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첫 미국, 생애 첫 장거리 비행, 생애 첫 긴 이별. 입국심사를 모두 마치고 이제 진짜 혼자가 됐다.
바라보는 세계를 넓히고 싶어서 세계 반대편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익숙한 곳의 정든 사람들에게 예상보다 더 큰 응원을 받았고 지지가 계속될수록 마음은 묘해졌다.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어쨌든 이 모든 소중한 것들을 두고 나는 혼자가 되길 택했다. 고난과 역경이 훤한 길이지만 골이 깊어야 산이 높아진다지 않는가. 출국 당일 아침에 아빠가 전해준 언젠가의 일기 속 문장이었다.
아빠 그리고 엄마와의 출국장 앞에서 이별을 끝으로 더 이상 선택한 길을 무를 수 없게 되었다.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 있을 때 겨우 혼자가 되었고 왠지 울적해졌지만 그 감정을 오롯이 느껴야만 했다. 완전히 들뜨지도 완전히 슬프지도 않은 애매모호한 마음을 결론짓고 싶었다. 새출발 앞에 제대로 된 세팅을 하고 싶었달까.
시원섭섭한 울적함도 잠시, 같은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을 만나 몇 분 이야기 나누다 보니 곧 탑승 시간이 가까워졌다. 지금까지 가장 긴 비행은 3시간 30분이었는데, 14시간 비행을 앞두고 은근한 설렘과 걱정이 밀려왔다. ‘진짜 가는구나!’ 싶은 마음과 ‘까짓거 영화 몇 편 보고 자고 먹고 나면 후딱 지나있지 않을까?’ 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러나 후자의 생각은 역시 오만이었다.
시간은 예상보다도 더 느긋하게 흘렀다. 이코노미석에서 밀려오는 허리의 통증을 알기나 하는지 무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이 조금 얄미웠다. 기내식도 먹고 좋아하는 시리즈 몇 편과 빌리 아일리시 영화를 보고 음악 재생 목록도 좀 담아놨다. 물론 숙면도 취했다. 그래도 8시간이나 남아서 결국 노트북을 꺼냈다. 이 글이 올라갈 적엔 14시간이 훌쩍 지나있겠지.
스크린 항공은 처음이라서
장거리 비행이라 그런지 걱정했던 것들이 이미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 내 자리를 찾자마자 보인 건 웰컴 선물. 담요와 슬리퍼, 베개가 좌석 위에 올려져 있었다. 혹시나 해서 챙긴 목베개와 안대에 웰컴 선물까지 더해지니 왠지 안심됐다.
기내 수하물로 챙긴 무거운 배낭 속에는 비행을 위한 준비물로 가득 채워 왔는데, 긴 비행에서 배낭을 끌어안고 있을 수는 없을 거란 판단하에 필요한 걸 모두 꺼내 선반에 올려두고 나니 내 좌석 앞주머니는 곧장이라도 터질 듯했다. 충전을 위한 멀티탭부터 에어팟, 줄 이어폰, 일기장과 책, 젤리 그리고 말랑이까지. 전부 혹여나 꺼내놓은 것들인데 나중에는 전부 도로 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스크린이 제공되는 비행이라 들떴지만 가장 처음 난관을 마주했다. 바로 이어폰 연결 타입 문제다. 2가지의 시나리오가 있었다. 첫 번째는 블루투스 연결이 되어서 에어팟을 사용할 수 있는 비행. AI에게 물어본 거라 당연히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혹 에어팟 연결이 제공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줄 이어폰도 챙겼다. 그러나 빠르게 바뀌고 발전하는 세상에 따라 당연히 연결 부분이 C타입일 줄 알았다. 옛날 오디오 연결 방식인 원형 잭 타입인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14시간을 비행기 소음과 함께 갈 자신은 어디에도 없었으므로 이어폰을 구매해야겠다고 생각한 찰나, 승무원께서 이어폰을 나눠주고 계셨다. 웰컴 선물과 줄 이어폰, 매 비행 모든 승객에게 이 전부를 나눠주려면 비행사에서도 꽤 감수가 크겠다 싶은 서비스였지만, 아무래도 비행기 걱정보다는 내 걱정을 하는 게 더 실속 있었다.
