양이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인 ‘하나 그리고 둘’의 시사회 현장에 나란히 앉아 이십 년 전의 대만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같은 예술을 향유하고 같은 순간을 공유하며, 내가 아는 것 너머에서 토리는 어떤 또 다른 예술을 향유하고 어떤 또 다른 순간을 간직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토리에게 물었다. 토리가 마음에 담아 둔 예술에 관해, 토리가 사랑하는 이야기들에 관해, 토리를 지탱하는 순간들에 대해, 그리고 토리 그 자신에 관해.

 

*

 

1. 음악, 미술작품, 사진, 시 등 '순간'을 남기는 예술의 영역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취향과 선호의 여러 영역들을 자주 넘나드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고민에 빠지게 하는 질문입니다. 요즘 저의 마음을 가장 이끄는 것으로 꼽아 보자면 미술작품이 될 것 같네요. 미술에 관해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지만, 저에게 있어서 늘 알아 가고 싶은 세계입니다.

 

서울 부암동의 환기 미술관에서 전시관 지킴이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작품들 앞에 있는 듯 없는 듯 꽤 오랜 시간 배경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내밀한 기쁨을 주더라고요. 그림을 마주하는 관람객들의 표정과 몸짓을 바라보며, 저도 지나쳤던 작품들 앞에 다시 머물러 보기도 했습니다. 다른 예술의 영역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유독 미술은 작품에 관한 상상과 해석에 있어서 관람자에게 폭넓은 자유를 부여한다는 인상을 받곤 합니다.

 

 

2. 문학작품, 영화, 만화 등의 다양한 '이야기' 중에서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이야기’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저와 붙어 다니는 존재였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무렵 학교를 다녀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바닥에 엎드려 만화책을 챙겨보는 일이었습니다. 과학잡지에서 줄글은 쏙 빼고 책 뒤쪽에 실린 연재 만화를 다음 화가 나올 때까지 읽고 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도서관에서 만화책을 빌려보는 것을 좋아했고, 이때 읽었던 만화책 중에서는 <미스터 초밥왕>을 가장 재밌게 읽었어요. 지금도 만화에는 인생이 담겨 있다고 믿어요.

 

만화책만 읽다가 다른 종류의 이야기에도 기웃거려 보던 중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을 통해 처음으로 소설을 읽게 되었어요. 이때부터 제가 장르를 불문하고 주인공이 고군분투하며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죠. 그 후로 소설과 성큼 가까워졌고, 지금도 소설에 기댈 때가 많습니다. 새해에는 원소윤의 <꽤 낙천적인 아이>와 다자이 오사무의 <달려라 메로스>를 틈날 때마다 재밌게 읽고 있습니다.

 

영화는 친해진 지 얼마 안 된 친구와 같아요. 앞으로 더 친해지고 싶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에 있는 여러 독립, 예술영화관들을 알게 되어 더 많은 이야기들에 닿을 수 있었어요. 결국 질문에 관한 답을 생각하다 보니 제가 좋아하는 건 이야기를 전달하는 특정 매체나 장르보다도 이야기 그 자체인 것 같네요.

 

 

3.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 또는 문장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영웅이 아니야. 가끔 그럴 뿐이야. 우리 모두는 약간은 비겁하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이지.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어.

 

내가 그리고 싶은 게 바로 이거야. 우리는 착하면서 동시에 악하고, 영웅적이면서 비겁하고, 인색하면서 관대하다는 것, 이 모든 것은 밀접하게 서로 붙어 있다는 것.  

 

-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 가운데> 중에서

 

 

4-1. 당신이 가장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는 순간 - 또는 순간들 - 으로는 무엇이 있나요?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많은 일을 해내지 못할 때, 지금보다 스무 살 가까이 어릴 때 엄마와 함께 지도와 가이드북 한 권을 챙겨 체코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어요.

 

갑자기 거리를 걷던 중 예고 없이 비가 쏟아졌고, 엄마는 눈에 보이는 아무 상점에 들어가 밤색 패딩 점퍼 하나를 사서 저에게 급하게 입혀 준 뒤 제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어요. 그때 춥고 낯선 거리 한 가운데에 있었는데 이상하게 하나도 무섭지가 않았어요. 오히려 그날이 비가 온 날 중 가장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4-2. 당신이 힘들 때 당신을 지탱해 주는 순간 - 또는 기억 - 은 무엇인가요?


힘들 때 과거의 특정한 기억을 떠올리며 중심을 잡기보다는, 잠시 뒤로 물러서서 생각을 멈추고자 애쓰는 편입니다. 오히려 어떤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다 보면 더 힘들어질 때도 있더라고요. 이럴 때 저의 경우 나가서 무작정 걷는 것이 효과가 가장 좋습니다. 아니면 잠시 동안 푹 자곤 합니다.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라도, 제 기분은 한결 나아져 있더라고요.

 

 

4-3. 앞으로 당신이 가져 보고 싶은, 경험해 보고 싶은 순간으로는 무엇이 있나요?


하고 싶은 것도, 배워 보고 싶은 것들도 많지만 무엇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품이 넓은 다정한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련이 필요할 것 같아요.

 

 

5. 종류를 불문하고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 당신이 '좋아하는 것들'로는 무엇이 있나요? 반대로 당신이 '싫어하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느슨하지만 단단한 인연, 자유로이 경계를 넘나드는 것, 해롭지 않은 풍자와 유머, 정성스레 내린 커피, 우연히 마주친 일몰, 손편지, 낯선 언어 속에서 느껴지는 다정함을 좋아합니다.

 

싫어하는 것은 덮어놓고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태도입니다. 긍정 속의 의심, 부정 끝의 낙관을 좀 더 신뢰합니다.

 

*

 

가장 좋아하는 단어나 문장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누군가 내게 거꾸로 던진다면, 내 답에는 토리의 말들과 편지가 퍽 적지 않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토리는 내게 시집을 선물하며 말했었다. 그린아, 너를 보면 바다가 떠올라.

 

또한 토리는 이 년 전의 크리스마스 이브에 내게 써 주었던 손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너의 이름을 속으로 읊어 보는데 왠지 어감이 둥글고 다정하다는 느낌이 들었어. 부를 때도 쓸 때도 기분이 좋아지는 멋진 이름이야. 많은 것들을 품고 멋지게 흘러가는 그린아, 따뜻한 새해를 맞이하길 바랄게.


그 말들에는 힘이 있었다. 이를테면 설사 내가 바다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할지라도, 어째서인지 정말 바다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다고 잠시나마 착각하게 해 주는 힘.

 

내 이름이 실제로 부르거나 쓸 때 기분이 좋아지는지의 여부와는 무관하게, 그 말을 들은 나 자신이 스스로의 이름에 힘이 있다고 믿게 만드는 힘.

 

내가 간직할 만한 순간들과 간직할 만한 말들을 선물한 토리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싶다.

 

네가 좋아하는 ‘우연히 마주친 일몰, 손편지, 낯선 언어 속에서 느껴지는 다정함’을 공유할 수 있어 행운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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