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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 <퀴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난 6월 20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통해 이미 국내에서도 꽤 인지도를 모은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신작 <퀴어>가 개봉했다. 노골적인 제목에서도 알아차릴 수 있듯 개봉 전부터 제2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개봉한다며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그러나 막상 공개된 <퀴어>는 예상을 뒤엎었고 관객의 반응은 엇갈렸다.
감독의 최근 전작들을 살펴보면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본즈 앤 올>, <챌린저스> 등 주로 10~20대 청춘의 사랑을 다룬 작품들이다. 첫사랑과 첫 이별, 헌신적인 사랑, 삼각관계에서 피어나는 욕망과 질투. 그는 젊음에서 느껴지는 사랑을 그려냈다.
그러나 <퀴어>는 이 지점에서 분명한 선을 긋는다. 영화는 중년 남성 리(다니엘 크레이그)의 시선에서 청년 유진(드류 스타키)에게 느끼는 감정과 그로 인해 촉발되는 퀴어로서의 자아를 탐구한다. 이 과정은 꽤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게 표현되며 농염하고 육감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점에서 전작들과는 그 온도와 리듬이 다소 다르다.
비록 영화는 윌리엄 S. 버로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나에게 <퀴어>는 감독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개인적으로 느껴진다. 커밍아웃한 동성애자 감독 구아다니노가 주인공 리에게 자신의 고민을 투영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그 이유다. 내가 아는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늘 사랑의 감정을 표현해 왔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보다 한 사람의 깊은 내면과 정체성에 대한 탐색 과정이 전면에 부각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관객들이 가장 궁금해할 질문이 떠오른다. “그래서 <퀴어>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같은 영화인가?” 나의 대답은 일부는 ‘그렇다’고 일부는 ‘그렇지 않다’이다. 두 작품은 모두 구아다니노 감독 특유의 미장센이 돋보이며 비슷한 서사 구조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보인다. 하지만 <퀴어>는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이야기 흐름의 급작스러운 전환과 함께 실존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그로스테크하고 고어한 장면들이 나오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영화는 일정 부분 <본즈 앤 올>에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본즈 앤 올> 중간에 위치한 영화로 규정하고 싶다. 이 영화는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고, 희망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과 같은 분위기를 예상하고 간다면 실망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선언한 듯하다. 그는 더 이상 아름답게만 포장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건 짝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이밍이 어긋난 사랑의 이야기다.”]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퀴어>의 방향성을 가장 잘 함축한 한 문장이다. 영화는 총 3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3막의 구조를 순서대로 따라가며 사랑과 욕망, 자기혐오, 그리고 육체와 정신의 분리에 이르는 자아 해체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1막. “I want to talk to you without speaking.”

1막은 미국 중년 남성 리가 멕시코 시티로 건너와 미스터리한 청년 유진을 만나게 되며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1막은 두 사람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는 만큼 아름다운 영상미가 돋보인다. 특히 Nirvana의 Come As You Are이 흐르는 가운데 밤의 조명과 달빛 아래 묘사되는 둘의 첫 만남은 전작에서 보였던 구아다니노 감독 특유의 미장센이 다시금 빛을 발하는 장면이다.
이 장에서 리는 자신이 퀴어임을 이미 자각한 상태의 남성으로서 퀴어인지 명확하지 않은 유진에게 강한 이끌림을 느낀다. 얼핏 보면 리의 일방적인 구애처럼 보이지만 유진 역시 감정의 여지를 남기는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혼자 있는 리에게 다가가 술을 사주는 행위나 호기심이 담긴 그의 눈빛은 단순한 짝사랑의 구도로만 보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중요한 건 여전히 유진은 리에게 확신을 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유진의 태도는 리의 집착을 불러일으킨다. 나중에 리는 그에게 이렇게까지 말한다.
[“그저 다정하게만 대해줘. 일주일에 두 번 정도”]
1막을 관통하는 핵심은 ‘말없이 너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다. 비언어적인 소통에 대한 갈망이 잘 드러나는 이 역설적인 대사를 구아다니노 감독은 시각적인 언어로 구현한다. 그는 이중노출 기법으로 실재하지 않은 접촉을 통해 리의 욕망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대화 도중 리의 투명한 팔이 유진의 얼굴을 쓰다듬는 장면, 혹은 영화관에서 리의 투명한 영혼이 유진의 어깨에 기대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연출은 이후 3막에서 텔레파시와 관련된 약초 야헤, 그리고 육체와 정신의 분리 개념으로도 확장된다.
2막. “Think I’m queer or something?”

