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외되고 버려진 자리에서 피어나는 우주보다 광활한 꿈 [영화]

폐허가 된 건물에 홀로 남겨진 소년의 꿈을 향한 처절한 외침, 영화 <가가린>
글 입력 2022.12.31 20:00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1.jpg

 

 

*

본 글은 영화 ‘가가린’의 내용 및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가가린>의 초반부에는 1963년의 실제 장면이 담긴 흑백 필름이 등장한다. 필름은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사 ‘유리 가가린’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주택 단지 ‘가가린’의 준공식을 비춘다. 프랑스 정부가 주도한 도시 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지어진 대단지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준공식에 참석한 유리 가가린의 이름을 외치고 환호한다.


흑백 필름이 컬러로 바뀌는 순간, 영화의 배경은 약 50년 후로 이동한다. 환호로 가득 찬 준공식의 모습과 새로운 도시에 대한 이상과 기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노후화되어 녹슨 거대한 공동 주택만이 잔존하고 있다. 명백히 대비되는 두 시기의 모습 그리고 여전히 같은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가가린을 비추며 영화는 시작한다. 



4.jpg

 

 

작중 가가린은 철거 직전의 건물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노후화되고 낡은 주택단지다. 가가린 주변 지역의 산업 환경이 쇠퇴하며 거주 환경 또한 극심히 악화되어 갔고 이후 거의 방치되다시피 한 것으로 보인다. 


소외된 외곽 지역에 위치한 버려지고 낡은 건물에는 빈곤이 자리하기 마련이다. 가가린에는 300세대 이상의 가난한 이민자들이 모였다. 배선과 배관이 망가져 전기가 끊기기 일쑤였고, 건물의 외벽에 금이 가서 깨지는 일도 흔했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거주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가린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소중한 삶의 터전이었다. 아이들은 넓은 흙바닥을 놀이터 삼아 뛰어놀곤 했고, 건물 옥상에 옹기종기 모여 춤을 추기도 했으며, 일식이 일어나는 날이면 모두가 한곳에 서서 함께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가난과 노후화된 시설은 시시때때로 그들의 일상을 괴롭혔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그곳에서 삶과 공동체를 꾸려 나갔다.

 


2.jpg

 

 

그중에는 가가린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소년 ‘유리’가 있었다. 유리는 우주비행사의 꿈을 가진 다재다능한 흑인 소년이다. 꿈을 키워나갈 수 있게 해준 공간이자 이웃들의 보금자리인 가가린을 지키기 위해, 그는 멈춘 엘리베이터 등 문제가 생긴 시설들을 직접 고치며 노후화된 건물을 보수하려고 애썼다.


건물을 오래도록 지키고자 하는 유리의 바람과는 달리, 결국 건물 안전 감사가 닥치며 가가린의 철거 및 재개발 지시가 내려진다. 철거 명령이 내려짐과 동시에, 가가린에 살고 있는 수많은 주민들은 빠른 시일 내로 주택 단지에서 퇴거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이상적인 도시 구축의 목표를 토대로, 인류 발전의 상징인 우주 비행사의 이름을 따서 거창하게 건설된 대단지는 어느새 탈산업화와 함께 하층민들의 슬럼으로 전락했다.

 

낡아가는 건물을 일절 보수 혹은 관리하지 않은 채 소외된 외곽 지역의 거주지와 약자를 방치한 무관심으로 인해, 누군가에게는 물리적, 심리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삶의 터전이었던 ‘집’이라는 공간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6-6.jpg

 

 

그렇게 모두가 어쩔 수 없이 가가린과 작별을 고하게 되지만 유리만이 끝까지 그곳에 남는다. 유리는 자신이 우주 비행사의 꿈을 키우던 공간이자 소중한 이들이 남긴 삶의 흔적이 가득한 곳을 쉬이 떠나지 못한 채, 홀로 남아 텅 빈 폐허가 된 가가린을 지킨다.


소년의 어머니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고, 유리의 꿈을 지지해 주던 친구 ‘디아나’와 ‘우삼’도 그들의 가족이 있는 곳으로 떠났다. 그는 완전히 혼자가 되어 갈 곳 잃은 자신에게 유일한 친구이자, 꿈이자,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가가린을 결코 떠날 수 없었던 것이다.


유리는 가가린에 머무르며 자신이 살던 방을 마치 우주 비행사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것처럼 조성하기에 이른다.

 

낡고 허름하기 짝이 없던 방은 꿈을 향한 소년의 간절한 손길이 닿아 초현실적인 공간으로 재탄생한다. 그는 매일 밤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드리운 방에서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별들을 바라보며 집이라는 공간을 지키겠다는 꿈을 끝끝내 놓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할 뿐이다. 마침내 가가린이 철거되는 날이 다가왔고, 거주했던 모든 이들이 건물 앞에 다시 모이게 된다. 가가린에 살았던 모든 순간들이 힘들고, 가난하고, 남루했을지라도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가가린을 소중히 여겼고 건물이 사라지는 것에 대해 애틋함과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3.jpg

 

 

마지막 순간, 영화는 가가린의 철거를 위한 폭파를 우주선의 발사에 빗대어 연출한다. 우주선 발사를 앞두고 카운트다운을 하듯, 철거반은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건물 폭파를 위한 카운트를 세 내려간다. 


이윽고 기적이 일어나듯 가가린에 별처럼 밝은 빛이 들어온다. 가가린에 홀로 남아있던 유리가 건물에 설치한 등의 불빛을 통해 모스 부호로 SOS 구조 신호를 보낸 것이다. 건물에 깃든 자신의 꿈과, 가가린에서 지냈던 수많은 이들의 소중한 순간들을 잊지 말아 달라는 소년의 외침이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가가린을 살려달라는 한 소년의 처절하고 절실한 호소였다.


건물에 빛이 켜짐과 동시에, 유리를 품은 가가린은 우주선처럼 하늘로 떠오른다. 가장 낮고 소외된 곳에서 혼자가 됐던 소년이 높이 떠오르며 그토록 바라던 광활한 우주로 향하게 된다. 비로소 유리가 가가린과 하나가 되어 간절한 꿈을 향해 무한한 가능성이 깃든 우주로 발돋움하는 듯한 장면을 비추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7.jpg

 

 

영화 <가가린>은 겉으로는 화려하고 거창해 보이는 도시 개발의 뒷면에 가려진 쓰라린 현실을 비춘다. 건물 철거와 재개발로 인해 정착지와 속하던 공동체를 순식간에 잃고 이리저리 방황하게 되는 하층민의 상황을 실감하게 만든다.


그저 주변의 소중한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순간을 지키고 싶었던 작은 소년 유리가 홀로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의 곁에 누군가가 남아 함께 싸워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모두들 자신이 당장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좌절이 아닌 희망의 메시지를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엔딩에 펼쳐지는 판타지 같은 장면이 현실이 되어 소년의 꿈이 이뤄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소년의 끈기와 한 데 모인 이들의 간절한 눈빛을 통해 꿈과 연대의 힘을 자각할 수 있다.


유리와 가가린이 함께 보내던 SOS 구조 신호는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영화의 간절한 호소이자 외침일지도 모르겠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꿈과 희망이 피어나듯이, 모두가 포기하지 않고 관심과 연대의 시선을 꾸준히 보낸다면 소외된 곳에서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믿어 본다.

 

 

 

박지연_에디터태그.jpeg

 

 

[박지연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4.23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