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영화는 음악으로 기억된다. 영화 자체는 그리 인상적이지 않더라도, 음악을 들으면 마치 필름이 다시 돌아가듯 장면들이 재생되는 경우가 있다. 영화보다 음악의 존재감이 앞서는 경우다. 반대로 어떤 음악은 영화로 기억된다. 곡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이 장면을 위해 태어난 곡이구나 싶을 때가 있다. 이 경우는 영화가 음악보다 더 강렬한 존재감을 지닌다.
나에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단연 음악이다. 드라마는 대사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감독보다 작가의 역할이 더 크게 평가된다. 하지만 영화는 흔히 카메라의 예술이라 불린다. 작가보다 감독이 주목받는 이유다. 시각이 주도권을 쥔 예술이기에 음악은 화면이 다 전하지 못하는 감정의 파동과 여운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시각과 청각이 완벽하게 맞물려 시너지를 낸 영화 속 밴드 음악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나의 플레이리스트 중 Cinema라는 제목의 재생목록에는 약 320곡의 사운드트랙이 담겨 있다. 첫 곡부터 끝 곡까지 쉬지 않고 들으면 꼬박 18시간이 넘게 걸리는 분량이다. 그 방대한 리스트 속에서 영화와 음악이 서로의 존재를 완벽하게 채워주는 곡들을 골라 소개하고자 한다.
1. You Keep Me Hangin’ On – Vanilla Fudge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바닐라 퍼지는 1960년대 중반 미국 사이키델릭 록 신의 중심에 있었던 밴드다. 1967년 데뷔 후 3년동안 5장의 앨범을 발표했는데, 흥미로운 점은 데뷔 앨범에 자작곡이 단 한 곡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전곡이 커버 곡으로 구성된 1집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트랙이 바로 ‘You Keep Me Hangin’ On’이다. 원곡은 흑인 여성 그룹 더 슈프림스의 빌보드 핫100 차트 1위를 차지한 곡으로 경쾌하고 리듬감 있는 소울사운드가 특징이다. 바닐라 퍼지는 이 곡을 그들만의 스타일대로 재탄생시켰다. 템포를 무겁게 늘리고 오르간과 기타를 강조한 사이키델릭 록으로 재해석했다. 이 버전이 담긴 데뷔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6위까지 오르며 주목을 받았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2019년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마지막 액션 시퀀스에 이 곡이 삽입되었다. 영화는 1969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아내 샤론 테이트가 처참하게 살해된 일명 맨슨 패밀리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다. 타란티노 감독은 모두가 아는 사건의 결말을 과감히 비틀어 통쾌한 복수극으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한다. 평소 폭력적인 장면을 자주 넣기로 유명한 그는 이번에도 피범벅과 비명이 낭자한 액션 시퀀스를 8분가량 선보인다.
맨슨 패밀리 일당이 집에 침입할 때 곡의 묵직한 오르간 인트로가 긴장감을 조성한다. 그리고 느릿한 전주가 화면 속 공기를 압축하듯 조여온다. 이어 폭발하듯 터지는 드럼과 기타는 관객의 심장 박동을 대변하듯 강렬하게 울린다. 이 음악은 단순히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장치로 사용된 것이 아니다. 자칫 잔혹한 액션이 줄 수 있는 충격의 선을 넘어 카타르시스로 전환하는 역할을 한다. 1969년이라는 영화의 배경 연도와 곡의 발표 시기가 맞물리면서 장면에 시대적인 질감이 더해지는 효과까지 완성된다.
2. Where Is My Mind? – Pixies
<파이트 클럽>
‘Where Is My Mind?’는 미국의 얼터너티브 록 밴드 픽시즈의 1988년 앨범 Surfer Rosa에 수록된 곡이다. 프론트맨 블랙 프랜시스가 카리브해에서 스쿠버 다이빙을 한 경험에서 착안해 쓴 곡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경험이 충실히 반영된 독특한 가사가 인상적이다. 그중에서도 곡의 제목이자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후렴 가사인 “Where is my mind?”는 이 곡이 삽입된 영화의 주제와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I was swimmin’ in the Caribbean
난 카리브해에서 수영하고 있던 중이었지
Animals were hiding behind the rock
동물들은 바위 뒤에 숨어있었어
Except the little fish
작은 물고기만 말고 말이야
Bumped into me
그 물고기는 나랑 부딪혔는데
swear he's tryin' a talk to me, say wait, wait
맹세코 나에게 말을 걸려고 했어
이 곡이 대중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계기는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1999년 영화 <파이트 클럽>의 엔딩 장면 덕분이다. 영화는 이중인격자인 주인공의 시점을 통해 삶의 목적과도 직결되는 현대인의 주체성에 관한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질문을 던진다. “내 정신은 어디 있지?” 후렴 가사가 자아의 충돌과 붕괴를 겪는 주인공의 내면 심리를 관통하는 셈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남녀가 손을 맞잡은 채 도심의 빌딩들이 하나둘 폭발되는 장면을 함께 바라본다. 그 순간 단순하지만 중독적인 기타 인트로가 장면의 공간을 가득 메운다.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 장면이 아름답게 보이는 건 이미지와 멜로디의 아이러니한 대비 덕분일지도 모른다. 폭력의 끝에서 찾은 해방감, 차가운 화면 속 사라지는 불빛들, 굳건해 보이는 두 남녀의 뒷모습, 그리고 몽환적인 코러스. 이 모든 것이 합쳐져 그 순간의 낭만적인 분위기를 끌어낸다. 핀처 감독이 이 곡을 엔딩에 배치한 것은 영화사에 남을 명장면으로 만들 수 있었던 신의 한 수였다.
