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니 이번이 나의 첫 페스티벌이었다. 음악도 공연도 좋아하는 내가 그 사실을 이제야 자각했다는 게 스스로도 의아했다. 좋아하는 아이돌이 콘서트를 열면 소위 올콘을 뛰었고, 졸업이 코앞인 지금까지도 대학 축제 라인업에 집착했다. 지하의 비좁은 인디 공연장에서 아티스트를 코앞에서 본 적도, 드넓은 월드컵경기장에서 하루 종일 전광판만 쳐다보다가 이럴 거면 유튜브로 보는 게 낫겠다는 푸념과 함께 집에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런 내가 페스티벌은 단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는 걸 미처 모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늘 결제창 앞에서 망설였다. 이번에는 가야겠다고 수백 번 마음을 고쳐먹고도 결제창에서는 손끝이 쉽사리 넘어가지 않았다. 특히 규모가 큰 야외 페스티벌이라면 더더욱. 나는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쉽지 않은 사람이다. 똑같은 돈으로 단독 콘서트를 가면 내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족히 두 시간은 볼 수 있을 텐데, 수많은 라인업 속에서 길어야 한 시간 남짓의 무대를 위해 기다리는 이유를 찾기 어려웠다. 대부분 한여름에 열리는 것도 부담이었다. 땡볕 아래 몇 시간을 서 있다는 건 돈을 주고 사서 고생하는 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효율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내 일상에 페스티벌이 들어설 자리는 애초에 없어 보였다.
2025 사운드 플래닛 페스티벌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 또 페스티벌이구나. 사운드 플래닛 페스티벌이라, 곱씹어보니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호기심에 공연 정보를 눌렀다. ‘홍대 음악의 성지 롤링홀이 개관 30주년을 기념하여 대형 페스티벌 2025 사운드 플래닛 페스티벌을…’ 홍대 롤링홀 30주년이라니. 가본 적은 없지만 인디 음악의 성지로 유명한 공연장이란 건 알고 있었다. 언더그라운드와 인디 뮤지션들의 무대를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으로 언젠가 방문해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이었다. 인디 음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정보였다.
정보를 마저 읽어 내려갔다. ‘… 인천 영종도 파라다이스시티에서 개최된다.’ 페스티벌은 대개 넓은 공터를 택하는 것이 기본인데 호텔이라니. 호텔 안에 공연장이 따로 있었던가. 감이 오지 않는 구성을 상상하며 가장 중요한 라인업을 확인했다. 이 페스티벌은 두 가지가 분명했다. 하나는 호텔이라는 독특한 공간, 다른 하나는 탄탄한 라인업. 한두 팀만 눈길이 가던 다른 페스티벌과 달리 메이저와 신인이 적절히 섞여 상업과 언더그라운드의 균형을 이룬 구성은 꽤 매력적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이름도 여럿 보였다. 인천은 집에서 꽤 멀었지만,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이 정도면 손해 볼 일 없겠다고 생각했다. 설렘을 안고 페스티벌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드디어 D-day. 아침 일찍 부랴부랴 준비를 마치고 인천으로 향하는 공항버스에 몸을 실었다.
기대 이상이었던 점을 하나만 꼽자면 단연 쾌적한 관람 환경이다. 사운드 플래닛은 파라다이스시티라는 특수한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해 아티스트에게는 색다른 공연 경험을, 관객에게는 최적의 휴식 공간을 제공했다. 특히 페스티벌 하면 고생부터 떠올리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조건이었다. 공연 당일 아침, 부슬부슬 비가 내리더니 낮이 되자 햇살이 제법 강해졌다. 야외 무대 앞에서 땀을 훔치며 공연을 보다 타임테이블 사이 여유가 생길 때마다 호텔 로비로 곧장 들어가 숨을 고르고 열기를 식혔다. 체력이 걱정이던 아침의 우려가 무색할 만큼 곳곳에 마련된 휴게 공간은 그 자체로 큰 장점이었다.
