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역사를 바로잡아, 우린 SIX! - '식스(SIX) 더 뮤지컬' [공연]

맞이하라, 우리의 여왕들을
글 입력 2023.04.24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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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극 전용 메모장이 따로 있다.

 

관극을 일상에 들인 후 쓴 첫 메모는 “그냥 대존엄 갓극.. 다들 보세요”로, 원시적인 감상을 토해내는 공간이다. 공연을 보는 내내 샘솟는 해석과 기억하고 싶은 대사들을 기록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동안은 공연장을 나선 후 차분하게 서서 휘몰아치는 단어와 대사, 생각들을 허겁지겁 받아쓰는 게 루틴이었다.

 

그러나 <식스 더 뮤지컬>을 본 뒤의 메모장은 텅 비어 있다. 신나게 내적 리듬을 타며 환호를 지르고 박수를 치다보니 공연은 끝나버렸고, 필자는 팽개쳐진 채로 그 기류에 감겨 허우적대고 있다. 그래서 처음으로 살아있는 감각만으로 공연을 전한다. 기록 없이 오롯한 감정만으로 충분히 간직할 수 있고 만끽할 수 있는 극이다.

 

그러니 튜더 왕가의 여섯 왕비가 21세기 팝의 여왕으로 재탄생해 펼치는 콘서트를 즐기고 싶은 사람들은 맞이하라, 우리의 여왕들을.

 


*

극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HISTOREM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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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튜더 왕가의 국왕 헨리 8세는 여섯 명의 아내를 뒀다.” 여기서 주어는 ‘헨리 8세’, 주요 정보는 헨리 8세가 아내를 굉장히 많이 맞이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장을 보고 그의 여성 편력에 놀란다. 왕비들은 ‘여섯’이라는 수치로 뭉뚱그려질 뿐이다.

 

<식스 더 뮤지컬>은 주어를 바꾼다. 그의 ‘아내들’ 한 명 한 명에게 숨을 불어넣어 역사 속 숨겨진 이야기를 되살린다. 헨리에게만 쥐어졌던 마이크를 여왕들(ex-wives)에게 넘기고, 그의 펜으로만 쓰인 역사를 뒤집는다. HISTOREMIX다.

 

팝 가수로 살아난 여왕들은 콘서트에서 모여 불행 배틀을 시작한다. 누가누가 더 헨리와의 결혼에서 불행했나를 겨뤄, 가장 힘들었던 사람을 리더로 정하기 위해서다. 관객들은 이들의 불행 배틀 심판을 봐준다.

 

 

 

이혼, 참수, 죽음, 이혼, 참수,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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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후보는 ‘아라곤’이다. 헨리와 가장 긴 결혼생활을 한 ‘조강지처’로,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을 요구받는다. 3남 3녀를 낳았으나 메리 공주 외의 자식들을 모두 잃은 그의 슬픔은 안중에도 없다. 헨리는 그를 수녀원으로 쫓아내려 하지만, 아라곤은 영국의 유일한 왕비라는 자부심으로 굳세게 버틴다.

 

‘NO WAY’ - “넌 날 밀어내려 해, 어림없는 소리 baby N-n-n-n-n-n-no way”

 

첫 후보부터 유력하다. 당돌하게 등장하는 두 번째 후보는 ‘앤 불린’. 그와 결혼하기 위해 헨리는 영국 국교회인 성공회를 세웠다. 그러나 앤 또한 아들을 낳지 못했고, 헨리는 끊임없는 외도를 한다. 결국 그는 간통 등의 누명을 쓰고 참수당했지만, 극 속의 불린은 유쾌하게 맞받아친다.

 

‘DON’T LOSE UR HEAD’ – “안 미안해서 참 미안해 즐기려던 것뿐야”

 

‘정신머리 챙기라’는 불린에 이어, 세 번째 후보는 ‘제인 시모어’이다. 사실 그녀는 헨리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아내로 알려졌고 그가 고대했던 아들도 낳았다. 그가 불행 배틀에 나온 이유는 단 하나, 아들을 낳자마자 죽었기 때문이다. 시모어는 남편을 향한 굳건한 사랑을 절절하게 노래한다.

 

‘HEART OF STONE’ - 어떤 고난도 어떤 역경도 상관없어 난 그 자리에

 

네 번째 후보는 ‘클레페’다. 헨리는 클레페의 초상화만 보고 그와 결혼했으나, 실물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혼한다. 대신, 이혼의 대가로 리치몬드 성을 포함한 궁전들과 막대한 연금을 받아 풍요롭게 산다. 불행할 이유가 있겠는가? 클레페는 자신이 얼마나 즐겁게 살았는지 자랑하며 불행 배틀에서 빠진다.

 

‘GET DOWN’ – “나는 이 성의 여왕, 엎드려 절하여라”

 

한 명은 제쳤다. 다섯 번째 후보, ‘하워드’는 10대 소녀다. 순수하다고 믿은 그의 과거에 충격받은 헨리는 하워드를 참수형에 처한다. 그러나 하워드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몸만을 원하던 남자들에게 데이고, 데이고, 데인 소녀였다. 모든 여왕들 중 가장 덜 알려진 만큼, 그의 노래는 일생을 가장 많이 담아내며 존재를 드러낸다.

 

‘ALL YOU WANNA DO’ – “오 네가 원한 건 네가 원한 건 baby touch me love me 만족을 몰라”

 

마지막 후보, ‘파’. 유일하게 생존한 여왕이다. 잉글랜드 왕비 중 처음으로 책을 쓴 여왕이기도 하다. 헨리와의 결혼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한 그는 헨리의 사랑이 필요 없다며 노래한다.

 

‘I DON’T NEED YOUR LOVE’ – “필요 없어 너의 사랑”

 

파는 한창 진행되고 있던 불행 배틀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렇게 서로의 불행을 비교해서 무엇이 남냐며, 우리의 콘서트인데 왜 우리 이야기를 하지 않냐며 말이다. 헨리로 묶인 여성들은 ‘헨리’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인가? 그를 빼놓고는 이야기를 할 수 없는가? 헨리에게 묶였던 사슬을 풀어 서로의 연결고리로 쥐면 된다.

 

 

 

우린 헨리 없이 잘 살아 - THE MegaSIX


 

“마이크와 펜을 손에 들고 역사를 바로잡아, 바로 오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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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승자의 편이라고 하던가.

 

헨리의 입맛대로 그려지고 누명 씌워진 여왕들은 역사를 뒤집기 위해 마이크를 쥐고 각자의 노래를 한다. 헨리의 터무니 없는 명령에 맞서고 그의 사랑을 거절하며 ‘나’를 노래하겠다는, 내 목소리를 찾겠다는 그들의 외침은 관객들에게 큰 희망과 에너지를 선사한다.

 

우리는 우리의 얼굴로, 우리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는가? 타인의 비틀린 시선을 바로잡을 수 있는가? 나는 타인에게 왜곡된 가사를 들이밀고 있지는 않은가?

 

<식스 더 뮤지컬>에서 여왕들의 굳센 외침을 듣고, 함께 일어나 즐기다 보면 어느새 그들의 에너지가 스며든다. 발언권을 가져와 그대를 외칠 용기도 솟을 것이다.

 

 

[정은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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