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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세상에 없는 책을 읽는 것 - 뮤지컬 '판' [공연]

전기수가 알려주는 우리가 읽어야 할 이야기

by 박선주 에디터
2026.03.07 15:12

 

 

우리는 이야기 없이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어디에나 이야기가 있었다. 소설과 드라마 같은 허구의 이야기, 누군가와 나누는 대화, 더 넓게 보면 SNS에 올라오는 글까지도 모두 이야기다.

 

물론, 우리 삶도 이야기다.

 

어렸을 때는 허구의 이야기가 좋아서 틈만 나면 소설 또는 드라마에 빠져 살곤 했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자연스레 허구의 이야기에서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로 관심이 옮겨 갔다. 소설책보다는 에세이에, 드라마보다는 SNS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었다. 나는 이러한 변화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안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만 들으며 사는 것 같았으니까.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의 삶을 궁금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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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음에 만날 사람들이 내게 한 권의 책이 되어 주겠지.”

 

 

뮤지컬 ‘판’을 처음 알게 된 건 한 짤막한 공연 영상이었다. 줄거리도 모르고 앞뒤 맥락도 모르지만, 그 넘버의 가사 한 구절이 당시 내 가슴을 울렸다. 위와 같은 고민을 하기 오래전이었음에도 그 가사 한 줄 때문에 언젠가 꼭 이 공연을 보고 싶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온 지 2년이 조금 안 되었을 때, 시기에 알맞게 이 극이 올라왔다. 대망의 관극 날, 첫 넘버에서 이야기꾼의 부채가 펼쳐지자마자 이 극이 내게 답을 줄 것임을 확신했다.

 

 

 

우리가 바라는 꿈 담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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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극의 주제는 단연코 ‘이야기’다. 극 안에서 이야기는 소설로, 사회 비판으로, 그 외 여러 가지 형태로 등장하여 극 전체를 관통한다. 주인공의 직업 또한 ‘전기수’로, 사람들에게 이야기(소설)를 들려주는 이야기꾼이다. 극 중 인물 ‘춘섬’이 운영하는 이야기를 파는 방, 즉 ‘매설방’에서 전기수와 사람들은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들려주었고, 세책가에 대한 감시가 심해지는 와중에도 이곳 사람들은 눈치 보지 않고 이야기에 울고 웃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이야기에 열광했을까? 언제 어디서나 어떤 이야기든 접할 수 있는 지금과 달리, 극 중 시대인 조선 후기에는 소설이 사람들을 현혹한다며 검열하기 일쑤였고, 백성이 글로써 마음껏 꿈을 펼치기 힘든 시기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소설(극 중에서는 주로 저잣거리의 소설인 ‘패관소설’을 얘기한다)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고, 공감과 위로를 얻기도 하였다.

 

‘강제로 우리를 막아도 맘까지 막을 순 없지’라는 노랫말처럼, 인물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지켜나갔다. 필사를 통해, 매설방을 통해, 그리고 낭독을 통해. 걸리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전국을 매설방 삼아 이야기를 듣고 들려줄 수 있는 그날까지 그들은 이야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들에게 이야기는 살아갈 힘이자, 살아감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힘을 믿는 마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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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된 한 명의 전기수가 있었으니, 바로 '달수'이다. 그는 양반가의 자제로, 우연히 마주한 한 여인(이덕)에게 반해 따라 나섰다가 매설방의 존재를 알게 된다. 매설방에서 이야기를 들려주며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는 희대의 전기수 '호태'의 낭독 기술에 빠져든 그는 금지된 이야기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호태를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소설, 풍자담, 그리고 다양한 사람들의 사연을 접하게 된다. 동시에 사람들이 겪는 부조리를 깨닫고 점차 각성하기도 한다.


 

"그 이야길 따라

내 삶도 언제부턴가

슬픔을 잊고 웃음을 읽었지"

 

 

검열로 인해 매설방의 불이 꺼지고 이야기가 사라졌을 때, 달수와 사람들은 그 시절 이야기가 가져다주던 웃음을 생각하며 구슬피 노래한다. 부조리한 현실로 인해 사라진 그 온기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달수의 모습은 이어지는 장면들에서 그가 한층 성장한 전기수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달수가 진정한 이야기꾼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이 극의 핵심이자, 이 글의 핵심이다. 동시에 나를 포함한 관객들에게 많은 생각을 남긴다. 진정한 이야기꾼으로 거듭나는 달수에게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소중히 여기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다. 양반가의 자제지만 과거 시험보다 세상사에 더 관심이 많았고, 매설방과 저잣거리에서 마주한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소리를 외면하지 않았다. ‘줄 위에 설 때면’이라는 넘버에서 덕이가 쓴 소설을 기꺼이 이야기 판으로 펼쳐 보이는 장면에서도 달수의 이러한 마음씨를 볼 수 있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의 눈빛은, 그 이야기 속에 숨은 마음까지 읽어냈음을 보여주는 듯 했다. 덕이의 꿈이 담긴 그 소설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노래하는 달수와 이를 지켜보는 덕이의 표정은 오래도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달수 뿐만 아니라 덕이 또한 소설은 세상이 변해가는 증거라며 그 변화를 소설로 남기고자 하였고, 춘섬은 조선 곳곳을 매설방 삼아 이야기가 울려 퍼지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였다. 이곳 매설방은 이야기의 힘을 믿는 사람들이 모여, 세상을 살아가게 할 더욱 단단한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곳이었다. 그 이야기가 오래오래 울려 퍼지길 바라면서.

 


 

그리고, 세상에 없는 책


 

매설방을 통해 여러 일을 겪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 달수는 극의 마지막에 이렇게 노래한다.

 

 

“세상에 펼쳐진 여러 이야기

인생의 사연 속에 다양한 이야기 숨어 있어

앞으로 내가 읽을 책은 바로 세상엔 없는 책.

이 다음에 만날 사람들이

내게 한 권의 책이 되어 주겠지

살아가며 만나게 될 사람들이 내게 또 한 권의 책이 되겠지.”

 

 

‘세상엔 없는 책’ 이라는 말, 내가 이 극에서 듣고 싶었던 답은 이게 아니었을까. 이야기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을 겪었음에도, 달수는 자신이 귀 기울여야 하는 이야기가 결국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라는 것을 노래한다. 이 장면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이 공연으로 이끌었던 그 구절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여기서 책은 사람들과 만나며 만들어질 세상에 하나 뿐인 나만의 책(이야기)이 될 수도 있고, 사람들의 이야기 그 자체를 의미할 수도 있었다. 전자든 후자든 결국 모든 사람들의 삶이 한 권의 책이라고 말하는 사실은 변함없다.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살아가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평생 동안 읽고, 만들어질 그 책. 이 책과 함께라면 내가 살면서 하지 못할 이야기가 있을까. 마치 나를 위한 구절인 듯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들으며, 이 구절을 평생 기억하고 살겠다고 다짐했다.

 

판은 내게 말한다. 이야기는 결국 삶 자체였음을. 그렇기에 삶을 가진 존재인 한, 또 다른 삶에 귀 기울이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사람들의 이야기 또한 내 삶의 일부이기에, 내 이야기만큼이나 소중하다. 그리고 언젠가 그들은 내 이야기를 더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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