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로봇과 인간의 경계가 있는가 [문화 전반]

글 입력 2024.02.27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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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자유의지가 있다면, 그리고 로봇이 인류의 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인간과 로봇의 경계는 어디인가를 물을 수 있겠다. 『종의 기원담』은 그 물음을, 인간이 사라지고 로봇들만 있는 세계로 풀어내려 한 것일까. 인간과 로봇의 공존 이전에, 로봇이 인간을 창조하기부터 시작하는 이야기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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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담』을 읽으면서 떠오른 작품은 애니메이션 <플루토(PLUTO)>였다. <플루토>에는 로봇 중에서도 뛰어난 인공지능을 탑재한 7대 로봇이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중심인물인 ‘게지히트’는 인간 외형의 경찰 로봇이다. 그는 꿈꿀 수 있는 로봇이며 인간과 교감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제39차 중앙아시아 분쟁’에 참전했던 로봇으로 로봇의 원칙에 따라 인간을 죽일 수 없으나 동족인 로봇을 죽여야만 했다. 그와 함께 참전한 로봇들 대부분은 전쟁으로 인한 PTSD를 앓고 있다. 그들은 인간을 위해 같은 로봇을 죽이면서도 오히려 전쟁의 의미가 있는지 고뇌할 수 있었고 그 회의를 통해 스스로 ‘진화’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7대 로봇들 사이에서도 특히 게지히트는 증오를 느낄 수 있는 존재이다. 로봇의 원칙을 무시하고 증오 때문에 인간을 죽였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애니메이션에서 ‘살인한 로봇’은 결함이 있어서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닌, 인공지능이 ‘완벽했기’ 때문에 살인이 가능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아톰조차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 아톰은 게지히트의 기억을 읽으며 증오와 용서를 배운다.

 

로봇이 겪을 수 없었던 감정인 증오와, 그 이후 용서까지 느낀 게지히트나, 눈물을 흘리는 그의 아내와 아톰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로봇처럼 보인다. 기존의, 인간과 로봇의 경계인 ‘마음’이 허물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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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루토>가 로봇과 인간의 경계를 알 수 없고 오히려 인간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로봇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다면(다만 <플루토>에서는 ‘인공지능’의 7대 로봇이 아톰을 제외하고는 모두 플루토에게 죽어버려 이후의 인간과 인공지능 로봇의 공존 방식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종의 기원담』은 그 이후의 먼 미래인, 우리의 상식 자체가 완전히 통하지 않은, 인간이 지워져 버린 세계에서 인간을 묻고 있다. 소설 속 로봇은 현재의 인간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우리 로봇에게는 외로움을 느끼는 본능이 있어. 그건 집단을 이루면 더 효율적으로 살 수 있어서야. 공포는 위험으로부터 몸을 지키기 위해, 고통은 몸의 파손을 막기 위해 필요하지. 학습 능력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망각은 정보의 인출 속도와 처리 효율성을 위해서 필요해. 생물의 모든 본능이, 그 생물이 더 잘 살아남기 위해서, 더 효율적으로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보면 말이지. ‘창조신앙‘ 은 거기서 무슨 역할을 하는 거지?˝ (p. 14)

 

 

소설에서는 인간과 마찬가지로, 로봇들만의 상식이 존재한다. <플루토>에서 로봇이 “인간은 잊히지 않기 위해 동상을 세우지만, 우리(로봇)는 선명하게 기억한다.”고 말했던 것과 달리, 『종의 기원담』의 로봇들은 모든 것을 메모리로 ‘기억’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생존과 효율을 위해 정보를 잊을 수 있는 존재다. 오히려 ‘완벽’해져 버렸기 때문에 망각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보다 성능이 ‘열등한’ 인간을 보고 숭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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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이 만들어낸 인간은 “단 하나의 성스러움, 신의 손길이자 음성, 절대자의 예술품”과 같은 찬사로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케이는 자신이 처음 고안해 낸 이론을 토대로 만들 수 있었던 절대적인 존재를 직접 죽인다. 특히 이 부분에서 게지히트가 인간을 죽인 장면이 떠올랐는데, 자식과 같은 어린 로봇을 죽인 인간을 보고 증오를 처음 느낀 게지하트와 숭배의 대상이 된 인간을 거부하고 그 공간을 벗어나려 했던 케이가 상식 밖의 반응을 보인 존재가 되면서 겹쳐 보였다.

 

이후 제 3편은 “결국 두 종류의 관점뿐이다. 인본주의자의 관점, 비인본주의자의 관점. 두 관점은 평행선을 그리며 서로 만나지 않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는 제 1편과 제 2편 사이의 감상처럼 읽히기도 했다.

 

제 1편은 인간과 로봇이 전복된 세상이 끝나버렸다는(로봇 사이에도 차별 대상이 존재하는 것, 고등 교육기관 내 전공 별 인식 차이, 종교와 과학, 기후 위기 등과 같은 서술) 인상이 강했다면 제 2편에서는 오히려 그 인간을 죽이면서 다른 방향으로 쓰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 3편에서 인간이 “완전무결하지 않으며” 로봇이 “사랑하는 대상”이라 말한다. 제 1편에서는 인간을 만들어 낼 가능성을 보여주고, 제 2편에서는 죽여 버린 ‘인간’이 제 3편에서는 ‘상생’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세 편이 각자 다른 소설로 읽히고 싶다는 작가의 말과는 달리, 사실 인물이 같고 한 권에 수록되어있기 때문에 이 소설을 구별해서 읽기란 쉽지 않았다. 오히려 오랜 시간을 두고 3편에 걸쳐서 연작소설을 낼 만큼 이 이야기를 놓을 수 없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쓰면서는 다른 의미로 난관이었다. 전작에서 독자는 자연스레 로봇에게 이입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점에서 과연 ‘인간‘일 독자가 어느 진영에 이입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진영을 바꿔 이입하면 모든 이야기는 뒤집힌다. 한창 로봇에 이입하며 쓰다가 갑자기 모든 것이 위선적으로 느껴지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부디 이야기를 자신에게 익숙한 세상에 맞추기 위해, 모든 것을 은유로 보며 눈에 보이는 단어를 다른 단어로 치환하려 애쓰지는 말기 바란다. 단어는 눈에 보이는 단어 그대로의 뜻이다. 이것은 결국 로봇의 이야기다. 무기생명에 대한 내 개인적인 헌사며, 곧이곧대로 기계생명을 향한 찬가다. 사물에 깃든 생명에 바치는 경애다. (p. 311)

 

 

결국 제 3편을 완성하면서 3부작으로 소설을 끝낸 김보영은 자기만의 “상생의 길”을 찾으려 했다. 1편에서는 인간과 로봇의 세계가 전복된 세계만을 보여주었지만, 마침내 3부작에 이르러 인물을 끝까지 써냈다고 생각한다. 로봇이 만들어낸 생물을 ‘인간’으로 명명하면서 독서가 두 갈래로 갈리고 ‘위선적으로’ 읽힐 위험이 있다고 한들 결국 인물은 “마지막까지” 살고자 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승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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