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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현실은 끝내 희곡이 되지 않는다 - 연극 '마우스피스' [공연]

타인의 삶을 이야기한다는 것에 대하여

by 노미란 에디터
2026.05.14 12:44

 

 

연극의 시초로 이야기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비극, 즉 연극의 궁극적인 목표로 카타르시스를 제시한다. 연극 속 주인공의 비극을 통해 관객은 억눌려 있던 감정을 해방하고, 이를 통해 자기 삶에 대한 교훈과 성찰을 하게 만드는 일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연극의 의미였다.

  

'시학'은 이외에도 연극이 갖추어야 할 여러 조건을 제시하며 오랫동안 극작술의 기준과도 같이 여겨져왔다.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힘이 유지되는 이유는, 그러한 극작 방식이 관객의 감정과 몰입을 가장 효과적으로 끌어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극작가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무대 위에 옮겨오기보다는 사건의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만들고, 여러 가지 요소들을 재배치하며 관객이 이야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도록 하나의 극적 세계를 구축한다. 그렇게 연극 속에서 재현된 세계는 현실과 닮아 있으면서도 동시에 현실과는 확연한 차이점을 가진다. 예를 들어 희곡 속 인물들의 성공과 실패는 명백한 인과관계 속에서 일어나나, 실제 삶에서의 실패와 성공은 그렇게 명확한 인과관계 내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희곡 속에서 재현된 세상은 현실과는 분명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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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마우스피스'는 연극의 재현 방식과 그 불완전성에 관해 질문하는 작품이다. 한때 주목받던 극작가였던 리비는 상업성과 사회에 대해 질문하나 그러면서도 기존의 질서 체계를 흔들지 않는 선에서의 동시대성만을 좇는 연극계에 환멸을 느끼고, 중년의 나이가 되고 나서는 연극계에서 나가기를 선택한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위해 언덕의 절벽 위에 오른 리비는 우연히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소년 데클란에게 구조된다. 우연히 본 데클란의 그림과 그가 품고 있는 삶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리비는 관계를 이어 나가며 그 삶을 바탕으로 희곡을 쓰고자 한다. 처음에는 리비를 경계하던 데클란 역시 리비가 보여주는 예술의 세계를 통해 언젠가 자신 또한 목소리를 낼 수 있고, 누군가가 그 목소리를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은 희곡을 함께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장면 전환마다 극작의 방식에 관해 이야기하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고하는 리비는 전통적인 극작술을 신뢰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연극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잃었기에 연극계를 떠났다고 말하면서도, 여전히 어딘가에서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현실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 듯한 모습이 희곡을 써 나갈수록 드러난다.


반면 데클란은 예술의 가능성을 알면서도, 동시에 현실의 생존 문제가 더 중요한 인물이다. 사랑하는 동생을 지키고 싶고, 그리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리비는 그러한 데클란의 삶과 절박함을 자신의 희곡 속에 옮긴다. 그리고 그 희곡의 제목을 무대 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인물이 담긴 데클란의 그림 ‘마우스피스’에서 따 온다.


희곡 ‘마우스피스’ 속에서 데클란에게 대응하는 인물은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실제의 데클란은 그렇지 않지만, 리비는 관객들이 더 깊이 몰입하고 감정적으로 동요할 수 있도록 비극적인 결말을 선택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현실이 아닌 연극 속 세상의 이야기이며, 비극을 통해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고 데클란과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세상에 들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리비의 목적이다. 하지만 데클란은 리비의 재현 방식에 분노한다. 희곡 속에서 자신의 삶이 타인의 감동을 위해 변형되는 모습, 극적인 결말을 위한 죽음이 데클란에게는 자신의 삶을 왜곡하는 폭력처럼 느껴진다. 결국 마지막 장면을 두고 두 사람은 충돌하며, 두 사람의 관계는 파국을 맞는다.


이후 리비는 희곡 '마우스피스'를 실제 무대에 올리게 된다. 공연 소식을 신문으로 접한 데클란은 직접 관객과의 대화 행사에서 리비에게 질문하려 하고, 극장에 찾아온다. 결국 객석에서 무대 위로 난입한 데클란은 이 연극이 자신의 이야기임을 밝힌다. 연극의 창작진과 관객들 모두 이야기의 실제 당사자가 등장했다는 사실에 환호한다.


그러나 연극은 어디까지나 현실을 허구로 재현해 내는 일이며, 그렇기에 리비의 연극은 현실의 데클란이 무대 위에 등장하는 순간 힘을 잃는다.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재현된 비극에는 깊이 공감하면서도, 실제 현실인 데클란이 눈앞에 등장하는 순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데클란은 리비에게 다가가 현실적인 도움을 요청하나 그곳의 그 누구도 선뜻 손을 내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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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와 데클란은 예술이 삶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일은 오히려 현실의 누군가를 대상화하고, 생략하며 타인의 고통을 감동적인 구조 안에 가두는 폭력이었다. 재현과 생략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이제는 삶을 변화시킬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에도 연극이 의미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실제 삶을 완전히 담아낼 수 없는 연극의 특성상, 재현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상화를 완전히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0마우스피스' 역시 소외계층을 바라보는 사회의 고정관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어쩌면 작품의 제목이 리비의 희곡과 동일하게 ‘마우스피스’인 이유 역시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작품은 단순히 타인의 목소리를 대신 전달하는 행위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대변’하려는 순간 발생하는 왜곡과 폭력 또한 함께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비가 처음 데클란에게 연극에 대해 알려주며 말했던 ‘거대한 공감의 기계’라는 말에서 드러나듯, 연극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말해보고 싶다. 연극은 필연적으로 현실과는 다르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목소리를 듣게 만드는 공간이 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디지털 매체를 통해 쉽게 이야기를 소비하고, 또 쉽게 외면할 수 있는 시대에 연극은 같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타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게 만든다. 그것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한 채 계속해서 바라보게 만드는 경험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연극의 마지막에서 데클란이 정말 리비의 희곡처럼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지, 혹은 계속해서 살아가는지는 끝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작품은 의도적으로 그의 결말 두 가지를 동시에 보여준다. 데클란이 선택한 현실이 무엇이며 그 이후가 어떻게 되었을지 관객들의 상상에 맡김으로써 연극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는 결말이다. 연극을 만드는 것은 이러한 재현의 문제와 부딪히는 일일 것이고,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끝내 남을 수밖에 없는 공백과 불완전함을 인정한 채 현실과, 그리고 그것을 모방하려는 예술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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