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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존재와 연결의 상실 - 퀴어 [영화]

우주에서 보내는 신호

by 정영인 에디터
2025.07.08 13:28

 

 

사랑의 계절감을 담아내는 루카 구아다니노의 신작, <퀴어>의 아름다운 포스터와 잔잔한 예고편은 모두 ‘허위 매물’이었다고 농담 삼아 말하곤 한다. 이 영화는 흔히 말하는 ‘느낌 좋은’ 퀴어 영화 정도만으론 설명될 수 없는 작품이다. 관객이 여러 번 씹어 소화해야 할 것이 많다. 빠른 전환 속 상징물들이 어지럽게 얽힌다. <퀴어>는 영화 내에서 해석을 제공하기보단 관객에게 방향키를 쥐여준다. 무엇보다, 사랑보단 존재에 대한 영화였다. 이 점이 가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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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 not queer. I'm disembodied.“

나는 퀴어가 아니야. 몸과 정신이 분리된 거지.


주인공 리는 당시의 문법으로는 이해하고 정의 내릴 수 없는 ‘퀴어’다. 그 또한 자신을 불완전하고 분리된 존재로 정의한다. 리는 평생을 ‘닿고자’ 하는 인물이다. 젊고 아름다운 남성 혹은 젊음 그 자체의 주변을 부유하며 알지 못할 공허를 채워간다. 외로움과 고독함 따위의 단어로 치환할 수 없는, 가문의 묵은 저주다. 불완전함의 숙명이다.


리는 바에서 일상적 대화를 나누다가도 ‘신호 없음’이 뜬 TV와도 같은 기분을 느낀다. 자신을 위한 정의가 없는 곳에 존재하기란, 끊긴 케이블을 그저 두는 것, 아무에게도 닿지 않을 수신호를 보내는 것과도 같다. 리는 주인공답지 않은 퇴화한 사회성을 보이기도 한다. 특히 유진 앞에서 유독 과하고 부자연스러운 액션과 맥락 없는 횡설수설로 수치스러움의 나날을 보낸다. 하룻밤을 보낸 청년에게 돈을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리는, 욕구에 능숙해 보였으나 실은 모든 게 낯설다. 파편화된 자신을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는 이 중년 남성은 매 순간 서툴기만 한 아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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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개인적이며 고요한 추락

 

영화에서 리가 ‘섭취’를 한다고 하면, 대부분 마약이다. 그에게 마약은 쾌락이 아닌 탈피를 위한 수단이다. 그의 손이 바쁘게 가루를 희석하고, 주사기로 액체를 빨아들인다. 투약하는 장면은 느리고 감각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참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푸른 눈, 깊은 주름, 땀에 젖은 앞머리와 담배 연기가 그리는 곡선에 길게 시선이 닿도록 하는 연출이다. 약효가 돌며 그의 눈은 점점 관객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멀어진다. 육신, 영혼, 그리고 존재로부터 멀어진다. 가장 개인적이고 조용한 추락, 존재로부터의 탈피를 기념하듯 New Order의 ‘Leave Me Alone’이 흘러나온다. 이 장면이 슬펐다는 평이 많았다. 리가 가진 외로움의 파고드는 성질 때문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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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서 그러하듯, 말 없이 통할 수 있다면

 

리는 자신의 손이 유진의 얼굴, 머리, 어깨 언저리를 유영하는 순간을 상상하곤 한다. 유진도 그 손길을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리는 말하지 않고도 서로의 마음을 아는 순간을 꿈꾼다. 정형화된 언어 체계가 아닌, 서로에게만 통하는 신호로 소통하기를 염원한다. 그래서 텔레파시의 효능을 가진 ‘야헤’라는 미지의 약초를 찾아 나선다. 지금 곁에 있는 유진과의 ‘접속’을 위해, 그는 금단 증상으로 벌벌 떨면서도 야헤를 찾는 끈질긴 여정을 계속한다. 멕시코의 풍경에서 밀림으로의 갑작스러운 전환은, 사건들의 사실 여부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마치 모험 소설의 넘겨지는 책장처럼, 꾸준한 변주를 주는 영화다. 모든 장면이 리의 뒤죽박죽한 정신세계와 단단히 엮여있다. 그에게 야헤란, 어떻게든 ‘연결’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조각난 채 부유하던 자신을 비출 수 있는 거울과도 같은 것이다.

 

 

선 너머의 합일, 공포와 해소

 

야헤를 달여 마신 리와 유진은 구역질을 하다가 심장을 뱉어내고, 곧이어 두 사람의 살갗이 연결된다. 둘의 육체는 하나가 되어 형태적 연결을 이룬다. 피부밑으로 오가는 손길로, 헤집고 느끼며 서로를 흡수하는 둘의 ‘합일’은 그 무엇보다 원초적이다. 합일이란 두려울 수밖에 없다. 개념과 언어가 사라진 세계에서, 상대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어줬을 때 선 한참 너머에 도달했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두려운 유진은 리에게 “나는 퀴어가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눈과 눈이 만났을 때 들리는 목소리, 완벽한 텔레파시의 형태다. 리와 유진은 복잡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본다. 둘의 몸이 화면에서 서서히 사라진다. 두 사람은 ‘원래’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인지하고 공포에 질린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 순간들을 공유하고 경험한 후 각자만의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공포와 해소를 동시에 담기도 한다.