공간을 활용한 이색적인 공연장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다양한 장르와 경력의 아티스트들이 라인업을 빼곡히 채운 만큼 이를 고려한 무대 구성도 특별했다. 이번 페스티벌의 스테이지는 총 다섯 곳이었다. 메인인 사운드 플래닛 스테이지는 인지도가 높은 아티스트가, 사운드 캠프 스테이지는 하드록 중심으로, 크로마 스테이지는 최근 라이브 신에서 떠오르는 팀들을, 사운드 브리즈는 소프트 팝적인 팀들을, 마지막 버스킹 스테이지는 신인 아티스트 위주로 꾸려졌다. 시간상 크로마 스테이지는 끝내 가지 못했지만, 나머지 스테이지에서 만난 공연들을 중심으로 오직 사운드 플래닛 페스티벌에서만 느낄 수 있었던 특별한 순간들을 공유해보려고 한다.
먼저, 메인 스테이지인 사운드 플래닛 스테이지. 헤드라이너와 대중성 있는 아티스트가 서는 곳답게 드넓은 야외 잔디가 시야 끝까지 펼쳐져 있었다. 오전에는 Hathaw9y, 오후에는 이승윤, 저녁에는 Xdinary Heroes의 공연을 보며 시간대마다 달라지는 분위기를 만끽했다. 무대 뒤쪽에서는 돗자리를 펴고 일행과 담소를 나누거나 그대로 드러누운 사람들이, 무대 앞에서는 흔들리는 깃발을 중심으로 모였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페스티벌을 즐기고 있었다.
이어 찾은 사운드 캠프 스테이지는 다섯 무대 중 가장 쾌적하게 느껴졌다. 펜타곤 멤버 키노의 솔로 무대를 보기 위해 들어갔는데, 실내임에도 많은 인원을 넉넉히 품는 공간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음향과 조명, 연출물까지 여느 공연장 못지않은 완성도를 보여줬다. 무대와 관객석의 거리가 한 걸음 남짓이라 아티스트와 함께 호흡하는 생생함은 마치 홍대 라이브 클럽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세 번째는 메인 스테이지만큼 오래 머물렀던 사운드 브리즈 스테이지다. 다섯 무대 중 가장 이색적인 공간으로, 크로마 스테이지와 파라다이스시티 외관 사이에 자리해 옆이 아닌 앞뒤로만 트인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야외의 개방감을 누리면서도 시선이 주위로 흐트러지지 않아 음악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아티스트들에게도 새로운 영감을 주는 장소였던 듯하다. 실제로 그날 무대에 오른 너드커넥션 보컬 서영주는 “이런 공연장은 저희도 처음이라 공간에 맞춰 셋리스트를 고민해 봤다”라고 말하기도 했으니까.
이 스테이지가 특별했던 점은 무대 뒤로 오가는 비행기였다. 인천공항과 가까운 탓에 끊임없이 들려오는 엔진음이 연주 위에 자연스레 얹혔다. 음악과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가 만들어낸 비현실적인 풍경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이날 저녁 무대에 선 데이먼스이어 역시 “처음엔 야외 소음이 신경 쓰였는데, 공연을 하면서 제 노래와 잘 어울린다는 걸 알았다”고 말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소음이 마치 곡의 여백을 채워주듯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애초부터 그런 노래였던 것처럼.
마지막으로 버스킹 스테이지는 파라다이스시티 로비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이름 그대로 지나가다 우연히 마주친 거리 공연을 보는 듯한 무대였다. 티켓이 없어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오픈 스테이지에서 신인 밴드들이 차례로 공연을 펼쳤고, 호텔을 오가던 투숙객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음악에 귀 기울이는 모습도 곳곳에서 보였다. 호텔의 자연스러운 소음과 신인 밴드의 뜨거운 에너지가 섞여 ‘버스킹’이라는 단어가 품은 낭만을 완성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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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티벌을 갈지 망설였던 짧은 고민이 무색해질 만큼 이색적인 경험을 즐기고 왔다. 2025 사운드 플래닛 페스티벌은 페스티벌이 줄 수 있는 경험을 깊이 고민해 기획한 흔적이 곳곳에 묻어났다. 관람객의 취향과 동선, 관람 환경을 세심하게 살핀 구성은 물론 롤링홀이 오랜 세월 사랑받아 온 비결까지 짐작게 하는 노련함이 돋보였다. 롤링홀 30주년을 기념해 열린 이번 페스티벌은 앞으로 사운드 플래닛이라는 이름만으로도 하나의 브랜드가 될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줬다. 이들이 앞으로 구축해 갈 또렷한 컨셉과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오래 지켜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