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문화 초대 알림을 받았다. 메시지의 가장 위에는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라는 콘텐츠 이름이 적혀 있었다. 프랑스의 조르주 베르나노스 작가가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집필한, 영화 시나리오 형식의 도서라고 했다. ‘수녀’라는 단어에 왠지 모르게 끌려 눌러보니 해당 작품을 소개하는 글은 전체적으로 두 가지 키워드를 강조하고 있었다. ‘종교’와 ‘죽음’. 내가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그래서 더 흥미롭다고 느끼곤 하는 분야들이었다. 이 책을 읽어보고 싶다고 느낀 것도 그 지점에서였다. 내가 잘 모르는 세계가, 그 세계를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 알고 싶어서.
솔직하게 말하자면, 미리 각오했음에도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엔 다소 어려운 책이었다. 종교의 시스템이나 전문 용어, 근 3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시대 격차, 그것도 전혀 다른 문화권인 중세 프랑스에서 펼쳐지는 역사적인 시대 배경 등이 마치 당연한 지식인 양 독자를 향해 쏟아져 내리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고 집필된 책이기 때문에 줄글로 된 설명이나 내면 심리묘사도 적다. 간결한 행동 지시와 대사만 있을 뿐이다. 한 페이지에 서너 줄짜리 각주가 주렁주렁 달리는 일도 예사다.
하지만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제목대로 이 책의 주연인 열여섯 명의 수녀들이 자신들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공포정치가 사회를 장악한 1700년대 말의 프랑스. 온 거리가 혼란으로 가득 차고 사람의 목숨은 파리처럼 취급되는 그곳에서 콩피에뉴의 가르멜 수녀원의 수녀들은 일제히 단두대에서 처형되어 사라진다. 어떤 정당한 이유도 없는, 가히 박해라고 할 만큼 갑작스럽고 공포스러운 죽음이지만 그 앞에서 수녀들은 초연하다 못해 당당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최후를 짐작하고 미리 자체적으로 순교 서원을 진행하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천주(하느님)께로 향하는 영광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조르주 베르나노스 작가의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는 프랑스대혁명과 그에 뒤이은 공포정치를 배경으로 한다.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며 시민 혁명을 일으켰고, 이것이 프랑스대혁명의 발단이 된다. 세계 항로가 활성화되며 자본가 계급이 부상하고, 먼저 일어난 미국 독립혁명의 영향으로 자유 의식까지 고취된 상황에서 절대 왕정이 지배하는 구 체제가 인구수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평민 계층의 불만을 불러일으킨 결과였다.
혁명의 결과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들어선 뒤 루이 16세의 처분을 두고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지만, 힘을 얻은 강경파가 루이 16세를 처형하며 혁명은 점점 과격한 양상을 띠기 시작한다. 이후로는 12인 위원회, 혁명재판소, 공안위원회 등을 거치며 양당 간의 극심한 정치 싸움이 이어지다, 끝내는 거의 2만여 명의 프랑스인의 목숨을 앗아간 공포 정치가 시작되기에 이른다.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프랑스 대혁명(1789)이 아닌 7월 혁명(1830)을 그린 작품이나 자유, 평등, 박애의 공화주의 이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기에 이해를 돕기 위해 첨부
이 거친 소용돌이 앞에 세워진 주인공은 귀족 출신의 젊은 여성인 ‘블랑슈 들라포르스’다.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세상에 난 블랑슈는 용기와 힘을 뜻하는 들라포르스 가문의 일원임에도 태생적으로 죽음에의 극심한 공포감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다 하루는 결국 도망치듯 봉쇄 수도원인 가르멜에 들어가 버리지만, 생각지 못하게 공포 정치의 손길이 그곳에까지 밀어닥치자 또다시 겁에 질려 도망친다.
그렇게 숨어다니기만 하던 와중 아버지의 처형 소식과 함께 자신과 함께 지냈던 가르멜 수도원 수녀들의 전원 체포 소식을 듣자 블랑슈는 그녀들의 처형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다. 열두 명의 수녀들이 한 명씩 차례대로 단두대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는, 마지막 수녀의 처형이 끝나자 그 순간 갑자기 공포를 잊고 성가를 부르며 단두대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주인공인 블랑슈는 이 책의 주제인 ‘죽음’, ‘공포’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된 인물이다. 그녀는 탄생의 순간부터 죽음과 함께하는 운명을 타고났다. 어머니가 불운한 사고로 그녀를 낳자마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족의 죽음을 빌려 태어난 블랑슈는 아버지와 오빠가 걱정할 정도로 병적인 공포를 가진 채로 살아간다. 심상찮은 분위기로 들썩이는 사회 분위기가 그녀의 불안감을 한껏 부채질한 것도 있으리라.
평생을 자신을 위협하는 죽음의 공포로부터 도망치며, 삶을 갈구하며 살았던 블랑슈는 오히려 스스로 나서서 순교 서원을 하는 가르멜 수녀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반면 천주께 목숨을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수녀들 역시 그런 블랑슈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 비치는 블랑슈는 겁쟁이다. 순교를 당연시하는 수도원 내부의 분위기 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당연한 욕구를 가진 블랑슈는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소수자가 되어 겉돌게 된다.
블랑슈 저는 그분들이 죽는 걸 원하지 않아요! 저도 죽고 싶지 않아요!
{그는 마리아 수녀가 붙잡을 새도 없이 달아난다. 그러다가 추방자가 된 사제와 문에서 마주친다. 사제는 기뻐서 소리친다.}
전속 사제 사랑하는 블랑슈 수녀, 여기 왔구려! 천주는 찬미받으소서!
그러나 완전히 넋이 나간 블랑슈는 황망하게 그를 쳐다보다가 별안간 몸을 빼쳐 사라진다.
종교란, 믿음이란 무엇일까. 삶에의 욕구라는 당연한 인간의 본능을 정반대인 죽음에의 욕구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 만큼 강대한 무언가라는 것은 분명하다. 순교 서원을 한 수녀 중에서도 젊은 수녀 몇 명은 죽음을 앞두고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원장의 신앙 어린 몇 마디에 금세 진정된다. 그들은 오히려 같이 잡혀 오지 않은 블랑슈 수녀가 자신들을 부러워할 것이라고 여기기도 한다.
죽음은 어디까지 영광될 수 있을까. 옳다 그르다를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비종교인이자 현대인의 시야에서는 분명 내용을 곱씹을 시간을 더 많이 필요로 하는 작품이었다. 그토록 죽음을 피해 도망 다녔던 블랑슈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은 최후의 순간 갑작스럽게 용기에 휩싸여 단두대를 향해 스스로 걸어간 것은 영적 초월을 이루어낸 인간의 성스럽고 복된 구도(求道)일까, 아니면 끝내 등 뒤의 죽음에 굴복당해 그를 향해 이끌려가는 패배의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