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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팬레터>의

주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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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근현대잡지자료>

 

 

「김명순(金明淳)이가 매를 마젓대-」

「김명순이라니?」

「탄실(彈實)이 말이야 동경(東京)에 가 잇는데 호콩(땅콩)을 팔너 다니다가 매를 죽도록 마젓대!」

 

- <땅콩 행상을 하는 김명순 씨(호콩 行商을 하는 金明淳氏)>, 별건곤》 제66호(1933년)

 

 

한국 최초의 여성 근대 소설가인 김명순(1896~1951)에 관해 말하는 기사는 호사가들의 ‘카더라’로 시작합니다. 동인지 《창조》의 유일한 여성 동인이자, 시, 소설, 수필 등 여러 갈래의 작품을 짓는 데 재능이 있던 문인 김명순은 작품 활동을 하는 동안에는 물론, 조선을 떠난 이후에도 이 같은 카더라 스캔들로 뭇사람의 입에 오르내려야 했습니다. 그가 일본에서 매를 맞았다는 “비보"를 소개한다는 이 기사에서는 심지어 김명순의 생을 감히 이렇게 평가합니다. “연애문학(戀愛文學)을 조화하야 한 때 문학중독(文學中毒)이 결국은 그를 방분한 녀편네를 만드럿고 끗끗내는 인테리 낙화생 행상으로 매까지 맛는 신세가 되고 말엇다.”(위 기사)


김명순과 같은 근대 문학 초기의 여성 문인들은 잡지 등의 대중매체를 통해 스캔들의 중심이 되며 '성적으로 방종하다’는 비판을 받았고, 이 스캔들은 다시 남성 문인들의 글감이 되었습니다. 일례로 김동인은 김명순에 관한 스캔들을 소재로 삼아 《김연실전》이라는 소설을 쓰며 그가 도덕적으로 타락했다고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여성은 스캔들화되면서 그 자체로 소설이 된다.“(심진경, <여성문학의 탄생, 그 원초적 장면>)라는 지적처럼 여성 문인을 향한 스캔들은 대중매체, 남성 작가들의 소설과 공모하며 그들을 문학의 주체가 아니라, 타자로 주저앉혔던 것입니다.

 

 

[팬레터] 공연사진_17 김히어라_제공 라이브(주).jpg

 

 

뮤지컬 <팬레터>의 '히카루'라는 캐릭터가 특별하게 다가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히카루는 세훈이라는 남성 청년이 쓴 편지에서 태어난 가상의 인물, 즉 ‘관념 캐릭터’입니다. 뮤지컬 <아가사>의 로이, <호프>의 케이(K), <사의 찬미>의 사내와 같은 계보에 있는 인물로, 인격은 없지만 무대 위에서 하나의 캐릭터로서 실재하는데 이는 뮤지컬에서 낯설지 않은 방식이지요. 세훈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히카루의 설정은 이렇습니다. 열아홉 살,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조선으로 돌아온 신여성, 글을 씀, 병환이 있음, 희게 빛나는 얼굴과 또렷하고 날카로운 눈매, 까맣고 윤기 나는 단발머리를 가진 매력적인 여성. 이렇게 캐릭터화된 히카루는 해진과 세훈의 관계를 잇고 결국 파국으로 이끌어가는 인물로, 이 작품의 장르적 재미를 책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훈이 ‘히카루’라는 이름으로 해진에게 편지를 보내고, 해진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히카루와 사랑에 빠지면서 오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됩니다. 편지의 발신인이 알고 보니 다른 사람이라는 점에서 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가 떠오르기도 하지요. 그런 면에서 어쩌면 시라노처럼 세훈도 자신이 히카루라는 비밀을 오래 간직하다가, 먼 훗날에서야 해진에게 진실을 밝혔을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 시라노처럼 15년을 묵혀 두기엔 해진의 병세가 심상치 않았기에 불가능했을까요? 그래도 히카루의 존재감이 점점 커지지 않았더라면 오해는 비극이 아닌 촌극으로 마무리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히카루'라는 인물을 스캔들로 소비하는 (남성) 대중의 반응만 없었더라면 가능했을지도요.

 

 

[팬레터] 공연사진_16 김히어라_제공 라이브(주).jpg

 

 

독자 1 세상에, 이것 좀 봐.

이 소설가, 김해진 애인이라는군.

병이 있다는데! 죽을 병인가!(기침소리 흉내)


독자 2 세상에, 이것 좀 봐.

“눈을 감으면 어차피 같은 거짓과 진실”

신상불명, 묘령의 아가씨가

이런 대담한 문장을!


독자들 새로운 소설! 사랑의 이야기!

작가는 열애 중인 미모의 아가씨!

그녀는 어디의 누구일까!

