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이 글은

뮤지컬 <긴긴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31.jpg


 

 

아이들에게 슬픔이란


 

오랜만에 친구와 함께 공연을 보았다. 공연이 끝난 뒤 버스 정류장에 나란히 앉아 작품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친구는 아이들이 보기엔 너무 잔혹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공연의 도입부를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결국 노든의 곁에 있었던 이들은 모두 떠났고, 그는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으니까.


생각에 잠긴 나 대신 대답하듯 말을 꺼낸 것은 옆자리의 아이였다. ‘책으로 봤을 땐 행복한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공연으로 보니까 노든이 너무 불쌍했어.’ 알고 보니 그쪽 가족도 우리와 같은 장소에서 출발한 모양이었다. 의도치 않게 훔쳐 듣고 나니 원작을 사놓고 여유가 없어 읽지 못한 것이 아쉬워졌다. 지금은 그 아이에게 말을 걸어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래서 오늘은 그때 두 사람에게 들려주지 못한 대답을 중심으로 글을 써 볼까 한다.

 

 


가장 깊은 상처


 

뮤지컬 <긴긴밤>은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흰바위코뿔소 노든의 말년으로부터 시작한다. 동물원의 사람들은 노든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노든에 대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인 이름 없는 펭귄은 아무도 모르는 노든의 진짜 이야기를 관객인 우리에게 들려준다.


노든의 첫 기억은 코끼리 고아원에서 출발한다. 긴 코를 가진 다른 코끼리들과는 달리 뭉툭한 코에 커다란 뿔을 가진 노든은 자신이 코끼리라고 생각하면서도 바깥세상의 코뿔소들을 궁금해한다. 결국 고아원을 떠나기로 결심한 노든은 한동안 혼자 세상을 떠돌다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코뿔소들을 만나 가족을 만든다. 그러던 어느 날, 밀렵꾼들에게 가족을 모두 잃고 만다. 그렇게 노든의 ‘긴긴밤’이 시작된다.

 

 

긴긴밤 무대사진_1.jpg


 

노든이 처음으로 기억하는 장소가 ‘고아원’이라는 사실은 그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순간에 이미 무언가를 잃었음을 암시한다. 노든은 함꼐하던 이들을 계속해서 떠나보내야만 했다. 가족을 잃은 뒤 가게 된 파라다이스 동물원에서 만난 마음씨 착한 코뿔소 앙가부는 밀렵꾼에 의해 죽고, 전쟁이 터져 파라다이스 동물원에서 탈출하다가 만난 까칠한 펭귄 치쿠는 바다를 향한 험난한 여정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


<긴긴밤>은 이러한 노든의 심정이 절절하게 묻어나는 넘버다. ‘작은 것만 바라도 더 크게 계속 빼앗기는’ 순간들. 즉, ‘밤’이란 무엇인가? 라캉에 의하면 어머니로부터의 분리는 모든 결핍의 근간이 되어 남은 인간의 삶을 좌우한다. 말하자면 ‘상실’이란 인간에게 있어 최초이자 최악의 트라우마다. 그래서일까, 노든에게서 보이는 방어적인 태도와 반복되는 악몽, 소리에 대한 예민함 등은 전형적인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이다.

 

 


그럼에도 삶이란


 

그렇다면 이러한 긴긴밤들을 건너온 노든에게 삶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치쿠가 남기고 간 알에서 태어난 이름 없는 펭귄에게 전해진다. <살아남는 건> 넘버에서는 노든이 펭귄에게 들려주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인간과 달리 야생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에게 생존이란 그 자체로 중대한 과제이다. ‘살아남는 건 계속 일어나 걷는 것.’ 아주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긴긴밤 무대사진_4.jpg


 

이 이야기는 펭귄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노든이 먼저 펭귄에게 전해준 것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너무나 깊은 어둠을 짊어지고 살아야만 했던 어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에게 전하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그렇게 노든의 보호 아래서 펭귄은 세상이 ‘살아볼 만한 것’이라고 믿게 된다.


하지만 때론 아이가 어른보다 현명한 눈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치쿠의 부탁대로 펭귄을 바다에 데려다준 후 인간들에게 복수를 하러 갈 거라는 노든의 말에 펭귄은 그를 막으려 애쓴다. 결국엔 노든이 죽게 될 거라며. 노든은 복수가 잃어버린 것을 되갚는 것이라 말하지만, 펭귄은 기억하는 게 지켜주는 것이며, 노든은 이미 모두를 지켜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미 수많은 긴긴밤을 지나온 노든에게 여생은 중요치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때 그들은 또다시 밀렵꾼들의 습격을 받는다. 그러나 밀렵꾼뿐만이 아니었다. 상처를 입고 쓰러진 노든에게 그들은 코뿔소가 좋아하는 아카시아 잎사귀를 두고 떠난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들도 있지만, 좋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 노든은 펭귄 덕분에 또 다른 진리를 깨닫는다.


