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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우아함이란 결과로써 발현되는 것이라 생각해 왔다. 성찰하는 태도,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 여유로운 마음이 모두 어우러져 숙성되면 그제야 느지막이 드러나는 속성. 진정한 어른에 대한 환상과 비슷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나에게 우아함을 찾는 건 어불성설이다. 나와 생각과 태도가 다른 이를 받아들이는 건 여전히 쉽지 않고,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여유‘와는 거리가 멀다. 아직까지는 불안한 시행착오 속에서 휘청이는 게 당연한 시기니까.


그런데, <우아한 사고를 위한 철학>은 그 제목부터 내 생각을 정면 반박한다. “우아하기 위한” 노력이 존재할 수 있을까? 우아함이 목적이 된다면 그 자체로 우아하지 않아 보이는데 말이지. 의문을 가득 안고 첫 장을 펼쳤다.

 

 

우아한 사고를 위한 철학 - 표지.jpg


 

 

진단: 내가 서 있는 위치를 알아가기


 

현상에 대한 진술과 진단은 다르다. 진술은 있는 그대로를 읊지만, 진단은 비교와 평가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철학자 호세 카를로스 루이스가 제시하는 정신적 빈곤의 개념은 현세대에 대한 진단이었다.

 

그는 책에서 우리를 ‘하이퍼모던’ 주체로 규명하며 시대를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앞으로 ‘하이퍼모던’ 주체라고 부를 개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외부 환경에 많이 노출되어 있지만, 방어 능력은 그만큼 더 약해졌다. (중략) 또한 이는 수치심의 메커니즘을 재구성하고, 우리가 받은 유산에서 ‘신중함’이라는 단어를 제거해 버렸다. 하이퍼모던 주체가 생각하는 존재는 ‘행함’에 그치지 않고, 주저 없이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따라서 신중함에서 나오는 우아함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1장. 정신적 빈곤 / p.17 여는 글

 

 

그 살아짐에 “왜?”라는 질문이 든다면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남들이 하는 행동을 나는 하고 싶지 않다는 뜻. 다만 그렇게 흐름을 거스르는 행위는 자신을 이질적인 존재로 몰아간다. 대상이 불분명한 불만만 쌓여갈 뿐이다.

 

그때 필요한 게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진단이다. 나의 위치를 명확하게 알게 되면, 신경을 거스르던 눈앞의 존재들이 왜 그곳에 있는지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니까.

 

시대를 규명할 때 몇 년째 이어지는 화두는 단연 소셜 미디어다. 세상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도 쉽게 연결해 준다는 미디어의 발전은 사람들의 행동 패턴마저도 바꿔놓았다. 온라인 환경에서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기에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는 데 급급해졌다. 그리고 그 흐름은 당연하게도 자본과 연결되면서 더 빨라졌다.

 

‘바이럴’되어 사람들 눈에 띄기만 하면 돈은 절로 모이니, 돈을 벌기가 어느 때보다 수월해진 셈이다. 이 덕분에 관계적으로 존재하고 싶다면 온라인에서 보이기를 선택해야 했던 초기의 조건이 이제는 ‘가만히 있으면 바보다’라는 다소 공격적인 명제로 바뀌어 버렸다.

 

이제 신중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바보가 된다. 틀린 말을 할까 한 글자 적는 것도 수십 번 생각하는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도 포함이다.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으로 정의 내려지면, 이유도 모른 채 불만과 답답함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 분노하게 된다.

 

물론 나는 당사자로서 다분히 개인적으로 경험한 바를 말하고 있는 거다. 그런 나에게 ‘하이퍼모던 시대는 모두가 수치심 대신 자기 노출을 추구해야 하는 시대, 신중함과 우아함이 뒷전이 되는 시대’라는 진단은 쓸데없는 조급함은 삭히고, 내가 추구하는 바를 명확히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증상: 해체된 타인, 해체된 나


 

하이퍼모던 주체에게 중요한 건 보여짐이다.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이러한 삶이 익숙해진 이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을 같은 방식으로 대한다. 원하는 요소가 보이면 취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시하는 사회.

