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더비 경매장에서 낙찰 직후 작품을 파쇄기로 갈아버리며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주인공, 그리고 1990년대 영국 브리스틀의 어두운 골목길에서 얼굴을 가린 채 벽화를 그리며 이름을 알린 '아트 테러리스트' 뱅크시(Banksy).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지만 여전히 본명과 얼굴은 베일에 싸여 있는 이 익명 작가의 세계관을 제대로 만나볼 수 있는 《뱅크시 특별전: Still Here》가 여의도 더현대 서울 6층 ALT.1에서 열려 다녀와봤다. 이번 전시는 '그가 누구인가(Who)'라는 익명의 베일을 파헤치기보다, 마스크 뒤에서 그가 세상에 던지고 싶었던 깊은 메시지와 세계관에 온전히 몰입해 볼 수 있었던 만큼 그 생생한 관람 후기를 담아본다.
거대한 무기가 된 '벽', 그 위에 그려진 '쥐'

전시의 시작(Intro)은 뱅크시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쥐(Rat)’ 캐릭터들과 함께한다. 특히 이곳은 실제 영국의 거리를 걷는 듯 거친 질감의 벽면 연출이 돋보였다. ‘벽은 아주 거대한 무기’라며 권력과 통제, 차별의 단면을 드러내는 도구로 벽을 활용해 온 뱅크시인 만큼, 실제 그가 작업을 펼치던 현장에 와있는 듯한 생생한 간접 체험을 제공한다.
이러한 ‘Wall’ 섹션을 지나며 마주한 여러 작품 중 개인적으로 가장 시선이 오랫동안 머물렀던 것은 <러브 랫(Love Rat)>이었다. 이 작품은 하트 모양의 붉은 물감을 벽에 칠하고 그 아래 붓을 든 쥐를 배치한 작품이다. 세간에서 칭송받는 존재인 ‘사랑’과 더럽고 천대받는 존재인 ‘쥐’라는 대립적인 요소의 결합을 통해, 낭만과 냉소, 희망과 상처가 공존하는 인간의 복합적인 감정선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이어지는 팔레스타인 분쟁 지역의 작업 영상 역시 인상 깊다.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 위에 그려진, 손에 풍선 더미를 쥐고 장벽 너머 하늘로 날아올라가는 어린 소녀의 모습은 분쟁의 비극과 대비되는 자유와 평화의 열망을 서정적이면서도 강력하게 전달하며 가슴 한구석을 묵직하게 만든다.
세상을 비틀어버리는 '뱅크시'표 블랙코미디

이어지는 ‘Laugh Now’ 섹션에서는 시대를 견디게 하는 뱅크시 특유의 날카로운 블랙코미디와 위트가 빛을 발한다. 뱅크시는 냉소적인 유머를 통해 대중이 스스로 사회적 문제와 부조리를 돌아보게 만드는데, 관람 내내 픽 웃음이 터지면서도 씁쓸한 입맛을 다시게 된다.
특히 자본주의와 소비주의의 맹점을 조롱한 <쇼핑백을 든 그리스도> 앞에서는 아마 모두가 뜨끔해질 듯하다. 십자가에 못 박히듯 양손에 쇼핑백을 가득 들고 있는 예수의 모습은, 구원과 숭고함의 상징이어야 할 성탄절마저 물질적 소비로 오염되어 버린 현대사회의 세속적 단면을 뼈아프게 꼬집는다.
유쾌한 패러디와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들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영화 <펄프픽션>의 명장면 속 배우들이 쥐고 있는 총을 뜬금없이 '바나나'로 바꿔 치기한 작품은, 매체 속 무분별한 폭력성을 순식간에 희화화하며 무력화시키는 뱅크시만의 천재적인 위트를 보여준다.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뒤흔드는 그의 신선한 관점 앞에서는 감탄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소더비 파쇄 사건부터 평화를 향한 메시지까지

‘Icon’ 섹션으로 들어서면 뱅크시를 전 세계적인 사회적 현상으로 만든 명작들이 반겨준다. 2018년 소더비 경매장에서 낙찰되는 순간 프레임 안의 파쇄기를 작동시켜 작품을 갈아버린 퍼포먼스로 유명한 <풍선과 소녀>. 그리고 2005년 대영박물관에 몰래 걸어두고 사흘 동안 아무도 몰랐다는 장난스런 <페컴 록> 작품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과연 "무엇이 예술이고, 그 가치는 누가 결정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미술계의 권위를 비웃는 그의 배짱에 절로 웃음이 나온다.
전시의 마지막 ‘Peace’ 섹션은 작가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코로나19 시국 속 진정한 영웅은 배트맨이 아니라 의료진임을 보여준 <게임 체인저>, 그리고 폭탄 대신 선물을 실어 나르는 헬리콥터와 푸틴을 제압하는 소년의 그림까지. 예술이 세상을 한 번에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여 폭력과 차별을 줄여갈 수 있다는 뱅크시의 희망이 가슴 깊이 와닿는다.
여전히 우리 곁에(Still Here), 뱅크시가 남긴 것

가면 뒤로 자신을 완벽히 숨겼지만, 그가 세상에 던진 날카롭고 따뜻한 목소리만큼은 울림으로 남아 여전히 계속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뱅크시 특별전: Still Here》. 전시장 문을 나서는 순간, 늘 무심하게 지나치던 길거리의 흔한 벽조차 이전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팍팍한 일상 속에서 재치 있는 위트와 함께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를 느껴보고 싶다면 한 번쯤 방문해 보길 권한다. 이번 전시는 여의도 더현대 서울 ALT.1에서 오는 2026년 11월 3일까지 이어지니, 계절이 바뀌기 전 뱅크시가 남긴 평화의 울림을 직접 마주해 보는 것은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