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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무뎌짐을 경계 [사람]

냉소 뒤에 남는 건 미약해진 감각 뿐

by 정영인 에디터
2026.08.19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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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가 빨간 꽃의 화단과 잘 어울리는 빨간 땡땡이 모자를 보았다. 무심코 사진을 찍다가 "이런 작은 우연에 카메라를 든 게 얼마 만이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자니 곤란한 요즘이다. 썼던 소재를 오래전 말라비틀어진 막대사탕을 붙든 아이처럼 계속 핥는다. 아이와 다른 점이 있다면, 난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는다. “애정으로 글을 쓴다”는 나름의 좌우명이 부끄러워지는 건 사랑을 느끼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이곳에 글을 쓴지 벌써 반년이 지나버렸다.


얼마 전 나는 또 한 번의 연극을 올렸다. 서른 명이 머리를 맞대고 하나의 무대를 위해 고군분투했다. 서로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여과 없이 흘러나와 짧은 칼날이 된 말들도, 볼품없이 상하고 찢기는 감정들도 그 소극장 안에 있었다.

 

‘이해해주지 못할’ 행위를 하는 이들, 일처리를 ‘답답하게’ 하는 이들은 언제나 뒤틀린 영역에 존재했다. 앞에서 하지 못할 말을 뒤에서 하느라 서로 얼굴을 바라보지 않았다. 일정 부분은 오해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고, 용서하지 않는 쪽으로 걷는 데 익숙해졌다. 작품에 쓸 시간은 있어도, 사람에 쏟을 시간이 그때는 없었다. 저주도, 애정도 긁어 새긴 낙서처럼 남아있다.


학생이라는 견고한 신분을 잃기 전까지 몇 달만이 남았다. 이제 나 자신을 명료하게 설명하기보단 변명해야 한다. 무언가를 준비하고, 또 무언가 되어야 한다. 난 내게 요구한다. 굴러가야 하고, 굴러가는 방향이 헛되지 않고 빈틈없어야 한다. 언젠가부터 알았던 것 같다. 난 매번 굴러감보다 굴러가고자 하는 마음이 더 바쁠 것이라는 걸.

 

문학에서 칭송하는 능소화에 발걸음을 멈출 겨를도, 매미 우는 소리에 짜증 낼 겨를도 없다. 매미 소리보다 머릿속이 더 시끄럽고, 꽃의 모양을 이해하기엔 비뚤어진 눈을 가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내가 가장 원하는 건 템플 스테이며, 홀로 가는 여행이며 현대인이 떠올리는 온갖 #낭만 #힐링 #현실도피다.


그러다 뜬금없이 교정 유지장치가 끊겨 튀어나왔다. 입천장을 찌르는데, 무시하고 그냥 뒀다. 치과에 갈 시간은 있었지만 그걸 어떤 ‘일’로 만드는 게 피곤했다. 몇 주 뒤엔 원리대로 구르지 못하는 바퀴처럼 치아가 조금씩 아려왔다. 자전거가 구르는 대로 펄럭이는 체인같이 이리 꺾였다가 저리 꺾였다. 꾸준히 신경 쓰이다가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더 이상 아프지 않았고, 신경 쓰지 않았다. 살아가며 느끼는 감각 중 통증에 유독 쉽게 익숙해진다는 건 슬픈 일이다. 상처가 짙어지고 그 형태를 분명히 하는 동안 우리는 담담해지고 무뎌진다. 남과 나를 매질하는 데 익숙해졌을 때쯤 업보로 남는 건 미약해진 감각이다.


조금은 탈락한 감각을 붙잡고 일단 글을 쓴다. 일단 쓰며 새롭게 느껴보고 이해해 보려 한다. 그러다 보면 그날 본 것 중 가장 사사로운 것에 대해, 사람에 대해 들떠서 쓸 수 있지 않을까. 글을 쓰다 보면 결국은 반성하고 만다. 내 안의 경화된 혐오를 마주하고, 마침내 무너뜨릴 수 있다.

 

글을 쓴다. 다시 느끼기 위해서. 무엇에도 냉소하며 지나치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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