 

- 한재은, 《뮤지컬 팬레터 대본집》(라이브, 2017)  ‘song#8 신인탄생' 중에서

 

 

‘song#8 신인탄생’은 이 스캔들이 어떻게 비극을 추동했는지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해진에 의해 히카루의 소설이 발표되자, 대중은 신인의 탄생과 새로운 소설에 열광하면서도, 그가 해진의 애인이라는 점에 관심을 가지고 그의 신상 정보를 궁금해합니다. 앞선 김명순의 기사처럼 이 장면과 넘버에서도 '카더라'에 기초해서 '묘령의 아가씨'를 신비화하지요. 신문을 든 여러 명의 남자가 히카루 한 사람을 가운데에 세워 두고, 둘러싸며 노래를 부르는 연출적 구도는 이러한 점을 형상화합니다. 영화 <말레나>의 담배 장면을 오마주하여 뭇 남성이 담배를 문 히카루 앞에 라이터를 가져다 대는 연출도 같은 맥락 위에 있습니다.


스캔들로 인해 히카루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해진의 문학적 동지인 칠인회 멤버들은 히카루를 "자칫하면 죽음으로 인도할 뮤즈"라고 일컬으며 그의 정체를 밝히려고 합니다. 이에 세훈과 히카루는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점점 더 해진을 고립시키고, 결국 해진과 단둘이서만 소설을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듭니다. 세훈이 히카루라는 인물을 만든 것은 사랑에 빠진 해진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됐지만, 히카루는 점점 스캔들을 먹고 자라며 다른 목표를 향해 움직입니다. 병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해진이 소설 <생의 반려>(김유정의 미완작을 모티브로 함)를 완성하게 하고, 이를 해진과 히카루의 유작으로 남기고자 하는 것이지요.

 

이는 최고의 작품을 세상에 남기고 싶은 창작자의 열망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을 둘러싼 스캔들에 정점을 찍으려는 스캔들 대상의 주체성이기도 합니다. 그가 의도한 대로 실제로 대중은 해진과 히카루의 죽음을 두고, 두 사람이 함께 목숨을 끊는 정사(情死)를 했다면서 유고집과 편지가 공개된다는 소식에 "연애 편지와 사랑의 밀어, 파격적이고 자극적이래. 아, 모처럼 대단한 사건!"(song#1 유고집)이라며 열띤 반응을 보입니다. 이렇게 대상화된 존재, 타자화된 존재가 도리어 파괴적인 주체성으로 작품의 갈등을 이끈다는 점에서 히카루는 여성 문인을 향한 대중의 시선과 스캔들을 전유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팬레터] 공연사진_20 소정화_제공 라이브(주).jpg

 

 

그래서 그를 단순히 안타고니스트라고 말하기에도, 세훈의 감추어진 욕망 혹은 세훈의 글 쓰는 자아라고 단정하기에도 어려운 구석이 있습니다. 히카루라는 인물은 세훈과 점점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세간의 관점과 편지 속 텍스트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캐릭터성을 구축하니까요(그리고 그것이 '작가로서의 세훈'과 잘 동일시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뮤지컬 <팬레터>가 여성 문인에 대한 폭력을 고발하려는 작품은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엄연히 세훈이며,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해진과 갈등을 해소하게 된 세훈은 다시 히카루를 되찾고 글을 계속 써 나가기로 하면서 결말 지어집니다.


하지만 히카루라는 캐릭터가 보여 주는 근대의 문화적 풍경은 세훈과 해진의 이야기에 드라마를 만드는 한편, 작품이 말하지 않는 것들, 그러나 작품 아래에 분명히 깔려 있는 맥락에 관해 한번 더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작품이 일부러 사회상을 감췄다기보다는 오히려 이 전형적인 이야기의 기저에 사회상을 엮어 내어 특별한 장르적인 재미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특히 소정화를 비롯한 배우들이 세훈과 해진, 세훈과 히카루, 히카루와 해진 사이의 관계성에 깊이 몰입시키며, 존재감을 강렬하게 뽐내는 모습을 보는 즐거움도 상당합니다. 김명순이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김명순, <유언>)라고 외쳤던 근대 초기의 조선 사회를 무대로, 그 사나움을 먹고 자라난 캐릭터 히카루가 있다는 것. 이 전유된 사나움이 작품의 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만든다는 것. 그것이 히카루가 특별한 이유이자, 뮤지컬 <팬레터>의 10주년을 견인한 '빛'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봅니다.

 

 

[팬레터] 공연사진_23 김이후_제공 라이브(주).jpg

 

 

<참고>

- 국사편찬위원회, <근현대잡지자료>

- 한재은, 《뮤지컬 팬레터 대본집》(라이브, 2017)

- 심진경, <여성문학의 탄생, 그 원초적 장면>,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민음사, 2018)

- 권보드래, 《연애의 시대》(현실문화연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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