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선율은 그야말로 탁월했다.
다시 떠올려 보고 싶어질 만큼.
2026년 1월 16일, 부천아트센터 콘서트홀에서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 제333회 정기연주회 ‘Top of the World’가 열렸다.
이번 공연은 신년음악회로, ‘정상’과 ‘도약’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됐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황제 왈츠’,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가 연주됐다.
지휘는 상임지휘자 아드리앙 페뤼숑이 맡았고, 피아니스트 선율이 협연자로 무대에 올랐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 황제 왈츠
ⓒ 유진
새해를 맞이하는 유쾌한 음표가 동-동- 떠오르기 시작한다. 오랜만에 음향을 충분히 받쳐주는 공간에서 만난 클래식이라, 이 느낌 자체가 무척 색달랐다.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왈츠는 어떤 모습이었던가. 애초부터 여유를 가지고 태어난 귀족적인 스텝을 밟기보다는, 깔끔하고 솔직하게. 샴페인 한 잔의 여유보다 아침 햇살의 생동감을, 선율을 능숙한 모양새로 이끌기보다는 깨끗하게 움직였다.
소리의 강조점이 모이는 구간에서 보인 색감이 인상적이었다. 연보라 라벤더에 하늘빛이 스며든 결로, 하얀 쪽을 향해 나아가며 다정한 속도감을 드러냈는데, 그 흐름이 무척 단단했다. 듣는 이가 거리감을 느낄 만큼 훨씬 먼 이웃은 아니지만, 품위를 유지하는 우아한 기색은 분명히 스며 있었다.
심장을 쿵- 하고 울리는, 왈츠를 추는 발끝이 닿는 구간에 몰리는 밀집감도 눈이 반짝일 정도로 선명했다. 느릿하지 않고, 나름의 씩씩함도 있었지만, 자연스럽게 끌릴 수밖에 없는 당당한 순수함이 소리 곳곳에 새겨져 있었으니.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
ⓒ 유진
I. Allegro
가장 첫 선에서 등장한 거대한 박동에 온 마음이 지체할 틈 없이 진동한다. 피아노가 재빠르게 길을 내리깔 때에도 주저함이 전혀 없다.
두 번째 박동은 조금 더 밀집된 형태로 발자국을 내리꽂고, 피아노는 유리알을 양손에 들여다 놓은 채 분위기를 마저 태워 올린다. 이어지는 박동에는 필시 모든 이가 무대 안으로 빠져들었겠지.
부천필하모닉과 선율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1악장이 사방으로 울려 퍼지던 순간을 기억한다. 무대 위와 천장 아래에서, 얇은 솜털을 지닌 소리가 장대하게 쏟아져 내렸다.
태양을 향해 달려 나가는 마차 행렬을 닮은 곡조, 뒷목이 아릴 정도로 두터운 성량의 솔직한 음색이 양팔의 감각을 단번에 일깨워냈다.
사실 이 악장은 선율 피아니스트를 길게 눈에 담았다. 그는 피아노 앞에서 어떤 사람일까,
내가 앉은 자리는 1층 왼쪽 좌석이라 연주자의 뒷모습과 건반 위에 올려진 양손을 모두 감상할 수 있었는데, 그가 걷는 길은, 그러니까 그가 띄워 놓는 소리는 모두 ‘네모’만 같았다.
네모? 왜 하필 그 도형을 떠올렸는지 생각해 보면, 그는 건반의 겉면을 단순히 터치하는 게 아니라, 그 각진 표면을 끝까지 눌러 소리를 깨워냈다.
터치는 그렇게 무거워 보이지 않았는데, 들리는 음표 하나하나가 지나치게 또렷해서, 마치 각 음이 개별적으로 핸드 마이크를 하나씩 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특히 오른손이 종을 울리고 왼손이 리드미컬하게 하향하는 구간에서, 강하게 들리는 음과 내려앉는 음의 세기가 서로 다른데도 성량은 모두 균등하게 들려서, 이렇게까지 잘 들려도 되는 건가 싶었다.
아주 잠시 가라앉았다가 피아노가 기세 좋게 타오른 뒤, 오케스트라와 합을 맞춰낼 때 공연장을 채우던 그 시원함이 아직도 생각난다.
ⓒ 유진
또렷한 음을 내는 유려한 피아노와, 청년의 푸르름과 열정을 닮은 오케스트라가 만나버리니, 눈을 감지도, 깜빡이지도 못한 채 건반 위를 걸어 다니는 양손만 바라봤다.
타오르는 새파란 불꽃 같은 타건이 이어질 때, 피아노의 소리는 선명한 윤곽을 가진 채 공간을 빠르게 채웠다.
광대한 박동이 돌아오고, 피아노가 위에서 아래로 빛을 쏟아낼 때마다 기다란 폭풍이 따라붙었다. 여린 음이 강한 힘을 만나면, 피아노에서는 이런 소리가 나는구나.
흥미로웠던 건, 연주자의 상체 움직임은 거의 없는데 소리는 정반대로 청중을 달궈낸다는 점이었다. 그는 거의 가만히 앉아 왼손으로 충격을 가하고, 오른손으로 정신을 일깨웠다.
씩씩하고 분명하게 휘몰아치던 흐름이 잊고 있던 ‘무언가’를 일깨워 내다가도. 이내 피아노는 홀로 남아 고개를 숙인 채 리드미컬한 길을 걷는다.
남겨지는 발자국이 예측하기 어려운 스텝에서 비롯되니, 그 자체로 시선이 갔다. 이건 연주자의 해석일까, 아니면 베토벤이 그렇게 그려 놓은 걸까.
1악장의 말미에는, 오늘 이 공연을 목격한 내가 지극히 운이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원한 소리를 사랑하는 내가, 빛으로 날아가는 새파랑과 연보라빛 행렬을 보고 있었으니.
