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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가장 안정적인 회피형 [드라마/예능]

비록 조금 부끄러울지언정

by 윤경주 에디터
2026.05.23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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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의

스포일러를 담고 있습니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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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는 타입인가? 과감하게 정면 돌파를 하는 편인가, 혹은 회피하는 편인가?

 

헝가리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Szégyen a futás, de hasznos' 비록 창피하게 도망쳐도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직업을 잃은 구직자 '미쿠리'와 35년 차 독신 샐러리맨 '츠자키'가 '고용 관계'를 통해, 가사 노동과 월급의 교환을 위한 '계약 결혼'을 맺는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이다. 


미쿠리는 심리학을 전공하고 대학원까지 진학했지만 '쓸데없이 고학력'이라는 이유로 파견직 계약 연장에 실패한다.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어버린 미쿠리가 새롭게 시작한 일은 '츠자키 히라마사'의 파트타임 가사 도우미 일이었는데, 그녀의 야무진 솜씨는 까다로운 츠자키의 기준을 단번에 만족시켰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이사로 또다시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한 미쿠리는, 츠자키에게 고용 관계를 전제로 한 계약 결혼을 제안한다. 마침, 집안일 관리가 절실했던 츠자키 역시 제안을 수락하고, 두 사람의 특별한 동거 생활이 시작된다. 




가사 노동의 정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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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적인 사회 통념 속에서 여성의 가사 노동은 '내조', '집안일' 등 '일'로서의 가치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했다. 직장에서의 노동은 그에 맞는 경제적인 대가를 받지만, 가정에서의 집안일에서는 어떠한 경제적 대가도 할당되지 않는다.

 

육아나 가사 노동에 대한 인식이 많이 유연해지는 추세이지만, 여성의 가사 노동을 가족에 대한 사랑과 책임으로 여기는 낡은 인식은 여전히 남아 있다. 흔히 맞벌이 부부임에도 '집안일을 잘 돕는 남편'은 가정적인 사람으로 칭찬받지만, 아내의 가사 노동은 당연한 희생처럼 취급되곤 한다.


하지만 츠자키는 미쿠리의 가사 노동에 대해 정당한 임금을 지급한다. 그들은 노동을 호의가 아닌 '계약 관계'로서 명확히 인정한다. 보통의 로맨스가 '감정-사랑-결혼'의 순서를 따른다면, 이 작품은 '계약(결혼)-신뢰-감정'의 흐름을 갖는다.


노동을 계약으로 분리하는 태도는 자칫 사랑의 부재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가 철저한 계약으로 성립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으로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사랑의 감정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은 오히려 이를 통해 감정이라는 이름 아래 당연하게 소비되던 여성의 노동을 다시금 주목한다. 미쿠리는 '좋아하기에 괜찮다'는 이유로 자신의 노동이 희생되는 것을 거부한다. 결혼을 하면 급여를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는 '합리성'을 이유로 츠자키가 건넨 청혼에, 미쿠리는 '좋아함'의 착취에 대해 단호히 반대한다고 반박한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 새로이 등장한 대안은 바로 가정의 '공동 경영 책임자'다. 이들은 수직적인 고용 관계를 넘어, 가사 노동을 누군가의 '당연한 일'로 치부하지 않고 남녀 모두 가정을 공동으로 이끄는 CEO가 되어 건강한 책임 분담을 실현해 낸다.



 

편견에 맞서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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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서는 성소수자, 독신 여성, 싱글맘 등 다양한 삶의 모습들을 조명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등장인물은 미쿠리의 이모인 '츠치야 유리'라는 캐릭터였다. 유리는 뛰어난 외모에 외국계 화장품 회사의 홍보부 부장대리라는 타이틀까지 갖춘 완벽한 커리어 우먼이다.


유능하면서도 자유로운 그녀의 삶은 다른 여성들의 선망 대상이 되지만, 동시에 그녀는 여러 사회적 편견을 감당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는 종종 능력 있는 여성을 '억세거나 독한 사람'으로 납작하게 치부해 버리곤 한다. 게다가 남성 중심의 조직 내에서 극소수에 불과한 고위직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녀는 원치 않게 여성 직장인 전체를 홀로 대변해야 하는 존재다.


또한 마흔아홉이라는 나이임에도 독신이라는 사실은 개인의 의사나 선택과 무관하게 타인의 동정 어린 시선을 받기 일쑤다. 그러나 유리는 나이 듦에 대한 사회적 압박과 편견 어린 시선에 대해 당당히 맞선다.


유리는 젊음에 대한 강박과 한계점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여성들을 향해 "자기 자신에게 저주를 걸지 마!"라며 일침을 날린다. 유리의 이 통쾌한 한마디는 사회가 여성에게 씌운 편파적인 굴레를 깨부수려는 능동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도망쳐야 할 때와 도망치지 않아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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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쿠리는 취업 경쟁으로부터, 츠자키는 인간관계로부터 도망쳤다. 그들은 사회가 규정하는, 이른바 '정상성' 밖에 있는 인물들이다. 취업에 실패한 청년, 연애와 결혼으로부터 멀어진 남성.


회피는 나약함의 상징이라고 쉽게 정의되지만, 때로는 도망이라는 방법이 유일한 생존 전략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동시에 모든 도망을 긍정하지도 않는다. 도망치지 않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상황을 외면하고 살아남는 것보다도, 더 소중한 무언가를 지켜야 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츠자키는 미쿠리와 사랑의 감정을 마주하는 순간에도 다시 회피하려 하지만, 소중한 사람을 잃고 싶지 않다면 두려움과 맞서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설령 그 모습이 부끄럽거나 꼴사납더라도 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도망쳤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아니라, 도망침으로써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이다.

 

어쩌면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가 말하고 싶은 것은 완벽하게 올바른 삶을 살라는 강요가 아니라, 세상이 씌운 잣대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소중한 가치를 지켜낼 용기를 주는 응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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