기내식, 마침내 실감한 그리움
저녁 비행기였으므로 낮에 먹은 엄마의 제육볶음이 이미 소화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비행기에 타자마자 오매불망 기내식을 기다리느라 혼쭐이 났는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리기 직전에 음료를 나눠주시기 시작했다. 저마다 음료 설명도 없이 원하는 음료를 주문하길래 나만 모르는 건가 싶어 옆 사람을 따라 오렌지 주스를 시키려다가 용기 내 물어봤다. 이번 여정에서 다짐한 건 제대로 알고 나의 선택을 따라가기였으니 그 첫 실천은 웃기지만 음료 선택이었던 거다. 승무원 분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나서 평생 선택해 본 적 없는 사과주스를 주문했다. 순간 몸이 원했나 보다.
곧이어 기내식이 나왔고 이번엔 외국 승무원의 안내가 있었다. 김치볶음밥과 라비올리, 매운 연어가 있었는데 처음에 ‘kimchi fried rice’만 정확히 알아들었기에 두 번 묻기에 난감해서 그냥 김치볶음밥을 선택했다. 음식을 받고 나니 옆자리 승객 분께서 당당하게 못 들은 음식 들게 대한 설명을 요청하는 걸 보고 세 번째 음식이 매운 연어라는 걸 알게 됐다. 승무원은 다음 칸으로 넘어갔지만, 음식을 열어보기 전 내적 갈등이 계속 일었다. ‘미국 항공사까지 탔는데 김치볶음밥?’이란 생각이 들다가도 마지막 한식이려나 싶고, 그러자니 연어가 어떤 식으로 제공될지 궁금했다. 결국 “익스큐즈 미”를 외치고 음식을 변경했다. 바꾼 게 최고의 선택인지는 잘 모르겠다. 옆자리 승객 분의 라비올리 냄새가 무척이나 좋았기에.
배고파서 음식을 급하게 먹던 중에 배가 찬 건지 급 목울대에서 더 이상 음식을 받아들이질 못했다. 그리움에 찬 울음의 징조가 보일 때마다 이런 상태에 놓였는데, 한 번 이 상태를 느끼고 나면 한동안은 몸속의 수분이 전부 파도처럼 일렁이는 듯했다. 강력한 태풍 속에 감정이 소용돌이쳤고 그 원인은 그리움이었다.
두고 온 사람들이 수저를 들 수 없이 나를 강력하게 지배했다. 유독 떠오른 건 아무래도 부모님이었다. 안 그래도 부모님이 제일 그리웠겠지만 바로 직전 2일 동안 엄마의 거한 밥상을 먹고 난 기억이 기내식을 먹을 때 고스란히 겹쳐져 그리움이 더 요동쳤다. 엄마 밥을 먹으려면 이 여정이 끝나야 한다니, 길지 않은 시간이 끝나지 않을 시간처럼 멀게 느껴졌다.
그래도 먹을 건 먹어야지 싶어서 제공되는 브라우니까지 먹어 치웠다. 말 그대로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정신을 놓은 상태로 먹고 나서 자리를 정리했다. 한 번 그리움에 잠식된 마음이 쉽게 가라앉을 리 없었다. 스크린에서 마침, 최근 보고 있던 미드 <오피스> 시리즈가 있어서 호기롭게 재생했지만 슬픔이 드리워진 상태로 번쩍거리는 스크린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아파져서 결국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알았다. 속에 들어찬 눈물을 빼내기 전까지 잠을 잘 수 없으리란걸. 베개에 얼굴을 대고 감정을 고스란히 느껴보려 하니 뚝뚝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왔다. 마음 같아선 얼굴을 베개 속에 파묻고 울고 싶었지만, 어느 정도 일부러 빼내려고도 하니 그렇게 눈물이 펑펑 나오진 않았다.
이 여정을 준비하며 제일 두려워한 순간이다. 언제 울게 될까, 실감이 나지 않아서 울음이 나오지 않는 순간에는 겁먹었다. 한 번은 울어서 게워 내야 설렘이 치고 올라올 구석이 생길 텐데. 눈물이 가져다줄 좋은 영향을 기다리고 있었고 생각보다는 늦게 왔다. 사실 아직 제대로 오지 않은 걸 수도 있다. 언제 외로움이나 그리움같이 눈물의 기원이 될 감정이 들지 모르므로. 아직은 위태로운 상태다. 설렘과 슬픔 사이에서 줄다리기하고 있다.
하지만 내내 이 줄다리기를 하며 내 안에서 싸우고 버티고 싶진 않다. 그 어느 때보다, 그 누구보다, 그 무엇에도 감정에 솔직하고 싶다. 그러려고 이 길을 선택했다. 아직은 눈앞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으므로 기대감으로만 가득 찼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이 비행이 끝나면 세계 반대편에 도착한다. 내가 걸고 감수한 만큼의 성장이 얼만큼일지 전혀 예상되지 않지만, 지금부터는 뭘 해도 플러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