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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내 이름은 '레이디 버드'야 [영화]

by 박민경 에디터
2022.04.19 09:40

 

 

장르불문하고 성장서사를 좋아한다. 쉽게 사랑에 빠졌다가 그만큼 쉽게 오해하고 헤어지는 관계가 별로였던 어느 하이틴 로맨스 영화도, 개연성은 찾아볼 수 없었던 어느 말초신경자극용 공포 영화도.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고서 성숙하고 아름답게 성장한 인물이 등장한다면 그건 내가 좋아하는 영화 리스트에 올랐다. 특히 성장통이 지독하면 지독할수록 좋다. 모든 힘듦을 극복하고 진정한 성장을 이룩한 인물은 얼마나 아름다울지 기대하며, 나는 꽤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제 나는 성장이 영화 속 주인공처럼 특별한 인물만이 거둘 수 있는 훈장 같은 게 아니란 걸 안다. 사람은 누구나 성장한다. 물론 누군가는 그 과정에서 아주 특별하고 지독한 성장통을 겪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대개 많은 사람들은 해리포터처럼 악인으로부터 부모님을 잃거나 세계를 구하지 않아도 성장을 하기 마련이다. 그것도 아주 보편적인 성장을.

 

 


아주 보편의 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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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 거윅 감독의 영화 <레이디 버드>는 그런 보편의 성장을 설명하는 대표 격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레이디 버드>는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서 있는 고등학교 3학년 크리스틴의 이야기를 다룬다. 크리스틴은 부모님이 지어준 크리스틴 맥퍼슨이라는 이름 대신, 자기 자신이 지어준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퍼슨으로 불리길 원하는 인물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열여덟답게 엄마와는 눈만 마주치면 다툰다. 자신이 나고 자란 새크라멘토를 아주 따분하고 재미없는 곳으로 여기고 그 안에서도 부유하지 못한 자신의 동네를 ‘철로 변의 구린 쪽’이라고 이야기하고 다닌다. 그리고 늘 뉴욕처럼 ‘좀 있어 보이는’ 도시가 있는 동부로 떠나고 싶어 한다.

 

흔히 성장을 모티프로 하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자신의 상황, 지위, 신분, 정체성에서 벗어나 변화를 겪고 그에 따르는 시련을 극복하는 일정한 서사적 문법을 지닌다는 점을 떠올려보았을 때 크리스틴은 그야말로 새크라멘토 사람처럼 보이는 자신의 면면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에 비해 크리스틴이 겪는 시련은 시시하다.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 대신 ‘레이디 버드’라 소개하며 달라질 상황을 기대하지만, 주위 친구들이나 가끔 그렇게 불러줄 뿐 새로운 이름이 가져다주는 특별한 사건이랄 건 없다. 새크라멘토 사람처럼 보이지 않아서 좋아했던 두 명의 전 남자친구와는 각각의 이유로 헤어지고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그 헤어짐이 극복해야 할 만큼 아픈 것도 아니다. 레이디 버드가 겪는 시련은 대부분 어머니와의 관계로부터 비롯되는데 그 정도도 사실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이라면 응당 겪는 통과의례의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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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어”

“너무 핑크 아냐?”

“그냥 예쁘다고 해주면 안 돼?”

“내 말에 신경도 안 쓰잖아.”

“예쁘게 봐주면 좋잖아. 아니, 난 그냥... 엄마가 날 좋아해줬으면 좋겠어.”

“널 사랑하는 거 알잖아”

“근데 나를 좋아하냐고”

 

 

이렇듯 레이디 버드가 마주하는 고난과 시련은 드라마틱하지 않다. 아프지 않다는 게 아니다. 그녀가 그녀의 집과 상황, 그리고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엄마와 갈등을 빚는 건 우리가 모두 겪어본 이야기이기에, 그래서 우리는 크리스틴의 상처와 아묾을 이해한다는 거다. 아주 보편의 성장이다.

 

 

 

내 이름은 ‘레이디 버드’야



<레이디 버드>의 다른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바로 이 영화가 이름으로 엄마와 딸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은 영화의 시작부터 등장한다. 크리스틴은 운전하는 엄마의 옆자리에 앉아 사이좋게 같이 테이프를 듣다가도 엄마와 다툼을 벌이는 순간 ‘내 이름은 레이디 버드야’라고 소리친다. 엄마는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이름이냐’고 면박을 주지만 새크라멘토 사람처럼만은 안 보이길 원하는 그녀에게 이 이름은 의미 있다. 스스로에게 부여한 새로운 이름처럼 다른 도시에서 새로운 ‘나’로 새로운 삶을 시작해보고 싶다.


반면 그녀의 엄마는 새크라멘토 사람이다. ‘나 새크라멘토 사람처럼 보여?’ 묻는 딸에게 ‘너 새크라멘토 사람 맞잖아’라고 말하는 건 당연한 건데 왜 자꾸만 딸이 새크라멘토를 부정하며 다른 곳으로 가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렵다. 그래서 엄마에게 딸의 기행들은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만큼이나 터무니없는 것들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런 엄마도 딸에게 크리스틴 대신 ‘레이디 버드’라 불러주는 때가 있다. 추수감사절 날,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대신 남자친구의 집으로 놀러 간 딸을 찾아간 엄마는 처음으로 딸에게 ‘레이디 버드’라고 불러준다. 그곳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던 그 아이는 새크라멘토의 가난한 집에 사는 크리스틴이기보다 저택에 잘 어울리는 ‘레이디 버드’이길 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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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었다, 레이디 버드"

 

 

이후 뉴욕으로 대학을 간 레이디 버드는 그곳 친구들에게 자신을 크리스틴이란 이름으로 소개한다. 동부에까지 가서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고 얘기하지 않은 이유는 이제는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 부끄러웠음이리라. 그녀는 새크라멘토를 떠나기 전, 처음으로 혼자서 차를 몰고 새크라멘토를 다녀본다. 그리고 그곳에서 늘 엄마가 운전해주던 차로 돌아다닐 때엔 미처 몰랐던 사실들을 마주한다. 사실은 그녀가 새크라멘토를 깊숙이 사랑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새크라멘토 사람이라는 것을. 그래서 더 이상 그녀는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 소개할 수 없다.


크리스틴은 뉴욕에 가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곳은 생각만큼 재미있지도 특별하지도 않다. 언젠가는 뉴욕을 새크라멘토처럼 벗어나고 싶은 곳으로 여길지도 모른다. 계속해서 실망하고 또 다른 곳을 그리워하고 어쩌면 또다시 ‘레이디 버드’와 같은 새로운 이름을 지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결국에 성장은 자신이 가진 로망에 대해 실망을 거듭하는 과정이 아니겠는가. 크리스틴은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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