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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상처 입은 영혼의 눈빛, 배우 박지훈 [영화]

〈왕과 사는 남자〉와 〈약한영웅〉에 이르기까지, 그는 어떻게 관객을 설득했는가

by 강채연 에디터
2026.02.28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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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탄생’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좋을 얼굴들을 만나게 된다. 스타의 탄생을 목격하는 일은 한 명의 관객으로서 제법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2026년의 초입, 나는 극장가에서 또 한 명의 스타의 탄생을 목도하고 있다는 느낌과 함께 기분 좋은 감정을 곱씹었다.

 

지난 2월, 한국 영화의 연이은 부진으로 다소 얼어붙어 있던 극장가에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개봉했다. 물론 지난해에도 〈좀비딸〉이 600만 관객을 넘겼지만, 이번 영화의 기세는 유독 심상치 않다. 단순히 관객 수를 넘어 스크린 밖으로 번져나가는 영화의 열기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은 SNS를 몇 번만 드나들어도 금세 체감할 수 있다. 영화 속 인물의 묘역을 찾아 추모와 비판의 댓글을 남기는가 하면, 배경이 된 역사 현장을 직접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온라인상에서는 배우와 감독을 향해 ‘단종 오빠’, ‘거장 직전 감독’과 같은 수식어를 붙이며 영화를 또 다른 방식으로 소비하는 하나의 놀이판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 비운의 왕 단종, 이홍위에게 쏠린 대중적 관심이다. 사실 문종의 서거, 어린 나이에 즉위한 단종, 그리고 수양대군의 반란으로 이어지는 계유정난의 서사는 이미 수차례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통해 재현되어 온 바 있다. 그러나 수없이 반복되어 온 역사적 드라마 속에서 폐위 이후의 단종은 교과서 속 단 몇 줄처럼 축약되어 소개되곤 했다. 〈왕과 사는 남자〉는 바로 이러한 이야기의 공백을 파고들어 관객의 뜨거운 호응을 얻어냈으며, 이 중심에는 배우 박지훈이 있다. 오늘은 역사 속에서 오래도록 가려져 있던 왕을 현시대로 불러낸 얼굴, 그리고 아이돌이라는 타이틀을 벗고 배우로 거듭나는 중인 배우 박지훈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왕과 사는 남자〉, 이홍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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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과 사는 남자〉는 계유정난 이후 왕위에서 밀려난 단종이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를 떠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잃은 열일곱 어린 왕이 보수주인 엄흥도와 광천골 마을 사람들이라는 소중한 사람들을 얻기부터 끝내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여정을 그려낸다. 한국 영화 최초로 단종의 숨겨진 일화를 다루고 있는 만큼 단종을 연기하는 한 사람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제대로 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은 시간을 상상으로 메워야 하는 작품에서 처음 등장하는 배우의 얼굴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관객은 그 얼굴을 통해 단종을 새로이 기억할 것이고, 어쩌면 오래도록 그 이미지에 기대어 역사를 떠올릴 것이기 때문이다.

 

〈왕과 사는 남자〉에서 그 막중한 역할을 맡은 이는 배우 박지훈이다. 개봉 이후 “박지훈 눈이 서사다”, “단종이 환생한 것 같다”는 호평 일색이 이어진 이유는 영화 초반 몇 분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되었다. 피골이 상접한 몰골, 버석하게 마른 얼굴, 두려움과 공허함이 겹겹이 내려앉은 눈망울을 한 채로 유배길에 오르는 장면은 관객이 새로운 단종의 이미지를 단번에 받아들이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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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그의 연기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눈빛과 목소리의 변화다. 초반의 시선이 텅 빈 공허함에 머물러 있다면, 시간이 흐르며 그는 서서히 왕의 눈을 되찾는다. 왕좌를 빼앗겼으되 왕으로서의 존엄은 내려놓지 않겠다는 다짐이 이홍위(박지훈)의 눈동자에 맺혀 있다. 목소리의 변화 또한 인상적이다. 초반 상을 물리라고 말하는 이홍위의 음성에는 호흡이 많이 섞여 있어 목소리가 가늘고 힘이 없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스스로를 다잡으면서부터는 목소리도 점차 중심을 잡는다. 호흡을 걷어내고 직선으로 뻗는 발성. 이러한 작은 디테일들이 모여 ‘박지훈의 단종’이라는 하나의 인물을 완성한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대사량과 분량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점인데, 그럼에도 그가 연기한 단종의 잔상은 마치 연필로 종이를 꾹꾹 눌러쓴 흔적처럼 오래간다. 유약하고 여린 소년과 끝내 무너지지 않으려는 한 시대의 왕이 한 얼굴 위에서 겹치며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관객이 기꺼이 마음을 동하게 만든다.