 

 

디지털화, 인공지능, 그리고 빅데이터는 가상적인 것을 단순히 형태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실용적인 것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든다. 우리는 타자의 요소들 중 관심이 가는 일부만 표현하고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타자는 하나하나 해체되고, 그 전체성은 무시된다. 우리는 타자로부터 우리와 관련된 부분만 취사선택하고, 나머지는 모두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1장. 정신적 빈곤 / p.37 타자의 간헐성과 가상성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불문하고 이런 상황을 쉽게 마주한다. 여론이라는 게 대표적으로 그렇다. 어떤 사람의 좋은 점이 보일 때는 모두가 환호하다가, 지적할 일이 생기면 사람을 매도하려고 달려든다. 현실에서도 이런 경우를 왕왕 만난다. 자신이 필요할 때만 누군가를 찾는 이들, 그리고 그런 게 당연해지는 세대가 분명 존재하는 것 같다.

 

나는 모든 관계가 감정을 토대로 쌓아 올리는 거라 믿는다. 여기서 말하는 감정은 상대방이 좋든 싫든, 온전히 그 사람을 인지하고 성격과 특징을 파악해 얻게 되는 인상과 감상을 말한다. 그래서인지 필요에 따라 취사선택 당했다는 감각은 어쩐지 배신감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오로지 필요에 따라 연결되며 관계의 비효율을 모조리 걷어내고 나면, 우리 곁에는 무엇이 남을까? 선택한 사람만 곁에 두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거침 없이 잘라낸 이 뭉툭한 사회가 미래에는 어떤 모습일지 여전히 걱정스럽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 중심적인 판단을 통해 남들을 분류하면서도, 자신의 가치는 타인에게 전가하는 역설적인 상황도 관측된다고 한다. 보여짐에 너무 익숙해진 탓이다. 남들을 손쉽게 해체하면서도, 결국 자신은 남들이 해체하고 선택한 모습을 기워 완성해야만 한다니, 어쩐지 씁쓸하다.

 

 

우아함은 타인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지만, 반대로 하이퍼컬처에서는 자신이 하는 모든 것을 증명해야 한다. 오늘날 주체는 자율적으로 확고한 평가를 내리지 못한다. 따라서 그 가치는 타율적으로, 항상 외부에서 부여된다. 주체는 겁이 많아서 스스로를 평가하지 못한다.

 

2장. 우아하게 살기 / p.75 불안

 

 

 

처방: 스스로 정한 범주 밖으로 한 걸음


 

지금까지의 감상을 읽어보면, 은은하게 나 자신도 구분 짓기를 하고 있었다는 게 티가 난다. 남들은 모두 속도를 좇지만, 나는 본성적으로 우아함을 추구하는 사람. 문장으로 명시하니 더욱 낯부끄러워지는 인식이다. 다행히도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런 구별 짓기 자체가 하이퍼모던 주체의 한계임을 지적한다.

 

 

하이퍼모던 주체가 개념을 자신의 경험과 동일시하고, 다양성과 타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결말이다. 이런 태도는 대화를 어렵게 하고, 극단주의를 더욱 강화한다. 예를 들어,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이 오직 내 개인적 경험에만 근거한다면, 같은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은 틀렸거나 이해 불가능한 존재, 혹은 무능한 존재로 간주되어 결국 배척된다. 그 결과 소통의 가능성이 크게 제한된다.

 

3장. 범주의 후성유전학 / p.113 축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책에서는 하이퍼모던 주체들이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 사람을 ‘추방’하는 결말에 닿는다고 말한다.

 

병리적인 현상을 기술하고 있으니 간단하게 그의 반대를 추구하면 된다. 쉽게 누군가를 추방하지 말 것, 나의 경험만큼이나 타인의 경험이 독창적이고 중요하게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할 것. 생각보다 간단하다. 물론 안다는 것과 실천은 다른 문제지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범주를 자기중심적으로 재구성하면서도 상대방도 자신이 이해하는 관계 방식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관계는 어려워진다. 그리고 결국 자신의 세계관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자기 원 밖으로 추방할 것이다.

 

3장. 범주의 후성유전학 / p.115 범주의 후성유전

 

 

***

 

우아함이란 탐구의 과정에 있다. 아직 책의 절반밖에 읽지 못했지만, 지금껏 읽은 내용을 바탕으로 우아함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이다.

 

진부할 만큼 많이 쓰이는 백조의 비유처럼, 우아함이란 몸에 밴 습관이 드러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수면 아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분절된 사회에서 자신의 범주를 넘어서려는 행동, 즉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도 중심에 두려는 행위는 자기중심적인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하이퍼모던이라는 개념은 인간의 본성이 바뀌었다는 게 아니라, 그 본성에서 벗어나기가 더 어려워진 환경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그러니 우아함을 위한 노력은 지금 이 시대에 더욱 의식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처음 던진 질문에 대한 답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아하기 위한 노력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렇다. 그걸 위해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우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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