3. Lick It Up – KISS
<본즈 앤 올>
미국 하드 록 밴드 키스의 1983년 동명 앨범 타이틀곡 ‘Lick It Up’은 그들의 오랜 트레이드마크였던 페이스페인팅을 벗고 맨얼굴 활동의 시작을 알린 첫 싱글이었다. 단순하지만 강하게 반복되는 후렴구 “Lick it up, it’s only right now”는 생의 즐거움을 주저 없이 맛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80년대 하드 록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과잉된 에너지를 응축한 가사다.
Don't wanna wait 'til you know me better
네가 나를 더 잘 알게 될 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아
Let's just be glad for the time together
함께한 시간에 그냥 만족하면 안 될까
Life's such a treat and it's time you taste it
인생은 정말 멋지지 이제 그것을 맛볼 시간이야
There ain't a reason on earth to waste it
지구상에서 그것을 낭비할 이유는 없어
It ain't a crime to be good to yourself
자기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은 범죄가 아니야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2022년 작품 <본즈 앤 올>에서 이 곡은 클라이맥스가 아닌 의외의 순간에 등장한다. 매런(테일러 러셀)과 리(티모시 샬라메)가 서로의 식인 성향을 알아차린 뒤 집에서 리가 LP 플레이어에 바늘을 올리고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그는 과장되게 큼지막한 동작으로 몸을 자유자재로 쓴다. 자유를 찬미하는 곡의 가사와 거친 기타 연주가 음악에 몸을 온전히 맡긴 듯한 그의 움직임과 완벽히 겹쳐 보인다.
그러나 리는 거울 속 피로 물든 자기 목을 발견하고 더듬고는 춤을 멈춘다. 쾌락과 자유를 노래하는 가사가 실은 중독적인 본능으로 인해 벗어날 수 없는 생활을 하게 된 그의 삶과 대비된다. 자유롭지만 동시에 자유롭지 못하다. 원하더라도, 혹은 원치 않더라도. 평범하게 살 수 없는 그들의 운명에 가슴이 미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식인하는 주인공 둘을 두고 “Lick it up”의 가사가 반복되는 곡을 선택한 건 퍽 섬뜩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4. Something in the Way – Nirvana
<더 배트맨>
‘Something in the Way’는 1991년에 발표된 너바나의 명반 Nevermind의 12번째 트랙에 수록된 곡이다. 낮게 깔리는 보컬과 절제된 어쿠스틱 기타 위로 은근하게 배어드는 첼로와 드럼 소리가 특징이다. 같은 앨범 내 ‘Smells Like Teen Spirit’이나 ‘Come As You Are’ 같은 폭발적인 히트곡들과 달리 깊은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는 듯한 음울함이 곡 전반을 지배한다.
맷 리브스 감독의 2022년 영화 <더 배트맨>에서 삽입된 이 곡은 잿빛으로 가득 찬 고담시의 분위기에 잘 들어맞는 곡이다.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한 브루스 웨인이 오토바이로 고담시를 가로지르는 3분 남짓의 장면에서 이 곡이 꽤 길게 활용된다. 너바나의 프론트맨 코베인의 허스키하고 나른한 목소리가 로버트 패틴슨의 저음 내레이션 위에 얹혀 조화를 이룬다.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웅장하고 희망찬 테마 대신 정적이고 어두운 곡을 선택한 건 배트맨이라는 인물의 고독과 외로움을 드러내기에 적절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고담시의 차가운 콘크리트와 축축한 지하의 분위기를 모두 담고 있으며 고독한 한 인간의 뒷모습을 부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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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OST는 단순히 장면의 여백을 메우는 소품이 아니다. 때로는 서사의 톤을 전환하고, 인물의 내면을 대변하며, 인물의 처지를 부각하거나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응축한다. 대본에는 적혀 있지만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지문처럼 음악은 화면 밖에서 이야기를 완성한다. 음악이 존재함으로써 장면은 비로소 하나의 완성된 예술로 기능한다.
지금까지 OST를 단순히 허전함을 채우는 배경음악 정도로만 여겨왔다면, 이번 기회를 통해 장면마다 사용된 음악을 유심히 들어보기를 권한다. 장면을 음악과 함께 곱씹어 본다면 같은 장면도 이제는 다르게 다가오는 순간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영화 속 숨은 명곡들을 하나씩 발견하는 재미를 찾으며 영상과 음악을 함께 마음에 오래 품을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