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뻗어 나가는 한류의 중심에는 케이팝이 있다. 그 성장의 발판에는 하드웨어적 요소도 있겠지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소프트웨어의 힘 또한 무시할 순 없다. 이제는 뛰어난 음악과 퍼포먼스로만 승부하는 시대가 아니다. 매년 수많은 아이돌 그룹이 쏟아지는 지금, 대중에게 각인되기 위해서는 그룹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브랜딩의 힘이 절실하다. 그 전략 중 하나가 바로 디지털 플랫폼의 적극적인 활용이다. 유튜브, 틱톡, 인스타그램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는 국내를 넘어 해외 시장까지 겨냥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창구이며, 그 중심에는 여전히 뮤직비디오가 있다.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가 높은 조회수로 기록을 세우는 것은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이제는 뮤직비디오가 음악을 시각화하는 도구를 넘어 하나의 예술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다. 가사의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상은 어느새 거대한 세계관의 연장선으로 활용되는가 하면, AI를 활용한 실험적인 시도까지 더해지며 표현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대부분 아이돌 그룹은 다인원 구성을 살려 멤버들이 직접 출연하지만, 배우와의 협업 사례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 경우는 특히 일정 수준의 연차가 쌓인 그룹의 멤버가 솔로 활동을 시작할 때 심심치 않게 보인다. 스크린에서 익숙한 배우의 얼굴이 케이팝 특유의 트렌디한 감성 속에 녹아들 때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시너지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하는 배우들은 인위성이 짙은 케이팝 뮤직비디오 안에서 때로는 자연스럽고, 또 때로는 색다르게 스며들며 내러티브를 강화하거나 세계관의 설득력을 높여준다. 배우와 아이돌이 가진 마스크가 충돌하며 생기는 기분 좋은 낯섦이야말로 이들의 협업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매력의 한 형태일 것이다. 그렇다면 케이팝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에 등장한 배우들은 누가 있을까.
1. 화사 – 박정민
지난 15일 미니 2집 이후 약 1년 만에 컴백한 화사의 새로운 신곡 ‘Good Goodbye’ 발매와 동시에 공개된 뮤직비디오가 화제다. 바로 화사와 박정민 배우가 연인으로 호흡을 맞춘 것. 그간 장르물에서 활약한 박정민 배우가 이번에는 섬세한 로맨스 연기를 선보이며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두 사람은 간질간질한 설렘과 아련한 작별까지 사랑의 시작과 끝의 경계를 오가며 현실 연인 관계 같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Good Goodbye’는 제목 그대로 좋은 안녕의 의미를 담은 곡이다. 정말 사랑했던 이라면 앞날을 응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개인적인 경험을 가사로 풀어냈다고 한다. 화사는 이 곡에 본인 인생의 1막이 담겼기에 이번 뮤직비디오는 영화처럼 남기고 싶었다고 표현한 만큼 실제로 촬영은 필름 카메라로 진행되었고, 그 덕분에 한 편의 영화 같은 영상이 완성되었다. 철썩이는 파도를 배경으로 낡은 소파에 앉은 연인의 모습은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떠올리게 하고, 중간중간 웨딩 화보를 연상케 하는 감각적인 이미지들은 분위기를 더욱 서정적으로 만든다.
눈물은 고이고 찬란하게 빛나
우린 좋은 안녕 중이야
고맙단 말 대신 전할게
goodbye good goodbye
안녕은 우릴 아프게 하지만 우아할 거야
나 땅을 치고 후회하도록 넌 크게 웃어줘
goodb-ye
가사에 담긴 이 아프고 찬란한 감정을 한층 더 현실적으로 끌어올린 건 박정민 배우의 연기였다. 사실 그의 뮤직비디오 출연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이미 아이유, 비비, (여자)아이들 등 다수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영상에서야말로 그의 연기는 유독 빛을 발하는 느낌이다. 무심한 표정 속 다채로운 감정을 숨기고 있는 박정민 배우의 얼굴은 사랑과 이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미묘한 감정선을 통해 매력이 극대화된다.