 

영화는 상실의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활용한다. 리의 시각에서 유진, 그리고 자기 자신은 언제나 흐릿하고 불확실한 형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밀림에서 나가던 중, 리는 유진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소유했던 것 중 가장 눈부셨던 유진이 사라진 순간, 리는 우주에서 부유하기 시작한다. 어떤 신호도 닿지 않는 곳, 우주를 떠도는 작은 입자가 된 리. 無의 공간에서 영원히 떠돌게 된 리. 대우주에서 떠도는 인간의 속엔 얼마나 다양한 형태의 외로움이 있을까. 퀴어로서의 온갖 불완전성과 무력감이, 무한한 진공에서 떠도는 리의 몸에 내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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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후반부에선 ‘리’라는 인물과 그의 존재적인 트라우마의 상징물이 쏟아진다. 리는 종이로 만든 미니어처 호텔을 들여다본다. 작은 창문을 통해, 젊은 남성들과 하룻밤을 보낼 때마다 찾았던 동네 호텔 내부를 바라본다. 새빨간 벽지의 가장 끝방에서, 리는 침대에 앉은 유진과 총을 든 자신을 발견한다. 어디 한 번 해보라는 듯 머리 위에 유리컵을 올린 유진을, 리는 쏘고야 만다. 총을 쏜 자의 발치에는 무한의 형태를 한 뱀이, 꼬리를 문 채 눈물을 흘리고 있다. 어떤 굴레는 영원할지도 모른다. 존재의 점진적 상실이든, 유진에 대한 사랑이든, 가문의 저주든, 탈피하려 할수록 유지되는 것들이 리를 단단히 붙든다. 또다시 사라짐의 연출이 등장한다. 유진의 몸,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려던 리의 뒷모습이 사라진다. 두 인물의 존재적 페이드아웃은 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바람 소리만을 남긴다. 리는 호텔에서 떠날 수 있는가? 상실로부터 걸어 나갈 수 있는가?

 


음악으로 완성되는 <퀴어>

 

영화의 도입부에는 Sinéad O'Connor의 ‘All Apologies’가 삽입되었다. 파랗고 거친 손 글씨로 적힌 크레딧과 각종 소지품의 나열이 아름답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향취는 어쩌면 오프닝에서 가장 강력할지도 모르겠다. 올드한 멕시코의 거리 풍경과 밴드 Nirvana의 ‘Come As You Are’가 조화되는 순간을 상상해 보라. <퀴어> 속 장면들은 음악에 맞춰 절묘하게 움직이고 멈추며 쾌감을 선사한다. 무거운 베이스의 진행 중 드럼 소리가 투입될 때, 닭싸움을 구경하는 인파 사이로, 아름다운 유진이 지나간다. 극도로 밀집되고 고조된 슬로우모션 속 첫 만남이다.

 

Nirvana의 ‘Come As You Are’가 삽입된 장면에 달린 댓글 중, “50년대 멕시코 거리에 왜 너바나의 음악을 삽입한 거야?”라는 짜증 섞인 댓글이 있었는데, 올드한 풍경과 실험적인 음악의 시너지를 즐기는 것이 이 영화의 묘미라고 확신한다. 영화란 메시지의 전달에서 더 나아가, 화면과 음향의 절묘한 조화로 와우포인트를 완성해야 한다. 그랬을 때 그로부터 오는 쾌감을 위해 몇 번이고 상영관을 찾는 이가 생긴다. 개인적으로는 초라하고 작은 리의 모습과 조화된, 밴드 Verdena의 ‘Sui Ghiacciai’가 가장 좋았다. 장면과 함께 들어보는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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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eer/kwir : 형용사 / 1. strange; odd. (낯설고, 이상한)

 

1회차 관람 때 <퀴어>는 사전적 정의대로 어려웠고, 힘들었다. 밀림부터 우주까지의 자유로운 시공간적 교차와 끝도 없는 상징물에 “이게 뭐야”하는 질문이 남기 마련이다. 난해하고 불친절한 영화에 불만을 가지는 이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퀴어>를 분석하면 할수록 소수자에 대한 주제 의식이 그 어떤 작품보다 분명함을 알 수 있다. 성 소수자가 느끼는 존재의 불완전성과 연결의 부재, 그리고 필연적 공허 속 사무치게 외로운 이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비단 성 소수자만 공감하는 작품이 아닐 것이다. 자꾸만 지워지고 사라지는 존재로부터의 탈피, 타인과의 ‘연결’을 욕망하며 신호를 보내는 모든 인간을 위한 영화다.


존재의 지워짐과 ‘닿지 못함’을 영화로 이야기하기에 이보다 적절한 시기란 없다. <퀴어>를 두 번째로 관람했던 날, 상영관 앞에는 퀴어영화제 지지 대자보가 붙어있었다. 영화 시작 한 시간 전까지는 온전했던 것이 영화 직전에 가보니 갈기갈기 찢겨 쓸쓸히 떨어져있었다. 겨우 몇 시간을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고 훼손된 대자보. 사람이라고, 얼마나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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