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내 생에 가장 투박한 공감과 위로 – 아침바다 갈매기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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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9회 부산국제영화제 3관왕을 차지한 <아침바다 갈매기는>이 11월 27일 개봉을 확정했다.
영화 <불도저에 탄 소녀>로 데뷔한 박이웅 감독의 ‘강렬한 새로운 흐름’이다.
시사회 당일, 상영을 앞둔 박이웅 감독의 간략한 코멘트는 그의 영화에 대한 흔들림 없는 확신을 보여주었다. “아무 정보 없이 보는 게 역시 가장 재미있을 겁니다. 모두 즐겁게 관람하십시오”
목적지를 모르는 배에 우선 올라타긴 했는데, 영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던 나에게 들려온 ‘선장’의 외침은 이내 새로운 기대까지 갖게 했다. 그리고 영화 시작 10분 만에 모두를 강렬한 사건과 감정의 소용돌이로 안내했다.
줄거리 - 한 달이면 된다던 거짓말. 계획이 어긋났다.
평화로워 보이는 한 어촌마을. 영국(배우 윤주상)은 새벽같이 배를 몰고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작은 배의 선장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물을 걷어 올리다 그의 조수 용수(배우 박종환)의 다리가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하는 사고가 발생한다. 안 그래도 어업과 어촌마을 생활 자체에 염증을 느끼던 용수. 이 일을 계기로 마을을 떠날 것을 결심하게 된다.
그런데 ‘떠나는’ 그의 방식은 예사롭지가 않다. 어촌마을에서 두둑이 사망 보험금을 챙겨 떠나기 위해 그는 가짜로 세상을 떠나기로 선택한다. 바로 영국에게 위장죽음 연극에 동참할 것을 부탁한 것. 용수가 그렇게 살벌한 계획을 떠들 때, 썩은 동태 같던 눈이 잠시나마 반짝 빛나는 것을 봐 버린 영국은 결국 요청을 받아들인다. 다음 날 영국이 경찰에 사건을 신고하며 공식적으로 그의 ‘죽음’이 선언된다.
이후로 진실을 알면서도 마을 사람 모두를 철두철미하게 속여야 하는 영국의 외로운 싸움, 그리고 날벼락같이 가족을 잃은 용수네 가족의 슬픔과 어촌마을의 미묘한 변화까지 영화는 빈틈없는 사건으로 영화를 채워간다.
영화 지침서 1 - 삭막한 우리 ‘어촌’ 사회
영화에서 용수의 죽음은 가장 큰 사건이자, 그동안 드러나지 않던 어두운 구석을 비추는 등불과도 같다. 그의 부재로 삭막하기 그지없는 어촌마을의 민낯, 용수의 부인인 영란(배우 카작)의 설움과 차별이 가감 없이 비춰지기 때문이다.
먼저 삭막한 어촌사회의 분위기이다. 아주 바쁘게 돌아가는 어촌사회에서 누군가의 죽음은, 그리 많은 시간과 감정을 들여 집중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구 하나 용수엄마 판례(배우 양희경)의 옆에서 따듯한 위로 한마디 건넬 줄을 모른다. 용수를 찾기 위해 낮이고 밤이고 계속되는 마을 주민들의 수색도 사실 보험금이라는 달콤한 보상을 노린 보여주기용 선행에 가깝다. 마을을 떠나 아무도 없는 바다 한복판. 수색 배 두 척에서 오고가는 대화는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쯤이면 진작 죽었어!” - “XX 그걸 누가 몰라!”
그의 죽음으로 베트남 국적의 부인 영란(배우 카작)의 일상 또한 일그러져버린다. 의도치 않게 보험금의 최대 수혜자가 된 영란을 두고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함부로 입방아에 올린다. 또, 알게 모르게 영란을 향해있던 차별과 무시의 시선은 용수의 죽음 이후 더욱 깊이 파고든다.
누군가의 죽음에도 진심으로 아파하지 못하는 둔감함, 그리고 숨 쉬듯 존재하는 차별은 영화의 ‘어촌사회’가 아닌 ‘우리 사회’를 대입하더라도 어색하지 않다. 용수의 죽음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 하나에만 기대 이 모든 것들을 견디기에는 버거웠다. 비록 가짜인 죽음이었을지라도, 용수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마수에 맞서기 위해서는 곱절의 사랑과 위로, 그리고 진심이 필요했을 것이다.