 

 

다시 그 순간이 와도


 

결국 노든은 복수를 단념한다. 하지만 바다에서 살 수 없는 노든과 바다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펭귄의 이별은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 <긴긴밤>은 여러모로 이 작품의 정신이 집약된 정수와도 같은 넘버다. ‘같이 떠나지 못해도 우린 같은 바다에 있어.’ 둘은 헤어지지만, 노든에게 이는 이제까지처럼 ‘상실’이 아니다. 펭귄은 파란색 바다를 찾아 떠나고 노든은 초원이라는 초록색 바다에 남는다는 것은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하겠다는 결정이다.


혼자가 된다는 건 죽음보다 무서운 것이지만 둘이 된다는 건 같은 기분을 나누는 것이고, 셋이 된다는 건 더없이 완전해지는 것이다. 마침내 노든은 기나긴 밤을 건너 지친 마음을 누일 곳을 찾는다. 그래서 코끼리 고아원을 떠난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펭귄의 말에 노든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 순간이 와도, 긴긴밤으로 걸어 들어갈 거야.
 

 

이는 노든의 가장 오래된 상처이자 그의 평생을 끈질기게 따라다닌 상처가 아물었음을, 흉터는 남겠지만 더 이상 그를 가두고 옭아매지 않을 것임을 뜻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그가 긴긴밤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과거가 현재의 시점에서 재구성한 허구적 결과물이며 그것이 늘 현재와 함께함을 깨달을 때 치료적 성공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인간은 나쁘다’는 것은 결국 노든의 환상이었다. 노든은 이를 깨달았고, 그 깨달음의 여정엔 수많은 ‘반짝이는 것’들이 있었다. 모두 긴긴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만남이었다.

 

 


피할 수 없다면 배워라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은 좋은 것만 보고 자라야 한다’고 말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유년기의 경험은 깊숙이 각인되어 성인기를 비롯한 삶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어린 시절에 겪은 트라우마는 특히 치명적이다. 하지만 어른들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서 언제 어떻게 아이들에게 찾아올지 모르는 슬픔을 전부 치워버릴 순 없다.


슬픔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같지는 않다. 정호승의 시 <슬픔이 기쁨에게> 속 구절처럼, 누군가의 무관심 속에 누군가의 추위는 계속된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것을 외면하지 않을 의무가 있다. 그러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면, 슬퍼하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 수도 없다.


그래서 아이들도 슬픔을 배워야 한다. 자신의 삶에 평등하게 찾아올 긴긴밤을 견디고 불평등한 추위 속에서 긴긴밤을 지새우는 노든과 같은 이들과 더불어 살기 위해. 그렇게, 살아남기 위해. 그러나 살아남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우리를 계속 일어나 걷게 하는 푸르른 지평선을 향해. 그렇기에 다시 긴긴밤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긴긴밤>은 아이들이 적당히 다치며 슬픔을 배우기에 더없이 좋은 작품이다.

 

 


무대 위의 긴긴밤


 

긴긴밤 무대사진_3.jpg


 

한편 동물들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어떻게 뮤지컬로 풀어낼까 궁금했는데, 코끼리의 코와 코뿔소의 뿔을 본떠 만든 소품, 펭귄의 털처럼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의상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캐릭터들을 구별할 수 있었다. 별다른 분장 없이 최소한의 장치를 사용했음에도 이야기에 몰입하다 보니 배우들의 모습에서 인간이 아닌 동물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눈에 띄었던 또 다른 연출은 조명과 바닥의 활용이다. 수직으로 바닥을 비추는 여러 갈래의 핀 조명은 노든과 앙가부를 가두는 동물원의 쇠창살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한다. 타일 모양의 바닥 조명은 빛의 색에 따라 바다가 되기도, 우리가 되기도 한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엔딩 장면에서 바다에 도착한 펭귄이 관객을 향해 밝게 웃으며 뒤돌아보는 순간 천장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파란색 풀볼들이었다. 이 작품이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면서도 펭귄의 순수함과 앞으로도 씩씩하게 펼쳐질 그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아 좋았다.

 

 


우리는 이제 혼자가 아니야


 

공연이 진행되면서 언제부턴가 극장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공연에 집중하기 위해 평정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공연이 끝난 뒤 친구가 공연에 대한 감상을 묻자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였어…” 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그 말에 까르르 웃던 친구의 목소리와 함께 코를 훔치며 멀어져 가던 관객들의 말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극장이란 직접 말을 나누지 않고도 같은 무언가를 목격한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참 신기한 공간 같다. 그런 의미에서 거추장스러운 말 대신 여러모로 작품과 닮아있다고 느낀 노래 한 곡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겠다. 사막을 건너 바다를 향해 끝없이 걸어가는 행진곡 같기도, 동심을 간직한 아이들과 동심을 추억하는 어른들을 비롯해 모든 독자에게 쓰는 동화 속 한 구절 같기도 하다.

 

 

空は青くすみ渡り

하늘은 파랗게 개어있고


海を目指して歩く

바다를 향해 걸어가


怖いものなんてない

무서운 것 따윈 없어


僕らはもう一人じゃない

우리는 이제 혼자가 아니야

 

 

 



이지선_PRESS.jpg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