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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연극 [언더독: The Other Other Bronte)]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극작가 사라 고든(Sarah Gordon)의 화제작 [언더독: The Other Other Bronte)]은 19세기 영국에서 소설가로 활약한 브론테 세 자매의 삶을 재해석한 창작극이다. 2024년 3월 영국 내셔널시어터에서 첫 무대를 올렸으며. 국내에서는 9월 25일부터 오는 10월 5일까지 열흘간 더줌아트센터에서 초연된다. 여성 예술가의 욕망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독특한 시각에서 조명한 이 작품은 여러 층위에서 곱씹을 만한 지점을 남긴다.
<언더독>은 브론테 세 자매 가운데 맏언니인 샬롯 브론테의 서술을 통해 전개된다. 공연의 초입,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관객들과 시선을 맞추던 강나리 배우의 눈빛이 기억에 남는다. 그때 나는 몇 차례의 리뷰를 쓰며 캄캄한 공연장에서 손의 감각에 의지해 글씨를 적는 데 제법 익숙해져 있었고, 어쩌면 그 때문에 그녀와 눈을 유독 오래 마주친다는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회고한다.
샬롯에 대하여
브론테 세 자매, 즉 샬롯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앤 브론테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을 꼽자면 단연 샬롯이다. 이는 화자이자 주인공이라는 역할적 특성에서 기인한 것이라 볼 수도 있겠으나 다른 여러 이유에서 시선을 끄는 면이 있다. 자칫 외모에 대한 평가처럼 비칠 수 있어 조심스럽지만 우선 적어 보자면, 첫 번째로 시각적인 요소이다. 극 중에서 미인으로 직접 언급되는 앤을 비롯한 다른 자매들과는 달리 샬롯은 전형적인 미인상과는 거리가 멀다. 의상 또한 에밀리의 초록색, 앤의 파란색 드레스와는 달리 샬롯의 드레스는 강렬한 붉은색에 디자인도 비교적 투박하다.
그리고 이는 성격적 특성과도 연결된다. 소심하고 얌전한 성격의 앤, 그리고 샬롯과 종종 반목하지만 가족의 갈등을 중재하려 애쓰는 상냥함을 지닌 에밀리에 비해 샬롯은 걸걸한 성격에 거친 말투로 자매들 사이에서 살짝 이질감이 느껴진다. ‘자매는 셋, 가면은 하나’라는 구호 아래 경쟁보다는 서로에 대한 응원과 격려를 중요시했던 에밀리와 앤과는 달리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고자 했던 샬롯의 성격 역시 의상 디자인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얘는 예쁘잖아’하고 앤을 가리키며 자신과 비교하는 등 외모 콤플렉스가 부각되는데, 이는 ‘영원한 명성’을 손에 넣겠다는 그녀의 야망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짝사랑하던 에제를 비롯해 남성과의 멋진 로맨스를 꿈꾸지만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하는 자신과 달리 아름다운 외모로 쉽게 사람들의 호감을 사는 앤은 샬롯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더해져 소설을 쓰고 싶다는 앤의 고백은 샬롯의 자리를 위협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을지도 모른다.
‘여돕여’란 성립 가능한가
앤이 가정교사를 하겠다고 나설 때는 앤의 이런저런 단점을 들추어가며 반대하더니, 소설을 쓰겠다는 말에는 ‘넌 가정교사 하고 싶은 거 아니었어?’라며 기를 죽이는 샬롯의 태도는 어찌 보면 뻔뻔하게 느껴진다. 또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과 앤의 <아그네스 그레이>와는 달리 자신의 소설 <교수>는 출판이 결정되지 않자, 샬롯이 가정교사라는 <아그네스 그레이>의 주요 소재를 태연하게 도용하는 사건은 앤과의 관계를 파국까지 치닫게 만드는 시발점이 된다.
이 외에도 샬롯은 에밀 리가 죽은 뒤 그녀의 유고 시집을 발간할 때 자신의 이름을 편집인으로 명기하고 판매 부수를 높이기 위해 글의 내용을 마음대로 수정한다. 이러한 샬롯의 모습은 얼핏 치졸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깝게 느껴진다. 160분 동안 그녀의 여정에 동행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그녀는 셋 중 누구보다도 누구보다도 처절했다. 야망을 지녔기 때문이다.