2막은 둘이 함께 멕시코시티를 벗어나 여행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2막에서는 퀴어로서의 정체성, 자기혐오, 외로움 같은 감정들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리는 약물 중독으로 인해 병세가 악화함과 동시에 육체적 욕망에 대한 갈망 역시 심해진다. 리는 이미 1막에서 퀴어로서 겪는 자신의 욕망을 ‘저주받았다’고 표현한 바 있다.
그는 유진과 육체적 관계를 맺지만, 이는 관계의 완전한 합일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둘의 사이에는 일시적인 합일이 존재하지만,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었다’는 유진의 말처럼 정서적 교감으로는 이어지지 못한 채 갈등을 겪게 된다. 둘이 육체적인 관계가 해소되지 못한 정체성의 혼란에 따른 불완전한 결합임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에 따라 리는 텔레파시 감각을 얻을 수 있는 약초 야헤를 통한 정서적인 연결을 더욱 원하게 된다. 이러한 인물의 내면은 의상에서도 엿볼 수 있다. 1막에서 리는 주로 베이지, 화이트 계열의 밝은 톤의 의상을 입었지만 2막에서는 여행이 시작되는 차 안에서부터 검은 셔츠를 입고 있다. 이후 3막 무렵에는 그의 의상은 진흙 범벅으로 잔뜩 더럽혀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2막은 사랑의 감정보다 정체성에 대한 탐구라는 영화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전환점이다. 이 지점에서 <퀴어>는 감독이 전작에서 보여준 감정선과는 확실한 거리를 둔다.
3막. “I’m not queer”

3막에 이르면 마치 다른 영화가 시작된 것처럼 이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로 접어든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 그들은 환각 속에서 하룻밤 육체를 초월한 영혼의 합일을 이루게 된다. 리가 그토록 원했던 ‘말없이 대화를 나누는’ 경험이다. 하지만 리가 생각했던 방향과 다르게 이는 그들의 관계의 파멸을 불러온다. 동기화에서 오는 공포, 그리고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마주했을 때의 반응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환각 속에서도 유진은 리에게 말한다. “난 퀴어가 아니에요.” 마치 방금 자신이 마주한 사실을 회피하려는 듯, 일종의 자기방어이자 두려움이 묻어나오는 대사다. 다음 날 아침, 어떠한 말도 하지 않는 유진과 그를 바라보는 리의 얼굴은 관계의 결말을 암시한다. 유진에게 건네는 코터 박사의 말이 3막의 설명을 대신한다.
[“이미 열린 문은 다시는 닫지 못해. 싫다면 외면하는 수밖에. 근데 그럴 이유가 있을까? 네가 지난밤 너의 모습을 봤어야 해.”]
Epilogue.

다시 호텔 복도. 리가 열어젖힌 문 너머에는 자기 몸을 집어삼키며 눈물을 흘리는 한 마리의 뱀이 있다. 그 뱀은 리 자신이다. 자기를 혐오하며 파괴하는 존재. 2년이 흐른 지금도 리는 유진을 잊지 못한 채 그 관계 안에 여전히 갇혀 있다. 그는 마음속에서 유진을 죽였지만, 입을 맞추고 또 그를 붙잡는다.
하지만 유진은 더 이상 그곳에 없다. 그토록 갈구했던 몸을 이제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하지만 리는 여전히 유진의 다리로 감싸진 그날의 온기를 기억한다. 결국 그는 유진과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기 파멸 속에서 끝끝내 외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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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쿠아다니노 감독은 이 영화를 두고 “짝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 타이밍이 어긋난 사랑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유진이 그의 정체성을 받아들인 뒤에 만났다면, 리가 야헤를 찾아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이 영화의 결말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은 만약일 뿐이다. 일은 벌어졌고, 2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이 결말은 리가 유진을 더 많이 사랑해서도, 유진이 퀴어가 아니어서도 아닌 단지 타이밍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맺어진 결과라는 점이다.
앞서 <퀴어>가 구아다니노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진다고 한 이유는 리와 유진이라는 인물들의 특성과 그들을 그려낸 감독의 표현 방식에 있다. 주로 이전 작품들이 감정의 절제와 표현의 생략을 통해 인물을 구사했다면, <퀴어> 속 인물들은 감정을 숨기지 않고 쏟아내며 그것을 담아내는 연출도 훨씬 노골적이고 직접적이다. 특히 유진의 다리가 리의 다리를 감싸는 마지막 장면은 마치 퀴어인 나를, 이렇게 외롭게 죽어가는 나를 따뜻하게 보듬어달라고 관객에게 외치는 아우성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개인적인 영화라는 말은 달리 보면 다수의 공감을 얻기 어려운 작품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때로는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파괴적인 몇몇 장면들은 보편적인 공감을 얻기는 어려워 보인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영화가 호불호가 갈리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퀴어>는 반드시 한 번은 만들어져야 했을 이야기이며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었기에 잘 풀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