 

 

 

〈약한영웅〉, 연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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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중에게 단종으로 눈도장을 찍기 전, 배우 박지훈의 본격적인 신호탄은 이미 〈약한영웅 Class 1〉에서 한 차례 울린 바 있다. 화제의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을 통해 먼저 주목받았던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아이돌 꼬리표를 완벽하게 떼어내고 시청자들에게 박지훈이라는 배우를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 시리즈는 공부 외에는 관심이 없던 모범생 연시은(박지훈)이 폭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학교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10대 소년들이 만들어내는 관계성의 중심에는 연시은이라는 캐릭터가 있다. 해가 뜨기도 전 등교해 아침 자습을 하고, 점심시간에도 문제집을 펼치며, 집으로 돌아와서도 책상 앞을 지키는 상위 1% 모범생. 시리즈를 끝까지 보고 나면 박지훈이 아닌 연시은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캐릭터를 본인만의 것으로 소화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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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테면 극 중 연시은은 늘 무표정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항상 부모의 애정이 비껴간 자리에서 홀로 버텨야 했던 한 소년의 고독이 그림자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다. 친구 없이 공부만 하던 초반 시은의 눈빛에는 외로움이 얇은 막처럼 드리워져 있다가 수호(최현욱)와 범석(홍경)을 만나며 조금씩 온기를 띠는데, 그의 눈빛 변화를 지켜보는 것 또한 이 작품의 또 다른 관람 포인트이기도 하다.

 

이처럼 늘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던 인물이 특정 사건을 기점으로 임계점을 넘어 폭발하는 장면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때 목과 얼굴이 울긋불긋 달아오른 채 울분을 토해내는 박지훈의 연기는 단연 독보적이다. 억눌려 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느껴지는 뜨거운 에너지가 화면 너머의 시청자에게 그대로 전해지며 연시은이라는 캐릭터를 끝내 애정하게 된다.

 

*

 

〈왕과 사는 남자〉의 이홍위부터 〈약한영웅〉의 연시은에 이르기까지 일종의 구원 서사 속 겉으로는 덤덤하지만, 내면에는 깊은 상처를 가진 인물들의 성장 이야기를 소화해 낸 박지훈의 연기에는 강한 설득력이 있다. 그 설득력은 힘을 빼야 할 순간과 밀어붙여야 할 순간을 정확히 아는 배우의 판단에서 나온다. 자칫하면 오버페이스로 비추어 보일 수 있는 장면에서 한발 물러설 줄 아는 것은 배우에게 과한 감정을 가져가야 하는 순간만큼이나 중요하다.

 

무언가를 애써 표현하려 감정을 크게 휘두르기보다 인물이 이미 품고 있는 분위기로 보여주고, 많은 대사로 설명하기보다는 눈빛으로 상태를 설명한다. 자칫하면 오글거리고 과해 보일 수 있는 캐릭터를 담백하게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힘이야말로 장시간 스크린 속 배우를 지켜봐야 하는 관객과 시청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2022년 공개되었던 〈약한영웅〉이 다시금 넷플릭스 TOP 10 시리즈 상위권에 오르며 역주행하며 과거의 작품까지 재소환되는 흐름을 보니 이쯤 되면 이번 '왕사남 열풍'의 중심에는 박지훈이 있다고 말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아이돌 출신이라는 수식을 벗어던지는 단계를 넘어, 어쩌면 우리는 지금 한 배우의 빛나는 시작을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계속될 그의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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