솔직히 여기서 누가 박수쳤어도, 아무도 뭐라 못 했을 것이다.
II. Adagio un poco mosso
조금은 천천히—방금 전의 들뜸을 잠시 내려놓고, 숨을 고르는 시간이 찾아왔다. 마냥 작아지지도, 크게 울렁이지도 않는, 이미 거대한 품 안에서의 담백한 인사로 피아노를 맞이했다.
선율은 기교를 섞지도, 투박하지도 않게 하나씩 걸었다. 부담스럽지 않게 소리를 건넨다.
내려놓지도, 높이 띄우지도 않은 채, 이 악장을 걷는 사람들 앞에 눈높이를 맞춰 또박또박 나열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옆자리를 비워 둔 채 건반을 눌렀다.
1악장에서의 예측하기 어려운 리듬을 닮은 구간이 이곳에서도 다시 등장했을 때, 그의 연주는 절대 풀기 어려운 큐브를 해독하는 손놀림처럼 느껴졌다. 모서리는 둥글고, 결은 또렷한 무던하고 단단한 네모였다.
III. Rondo: Allegro
그러니 대단히, 정열을 닮은 이 3악장의 시작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윤이 난다고 말하듯 내달리면서도, 짚어야 할 곳은 정확히 짚는다.
지나치게 재주를 부리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은, 딱 베토벤을 위한 미소를 이만큼 가져와 주어 반가웠다. 연주의 끝자락으로 향하고 있음에도 힘은 약해지기는커녕 점점 더 살아났고, 생기를 북돋아 주었다.
새해에 이만한 응원이 또 있을까 싶었다. 신년음악회에 딱 안성맞춤이었다.
드보르자크,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
ⓒ 유진
I. Adagio – Allegro molto
거닐어 왔던 길 중 가장 황혼에 가까운 영역에서 시작하는 도입부를 지나, 반복해서 돌아올 주제가 나타나면 움츠러 있던 어깨가 절로 펴진다. 예측 불가함 속에 놓여 있으면서도 이렇게 모험적인 발걸음이라니.
파도가 들이치다가도 그만큼 물러나듯, 풍경 안에서 내가 휩쓸리기보다는 유리창 하나를 두고 “이렇게 향하면 된다”고 간접적으로 일러 주는 자연을 마주한 채 그저 바라만 보게 된다.
미묘하게 중독적인 주제를 서로 다른 악기로 반복해 들려주니 듣는 재미가 있다. 가뜩이나 시원한 소리가 거침없기까지 하니 지루할 틈이 없다.
망설임과 주춤거림과는 정반대의 단어들만이 자리할 수 있는, 우리만의 여행이라고 말해 주는 여유로운 긍정이 귀를 가득 채운다. 치밀하고 다정하게 쏟아져 내리는 폭풍우 속에 불길함 따위 끼어들 틈이 없다.
II. Largo
지휘자가 무대 위에도, 객석 안에도 정적이 머물기를 기다리던 장면이 생각난다. 관악이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그릴 때의 모습이 오늘의 협연자와 닮아 있었다.
냉정하지도, 마냥 따뜻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얼굴. 하고 싶은 말은 다 해 줄 사람의 표정이라 마음이 편해진다. 그의 소리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고, 조용히 전했다.
가로선 방향의 얇다란 현악이 길게 부는 바람처럼, 무덤덤한 얼굴로 떼지 않는 시선을 닮은 기다란 눈망울이 되었으니, 우리는 지휘자의 손을 가만 따라가면 된다.
마음을 비운 채 뒤따르다 보면, 둥글고 낮은 소리와 기다란 맥박이 어우러지고, 그리움으로 기울어진 음들이 아래를 지나 높은 곳을 찍어내며 풍경 안으로 뛰어든다.
관악이 홀로 노래를 부를 때, 현악이 그가 향하는 길로 따라 들어가며 정적의 우물 하나가 나타난다. 악기는 물론 숨소리 하나 내뱉지 못하던 모두가, 긴장 어린 고요 속으로 빨려 들어간 순간이었다.
그 찰나의 맺음, 침묵에서 피어난 작은 기다림을 나는 아직까지도 떠나보내지 못했다.
III. Scherzo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드는 종소리가 한아름 울렸다. 1악장의 거대함이 몇 배쯤 되어 돌아온 느낌이다.
회오리가 몰아치면서도 경쾌한 전원풍 멜로디를 꼭 들려주는 이 알쏭달쏭한 유희가 클래식답게 흥미롭고, 좋은 의미로 어이없다.
비장함과 농담, 어여쁨이 동시에 공존할 수 있는 3악장이라니. 별빛을 닮은, 모래만한 타악기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곤란하다. 곤란해.
IV. Allegro con fuoco
오늘의 지휘자 아드리앙 페뤼숑은 3악장이 끝나자마자, "지체할 것 없이 곧장!"이라는 태세로 단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누가 들어도 다 아는, 유명한 4악장의 시작을 맹렬하게 꺼내 놓았다.
지나치게 잘 알려진 구간일수록 자칫 연주가 뻔하거나 루즈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그는 이를 보다 생동감 있게, 살아 있는 형태로, 속도감 있게 이끌어 갔다. 청중은 자연스럽게 블록버스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대한 ‘장관’ 안에서 텐션을 한 번도 잃지 않고, 빨간불 하나 없이 직선 주로를 내달리는 소리가 있다면—바로 이곳이 아닐까.
신년의 시작을 이만큼이나 거리낌 없이, 방패 하나 없이 맞부딪쳐 나가라고 직언을 쏟아내면서도. 끝없이 격려하는 연주였다.
ⓒ 유진
그야말로,
끝이 없는 선율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