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초입부터 불어온 달큰한 가을 바람을 타고. 공항버스를 타고 달려 비행기 표도 없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여행객들을 보며 느끼는 설렘도 잠시. 택시를 타고 ‘파라다이스 시티’로 이동한다. 2026 사운드 플래닛 페스티벌로 향하기 위함이다.
보라색 슬로건과 보라색 티를 입은 사람들이 빼곡한 페스티벌 입구. 저 멀리서 어떤 노래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이 친숙한 멜로디는 무얼까. "...씨엔블루잖아!!!" 약간의 정적 이후에 나도 모르게 친구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며 흥분했다. 음악 페스티벌에 온 것이 실감이 나는 순간이었다. 오로지 들리는 감각에만 집중한 채, 메인 인 ‘사운드 플래닛 스테이지’로 향했다.

이미 씨엔블루가 뜨거운 가을 햇살 아래에서 관객들을 휘어잡고 있었다. 무대 아래 파란 초가을 하늘 휘날리는 팬클럽의 가지각색 깃발들이 유난히 펄럭이며 덩달아 마음을 간질였다. 빼곡히 스탠딩 관객이 들이찬 앞 쪽을 뒤로하고, 언젠가 날씨 좋은 날 쓰려고 고이고이 아껴두었던 돗자리를 펼쳤다. 돗자리 위에 몸을 뉘이고 저 멀리서 불어오는 음악에 그저 마음을 맡겼다.

메인 스테이지에서 멀어져 조금은 외진 공간으로 가니 무대도 관객도 한눈에 들어오는 Brisse 스테이지가 보였다. 마치 다른 행성에 온 것처럼, 약간의 그늘 아래 가을바람이 때때로 스치는 그곳에서는 사뭇 다른 공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무대를 보는 모두와 충분히 눈맞춤을 할 수 있을법한 그리 높지 않은 무대 위. 마치 막 작업실에서 나온 듯, 편하지만 깔끔한 복장을 하고 산들바람처럼 살랑 목소리를 싣고 있는 적재가 있었다. ‘잘 지내’, ‘같이 걸을래’, ‘별 보러 가자’, ‘Run Away’ 향수의 잔향처럼 은은하게 퍼지는. 때로는 톡 쏘는 사이다와 같이 마음을 적시는 플레이리스트가 흘러나왔다.
공간과 날씨의 힘인 걸까. 무대에 선 적재 역시 연신 "오늘 너무 좋은데요" 하고 짧게 평을 하고는 계속 노래를 이어갔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한낮의 꿈처럼 나른한 오후 한 조각을 보내고, 한껏 들뜬 마음으로 다음 무대의 주인공을 기다린다.

기분 좋은 가을바람의 여운을 이어갈 아티스트는 장범준. 흰 셔츠에 청바지, 그리고 역시나 그의 시그니처와 같이 기타 줄을 한 어깨에 맨 모습에서 프로페셔널이 느껴졌다. 무대 리허설 시간 기타를 조율하던 그가 관객을 바라보며 작정한 듯 말했다. "오래 기다리는 것 보단 노래 한곡 듣는 게 낫죠"?
"여수 밤바다, 이 조명에 담긴 아름다운 얘기가 있어, 네게 들려주고파 전활 걸어…"

한껏 기대에 찬 눈으로 무대만을 바라보던 관객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그의 깜짝 선물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무대 아래로 내려오더니 관객 위로 솟아올랐다. "여러분 조금만 기다려주시고, 이따 40분에 만나요." 소무대의 장점을 200% 활용해 관객의 마음을 달래면서, 코 앞에서 소통하는 그를 보며 소위 말하는 ‘짬바’를 느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무대. 첫사랑, 꽃송이가, 정말로 사랑한다면,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 거야, 잠이 오질 않네요. 쉴 틈 없이 명곡이 쏟아졌다. 들리는 노래마다 추억에 잠기고, 때로는 생각에 빠겼다가, 그 순간의 분위기에 취하는 일이 반복됐다. 그리고 노래 중간중간에는 본인을 향한 암시인지, 관객들을 향한 다그침인지 ‘쉬지 마 쉬지 마’ 하는 그의 웃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눈 깜짝할 새 지나버린 20대처럼. 단 1분의 틈도 없이 명곡 폭주기관차처럼 달리던 무대가 끝나고, 뒤늦게 몰려드는 여운과 미처 가시지 않은 열기 사이에서 방황하다 잠시 휴식을 취했다.

본격적으로 날이 어두워지며 어반자카파의 무대가 시작되었고, 마치 세이렌의 노래에 이끌리듯 다시 Brisse 스테이지로 향했다. ‘Beautiful Day’, ‘목요일 밤’, ‘서울의 밤’, ‘Just Two Of Us’와 같은 신나는 노래들을 지나, 어반자카파의 정수와도 같은 발라드 노래들이 옅게 물든 남색 가을밤을 수놓았다.
평소 어반자카파의 노래들을 정말 좋아했다. 마음에 파고드는 멜로디, 포근한 화음,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김없이 아린 감정을 터뜨리는 조현아의 보컬. 언젠가 한 번은 꼭 공연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꿈을 이룬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라이브는 생각보다도 더 황홀했고, 이어폰 너머로 들을 때보다도 훨씬 더 큰 힘이 느껴졌다. 한 곡 한 곡 노래를 들으며 옆 친구에게 연신 "너무 잘해 ..." 하고 당연한 사실을 말하며 유난을 떨었다. 약간의 울먹임은 덤이었다.

‘Stay’를 마지막으로 가을밤 정취와 낭만이란 낭만은 모두 느낄 수 있게 해 준 그들의 무대가 끝나고. 마법 행성에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공항철을 타고, 이어폰을 꽂고 오늘의 노래들을 복기하며 생각했다. 누군가를 이렇게 넋이 나간 채로 오래 바라본 적이 있었는가? 잠시지만 모든 걸 잊고 그 순간을 즐긴 적이 있었는가? 몸이 부서질 듯 피곤하지만 이토록 마음은 축제처럼 즐거운 적은? 아마 꽤 오래됐던 것 같다. 그래서 이번 플래닛 페스티벌이 가뭄에 단비처럼 반가웠던 것만 같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여의도 불꽃축제를 즐긴 ‘아주’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 동안 버스를 기다리고, 자정이 다 되어 침대에 누웠다. 페스티벌 팔찌는 그대로 찬 채로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일어나니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마치 흔한 판타지영화 클리셰처럼. 오직 팔에 남은 팔찌만이 어제의 모든 일들이 현실이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