극중에서도 비슷한 대사가 등장하지만,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라든지, ‘여돕여(여자를 돕는 것은 여자)’라는 말은 실은 매우 기만적이다. 괴물이 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는 누구나 기물이 된다. 왕좌가 하나뿐이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거기에 올라야만 할 때, 무슨 수든 써야만 한다. 남자에게는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기에 서로 돕기도, 격려하기도 하면서 함께 정상에 오를 수 있지만 여자에게 주어진 기회는 극히 한정적이기에 단 하나의 왕좌에 앉기 위해서는 전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것이다. ‘자매는 셋, 가면은 하나’는 바꿔 말하면 ‘여자는 셋, 기회는 하나’가 된다. 애초에 여자에게 주어진 기회가 충분했다면 남자의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되었을 테니 말이다.
<언더독>은 페미니즘적인 메시지가 짙은 작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제를 다뤄온 기존의 방식을 비틀어 여성에 대한 차별을 둘러싼 문제를 보다 입체적인 시선에서 접근한다. 일례로 섬세하고 유약한 성정을 타고나 예술가를 꿈꿨으나 남성으로서의 의무와 가장이라는 자리의 무게에 짓눌려 일찍 생을 마감한 브랜웰의 경우가 그렇다. 성차별의 희생자이면서 같은 피해자인 다른 자매들 사이에서 가장 악독한 가해자로 군림하는 샬롯의 캐릭터성 역시 양면적이다.
이는 남성 기득권층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낸 여성에 대한 환상, 즉 ‘여적여’가 왜 환상일 수밖에 없는지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것에 대항하기 위한 여성의 연대, 즉 ‘여돕여’가 사회 구조 속에서 부딪히는 한계를 드러낸다. 때로는 그러한 프레임이 되려 남성들의 숨통을 옥죌 수 있다는 가능성과 함께.
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는 명목으로 샬롯의 삶이 여성 전기 작가 개스켈에 의해 ‘피해자’라는 프레임 안에서 이용당하는 결말 역시 이러한 메시지의 연장선상이다. 샬롯은 무대 위의 인물로서 ‘이야기’에 속하면서도 청중들과 대화하면서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흐리고 픽션의 한계와 가능성에 질문을 던지는 역할을 수행한다. 브랜웰이 그린 초상화를 두고 브랜웰과 대화하던 샬롯이 관객석을 바라보며 국립 미술관에 실제로 전시된 브랜웰의 브론테 자매 초상화에 대해 ‘참 아이러니하죠?’ 하고 질문을 던지던 순간이 기억에 남는다.
샬롯 브론테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듯 <언더독>은 실존 인물이라는 현실적 소재를 사용하였으나 어디까지나 재해석의 결과물로, 픽션에 해당한다. 이런 점에서 개스켈은 작가 자신에 대한 자조적인 시선이 담긴 분신 같은 인물이 아닐까 싶다. 특히 ‘새앙쥐’라는 별명처럼 겁 많고 소극적으로 보였던 앤이 ‘나 그렇게 소심하지 않아’라며 샬롯이 그렇게 적었을 뿐이라고 응수하자 샬롯이 큰 충격을 받는 장면에서는 이러한 고뇌가 묻어난다. 작가 역시 자신의 메시지를 위해 현실을 다녀간 실제 인물들의 역사를 함부로 다루며 그들의 삶을 파괴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진지한 성찰 끝에 만들어진 작품이라면 난 개인적으로 찬성이다.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는 아이러니, 가해자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 피해자라는 프레임과 그것을 지적하는 형식의 아이러니. 이 모든 층위의 아이러니에서 숙고의 흔적이 느껴진다. 작가의 문제의식을 따라 이야기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도달해 있는 묵직한 결말은 우리로 하여금 그 고민의 무게를 함께 짊어지도록 이끈다.
우리 곁의 언더독
언더독(underdog)은 ‘궁지에 몰린 개’, 또는 ‘싸움에서 진 개’를 뜻하는 말로 ‘사회적 약자’라는 확장된 의미로도 사용된다. 어둠 속을 비추는 핀조명 아래에서 처연한 듯, 후련한 듯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세 자매는 과거에 있었고, 현재에도 존재하며, 미래에 발생할지 모를 언더독들의 다른 얼굴이다. 나 역시 펜을 든 여성으로서 택할 수 있는 길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기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다만 나는 여성으로서 왕좌에 오르는 일이 반드시 개인의 승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개척’에 가깝지 않을까. 우선 나라도 여왕이 되어 2대, 3대 여왕의 길을 닦아놓는 것 역시 ‘협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이야기지만 나도 야망이 꽤 큰 편이기에 어쩌면 이 글 역시 샬롯의 변명만큼이나 방어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언더독>은 샬롯이 주인공이 되어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추악했고, 그렇기에 누구보다 자격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