그뿐만 아니라 감정을 뱉어내고 절제해야 할 때를 정확하게 구분하는 그의 ‘만들어진 자연스러움’은 연인 관계의 현실감을 높여준다. 특히 떨어진 신발을 무심히 줍거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는 작은 디테일들이 서사의 설득력과 몰입도를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이미 서정적인 곡을 더욱 찬란하게 만들어준 배우의 공을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2. 에스파 – 구교환
뮤직비디오는 아니지만 새 앨범을 예고하는 티저 속에서 배우가 출연한 경우도 있다. 에스파의 여섯 번째 미니 앨범 ‘Rich Man’의 시네마틱 트레일러에는 구교환 배우와 이옥섭 감독이 직접 참여하며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실제 오랜 연인 관계로 알려진 두 사람은 ‘2x9’라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그들만의 감각적인 작업물을 꾸준히 공개해 온 바 있다. 비록 그들에게는 이번이 케이팝 아티스트와의 첫 협업이지만, 크레딧을 확인하기도 전에 2x9 작업임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이번 작업 역시 두 사람의 개성이 짙게 배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감성은 에스파 세계관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동시에 이번 앨범의 슬로건 “I am enough as I am. I am a Rich Man"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시각화하는 데 성공하며 앨범 컨셉의 설득력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영화에 현실을 담으려는 쪽, 다른 하나는 영화만의 인위성을 살리려는 쪽. 이옥섭 감독의 영화들은 후자에 가깝다고 본다. 그녀의 카메라에는 기묘하지만 사랑스러운 실험과 모험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미묘한 감성을 가장 잘 흡수할 수 있는 배우 역시 구교환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미묘하게 넘나드는 그의 독특한 연기는 케이팝이라는 어쩌면 가장 인위적인 장르 속에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게 느껴진다. 아이돌 그룹 중에서도 어쩌면 가장 독특한 세계관을 보유한 에스파의 세계관에 그가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트레일러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누워 있는 구교환을 중심으로 에스파 멤버들이 모여있는 구도. 그 한 샷에 담긴 배우와 아이돌의 이질적인 마스크는 묘하게 어우러지면서 낯설지만 또 싫지만은 않은 이색적이고 신선한 느낌을 준다. 바로 이 느낌이 트레일러의 매력을 배로 가중한다.
이번 프로젝트는 아이돌 티저치고 드물게 많은 양의 대사와 연기가 요구되었는데, 배우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는 에스파 멤버들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아마도 감독의 섬세한 디렉션과 배우의 즉흥적인 피드백이 맞물린 결과로 보인다. 실제로 비하인드 영상에서 구교환 배우가 촬영 현장에서 에스파 멤버들에게 질문을 던져 자연스러운 대사를 유도하거나 조언을 건네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다. 배우들도 어떤 감독이 연출을 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것처럼 배우와의 협업이 케이팝 아티스트의 색다른 변신에 미치는 영향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3. 뉴진스 – 정호연, 양조위
감각적인 뮤직비디오로 늘 주목받아 온 그룹 뉴진스의 ‘Cool With You’ 뮤직비디오는 멤버들이 아닌 배우들을 전면에 앞세워 화제를 모았다. 미니 2집 ‘Get Up’의 타이틀 곡 중 하나인 이 곡은 퍼포먼스 버전과 함께 Side A, B 버전으로 구분하여 공개되었다. 이를 굳이 나누었다는 말은 아티스트 중심의 영상이 아니라 배우를 내러티브의 중심에 놓아 곡의 이미지에 집중하겠다는 명확한 의지를 표현하는 것과도 같다.. Side A, B 버전은 배우 정호연, 마이콜 베라, 그리고 양조위가 등장해 그리스 신화의 프시케와 에로스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그려낸다.
배우이자 모델인 정호연은 모델만이 가진 독특한 마스크를 이용해 영상에 감도는 냉기 어린 공기를 더욱 차분히 가라앉게 만든다. Side A에서 무미건조하고 덤덤한 표정으로 일관하던 그녀는 Side B로 넘어가며 사랑을 맛보기 직전의 환희, 두려움과 긴장감, 사랑에 빠지는 행복 등 사랑의 전 단계를 다채로운 표정으로 풀어낸다.
하지만 이 곡은 단연 배우 양조위의 얼굴로 기억된다. ‘California Dreamin'’을 들을 때 〈중경삼림〉 속 양조위의 눈빛이 자동 재생되듯 ‘Cool With You’를 들을 때면 그의 얼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 뮤직비디오의 신스틸러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출연은 ‘눈빛으로 연기하는 배우’라는 타이틀값을 톡톡히 한다. 등장 시간은 30초도 채 되지 않지 않고 특별한 액션과 대사 하나 없지만, 위태롭게 이어지던 금기의 이야기가 그의 눈빛 하나만으로 단번에 끊어지며 흐름이 전복된다. 스크린이 아닌 뮤직비디오 속에서도 배우의 얼굴이 가진 압도적인 힘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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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팝의 시장은 이제 글로벌 무대와 예술의 영역으로 점차 확장되고 있다. 특히 점점 복잡해지고 정교해지는 아이돌 그룹의 세계관과 내러티브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방식이 모색되고 있는 요즘, 그중에서도 배우와의 협업은 주목할 만한 시도다. 배우는 평소 대중에게 선보이기 힘든 연기를, 아이돌은 자신을 새롭게 비출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들의 협업은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다. 서로 다른 무대에서 활동해온 이들이 만들어내는 케미와 시너지를 앞으로도 볼 날이 많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