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가정의 공동 경영 책임자 [드라마/예능]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글 입력 2023.06.25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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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의

내용 및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직업도 애인도 없는 여자와 연애 경험이 전무한 독신 샐러리맨이
'고용 관계’라는 명목하에 계약 결혼을 하고, 가사 노동의 대가로 월급을 지급하는
비즈니스적인 관계 속에서 미묘한 감정으로 발전해가는 모습을 그린 드라마”

 

 

2016년 하반기, 일본에서 방영된 드라마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 逃げるは恥だが役に立つ(니게루와 하지다가 야쿠니타츠)’(이하 니게하지)는 연애 경험 전무의 30대 독신 회사원 남성 '츠자키 히라마사(호시노 겐 분)'와 회사에서 해고당한 20대의 무직 여성 '모리야마 미쿠리(아라가키 유이 분)' 간의 계약 결혼을 다룬다.


미쿠리와 히라마사뿐 아니라, 미쿠리의 이모이자 외국계 유명 화장품 기업의 부장으로 일하는 40대 후반 독신 여성 '츠치야 유리', 훤칠한 외모에서 비롯된 주변의 편견 탓에 진실한 사랑을 하지 못하는 남성 '카자미 료타', 그리고 동성애자 남성인 히라마사의 회사 동료 '누마타 요리츠나' 등 다양한 캐릭터의 삶과 사랑에 관한 고민들이 그려진다.


니게하지는 상호 필요에 의한 계약 결혼이라는 소재를 다루며 남성과 여성의 고정된 성 역할과 새로운 가족의 형태에 대해 논의한다. 결혼 제도와 부부 관계에 관한 사회적 화두를 던지며, 누구나 성별 또는 결혼 여부에 관계없이 각자에게 맞는 가정을 꾸려 나가고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삶과 사랑의 형태를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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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쿠리는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며 학업에만 성실히 몰두해왔던 인물이다. 이후 같은 전공으로 대학원을 졸업하고 전문 임상 심리사의 자격까지 취득했지만, 잇따른 취업 실패를 겪는다. 결국 20대 후반의 나이에 파견 사원으로 일하다가 정직원 전환에 실패하고 회사로부터 해고당하게 된다.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아등바등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정규직으로 취업이 되기는커녕 그 어떤 회사도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큰 자괴감을 느낀다.


부모님 집에서 무직 백수 상태로 지내던 미쿠리는, 아버지의 소개로 한 남자의 집에서 잠시 가사 대행 일을 하게 된다. 남자는 30년 넘는 일생 동안 혼자 살아온 자타공인 프로 독신남 히라마사. 히라마사는 교토대학교를 졸업하고 IT 회사에서 우수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며 모두에게 인정받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나 키가 매우 작고 훤칠하지 못한 외모 탓에 결혼은 차치하고, 연애 경험조차 없다. 여자들의 거듭된 거절 때문에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데 서투르고 자존감이 심각하게 낮다는 결점이 더 심해진 듯하다.


그렇게 성사된 일시적이고 우연한 만남은 고용 관계로 맺어진 계약 결혼이라는 뜻밖의 결과를 불러왔다. 미쿠리는 히라마사의 집에서 가사를 도맡아 하며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에 뿌듯함을 느꼈고, 히라마사 역시 꼼꼼하고 성실한 미쿠리의 성격 덕분에 일상의 만족도가 높아졌음을 실감했다.


미쿠리는 다시 취업 전선에 뛰어들기 전까지 돈이 필요했고 히라마사는 당분간 계속해서 가사를 해줄 사람을 원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각자의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 계약을 맺자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가족과 주변 이들에게는 사랑해서 결혼한 것으로 알리고, 히라마사의 집에서 함께 살며 생활하는 대신 급료가 발생하는 사실혼 형태의 고용 관계를 맺는다. 히라마사는 1달 동안 전업주부가 수행하는 가사 노동의 가치를 19.4만 엔(한화 약 200만 원)으로 산출하여 미쿠리에게 월급을 지불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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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단계까지는 수월했지만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하며 서로의 인간적인 모습을 알아가고 개인적인 고민까지 공유하다가,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되었을 때 갈등이 찾아온다. 히라마사가 미쿠리에게 실제로 청혼을 하면서, 고용 계약을 해지하고 진짜 결혼을 하겠다고 생각하게 된 이유로 내세운 것은 합리성이었다. 결혼을 하게 되면 미쿠리에게 지불하던 급여를 주지 않고, 두 사람이 함께 생활비 내지 저축에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도출된 결론이다.


이에 대해, 미쿠리는 ‘월급을 지불하지 않고 나를 가사 노동에 이용할 수 있으니까 결혼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좋아함의 착취’라고 말한다. 니게하지는 미쿠리의 입을 통해 전업주부의 노동에 대한 가치와, 사랑 그리고 결혼의 관계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두 인물이 가정 내 역할 분담에 대해 지속적으로 갈등하고 대화하며 의견을 맞춰가는 과정을 통해, 고정된 성 역할에 대한 편견을 깨고 사랑을 실천해 가는 새로운 방식을 비추고자 한다.


취업난으로부터 잠시 도망친 미쿠리 그리고 연애와 결혼에 대한 무언의 압박으로부터 도망친 히라마사. 두 사람이 도망쳐서 찾게 된 것은 삶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 중 하나인 ‘사랑’이었으니, 도망의 결과는 어쩌면 성공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이제부터가 시작이지만 말이다. 부부라는 관계를 넘어서서, 곁에 있는 사람과 오랫동안 소중한 순간을 함께하기 위해 서로를 존중하고 책임지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부부 이전에 서로를 사랑하는 한 개인과 개인이기에, 상대의 희생을 당연히 여기지 않고 사소한 문제라도 대화를 통해 마음을 맞춰가는 사랑의 실천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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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경제 포럼(WEF)이 매년 발표하는 젠더 격차 보고서(Global Gender Gap Report)를 살펴보면, 2022년 일본은 146개국 중 116위의 젠더 격차 지수를 기록했을 정도로 양성평등 문제가 심각한 국가다. 정치, 경제, 사회 측면에서 모두 남성과 여성의 성 역할 및 지위에 대한 깊은 편견이 자리하고 있으며, 가부장제적인 가족 형태와 사회 체계가 한국보다 더 당연하게 여겨지는 실정이다.

 

니게하지는 이러한 일본의 현실을 충실히 반영해, 사회가 기대하는 여성의 역할과 가사 분담 및 전업주부에 대한 편견을 향해 맞섰다. 가정의 ‘공동 경영 책임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서로의 역할을 양분하지 않고 가사 노동을 함께 분담하려는 미쿠리와 히라마사의 모습을 비추고, 주부의 가사 역시 다른 경제 활동들처럼 가정과 사회를 지탱하는 데 기여하는 노동으로서 존중받는 것이 마땅함을 전한다.

 

더불어, 취업난, 정리해고와 같은 고용 관련 문제를 비롯해 한부모가족, 독신, 성소수자 등 다양한 삶과 사랑을 이야기한다. 동성애자인 요리츠나, 홀로 아이를 키우는 미쿠리의 절친 등 작중 모든 인물이 당차고 자유롭게 살아가고자 한다. 두 남녀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는 것이 더 이상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 현시대에 발맞춰, 개개인마다 다른 라이프 스타일, 사랑과 가정의 형태를 비추며 모두의 삶에 대한 존중과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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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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