영화 지침서 2 - 용수라는 청년, 영국이라는 어른
영국은 대체 왜 용수의 기상천외한 부탁을 들어준 걸까. 이로 인해 영국이 감당해야 할 일들의 부담은 너무나도 컸다. 또, 판례와 영란의 절망까지 지켜보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영화 후반에 드러나는 영국의 가족사가 드러나며 이를 설명해 준다. 그에게는 어촌마을을 떠나고 싶어 하던 둘째 딸이 있었고, 이를 완강히 거절한 그에게 돌아온 것은 비극스러운 딸의 죽음이었다. 그의 딸처럼 어촌마을을 떠나고자 하는 부탁을 혹여나 거절하면 용수가 불행해질까, 혹 그의 딸처럼 비극적인 선택을 할까 두려운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우리 사회의 ‘청년과 어른’이라는 프레임을 하나 추가하고 싶다. 용수는 작은 어촌사회에 흔치 않은 젊은 인력이다. 안 그래도 쇠락해 가는 어촌사회에서 용수정도의 나이라면 초년생에 가깝다. 반면 영국은 어촌사회의 베테랑이다. 험한 어업 일도, 그물쇠에 찢긴 팔의 상처도 노련하게 대처할 수 있는 기성세대이자 어른이다. 이를 우리 사회로 확장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청년 인구는 점점 줄어가고, 살아가기 너무나 팍팍한 세상에서 삶의 진한 회의감과 피로를 느껴가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어쩌면 영국이 용수의 ‘차라리 죽여달라’는 부탁에 동조한 것은, 어른으로서 그가 용수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의 위로이자 공감이었을 것이다. 그의 딸에게는 가닿지 않았던, 오히려 역효과만 났던 서투르고 투박한 소통을 평생의 후회로 품고 있었을 영국이기에, 용수의 말은 뭐든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따스한 어른인 영국의 존재는 영화 내내 차가운 바닷바람과도 같은 날 선 분위기에 햇빛을 비춘다. 월남쌈 맛을 가지고 이런저런 불만을 토하던 그가 영란이 외국인출입국 심사를 받던 날, 점심으로 쌀국수집에 데려가 “먹던 맛이냐”라고 물으며 챙겨주는 것처럼. 세상 경험 다 해본 어른의 ‘짬과 바이브’로 무례한 외국인출입국 직원에게 대신 한소리 하는 것처럼. 그리고 마지막에는 판례에게 찾아가 그녀의 안부를 은근슬쩍 확인하는 것처럼. 비쩍 말라가는 청년 용수는 물론, 사회적 약자인 영란, 같은 이웃주민이자 동지인 판례에게도 그의 빛은 틈틈이 스며든다.
총평 - 마른바다에 무지개 같은 영화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아주 갑작스러운 '누군가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영화.
아주 삭막한 마른 바다에서도, 영국이라는 존재가 있기에 무지개와 같은 희망을 볼 수 있는 영화.
가족간 사랑, 사회의 쇠락과 갈등, 세대 공감이라는 무지개처럼 다채로운 주제가 스쳐가는 <아침바다 갈매기는>.
강렬한 스토리 이외에도 강렬한 배우들의 일품연기가 있었기에, 영화를 본 후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장면장면이 머릿속에 그대로 보존되었다. 9년 만에 영화에 출연한 윤주상 배우의 색다른 모습을 담았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영화가 가지는 의미가 깊다. 특히 점잖고 차분한 목소리로 각인되어 있는 윤주상 배우가 극 중 ‘노발대발’하는 모습은 적잖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판례 역을 연기한 양희경 배우의 뜨겁고 아린 감정연기는 가짜 죽음임을 알면서도, 다시 한 번 장면을 되짚게 만들만큼 생생하다.
이외에도 한국에서 활동하는 베트남 연기자 중 가장 한국말에 능해 캐스팅되었다는 카작. 보는 관객들의 마음까지 공허하게 만든 용수의 삶에 지친 눈동자 연기까지. 극 시작부터 몰아치는 사건과 감정의 파도에 올라탄 관객에게, 네 배우의 연기는 끊임없는 물보라처럼 관객을 몰입으로 적신다.
“그렇다고 죽을 순 없잖아요”
극 중 어촌마을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형락(배우 박원상)의 대사로 리뷰를 마무리하고 싶다.
극 중 “왜 다시 돌아왔느냐”는 영국의 물음에 그는 죽을 수는 없어서 다시 돌아왔다 답했다. 우리의 삶에서 어쩌다 ‘죽음’이라는 선택지가 이토록 가까이 조여 오게 되었는지. 또 용수가 그랬듯 어쩌다 더 잘 살기 위해서 죽음까지 감내하게 되었는지 조금은 씁쓸하다. 극 중 영국의 투박한 대사와 행동으로 조금이나마 이를 지워본다. 언뜻 들으면 혼내는 듯 하지만, 들어보면 피가되고 살이 되는 따끔한 어른의 말과 조언으로 오늘도 내일도 폭풍우 치는 바다같이 험난한 세상을 잘 살아가본다.
[채혜인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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