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혹시- 혹시 괜찮으시면 감 하나 드실래요?”
시사회 입구 앞 티켓 배부처에서 건네주신 감 한 알과 부조 봉투 모양으로 된 리뷰지 한 장. 시사회에 웬 감과 부조 봉투인가 싶겠지만, 영화의 배경이 장례식장이라는 점을 떠올리면 이내 이해가 된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이 감은 달콤떨떠름한 가족사의 단면을 비추는 상징처럼 다가온다.
감이라는 과일은 익음의 정도에 따라 맛이 가장 크게 바뀌는 과일이다. 조금만 덜 익으면 혀끝에 미묘한 떫은맛이 감돌고, 조금만 더 익어도 금세 모양이 스러진다. 정확한 때를 맞추지 못하면 본래의 맛과 모양을 잃어버린다. 그래서 적당한 단단함을 가진 감을 제때 맛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제단이나 차례상 위 감이 배움과 가르침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꽤 흥미롭다. 좋은 씨앗을 품고 있어도 같은 감이 열리지 않는 까닭은 결국 생채기를 내어 접붙이는 과정을 거쳐 비로소 온전한 맛과 우수한 형질을 유지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결국 감도 사람처럼 아픔을 겪어야만 제대로 된 열매가 맺힌다는 뜻이다.
영화 〈고당도〉 속 가족 역시 그런 접붙이기의 시간을 보낸다. 서로의 결핍을 마주하며 배우고 관계가 남긴 흉터 속에서 가르침을 얻으며 비로소 하나의 인격체로 설 수 있는 것처럼.
영화 〈고당도〉는 달콤하면서도 떫고, 또 제대로 익기 위해선 숙성의 시간을 보내야 하는 감의 속성을 가족 희비극의 중심에 놓아둔다. 영화에서 가족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서로를 짐처럼 짊어지게 만들다가도, 또 다른 순간에는 결국 서로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손길이 된다. 죽일 듯이 쏘아보고 멸시하듯 바라보던 눈빛에는 이후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지극히도 돌보는 애틋함이 서리기도 한다.
간호사 선영(강말금)은 사채업자에게 쫓기며 도망 다니던 남동생 일회(봉태규)의 처지에 환멸이 난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정작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를 위해 그 누구보다 빠르게 발 벗고 나서는 인물이다. 일회 역시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에 앞서 자신의 궁지부터 생각하는 인물처럼 보이지만, 삶이 벼랑 끝으로 몰렸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건 그의 아들이다.
아내 효연(장리우)은 가족을 연락처에 돈 많은 순서로 줄 세워둘 정도로 독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 이기심 이면엔 아들 동호(정순범)를 의대에 보낼 수 있는 등록금을 악착같이 지키려는 모성애가 있다. 아버지가 차라리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동호도, 가족을 버리고 떠났던 고모(양말복)도, 그리고 심지어 병실에 누워있는 뇌사 상태의 아버지 역시 모두가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서로를 해하고 동시에 위하는 양면성을 지닌 인물들로 표현된다.
영화 <고당도>는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이 효연의 실수로 미리 작성해 둔 부고 문자를 발송하게 되면서 시작되는 가족 희비극이다. 동호의 의대 등록금이 급한 상황에서 마침내 아버지의 장례식을 먼저 치르기로 하면서 발생하는 일들은 우스꽝스럽기도 한 동시에 서글프기도 하다.
영화는 익숙한 가족 드라마의 구도를 비트는 대신 가족이란 관계가 품고 있는 뒤틀린 양면성을 해학적으로 풀어낸다. 어떤 순간에서는 한국인의 정서에서 가장 깊게 자리한 가족이라는 부분을 아플 때까지 후벼 파고들기도 한다.
장례 사기극이라는 여태까지 보기 힘들었던 흥미로운 블랙코미디 소재를 끌고 들어오기에 장르적 재미는 분명하다. 가짜 장례식을 꾸미기 위해 쓰레기장에서 국화를 주워 오고, 편의점에서 편육과 소주를 쓸어 담고, 장례식장 경비원의 눈을 피해 몰래 장례를 진행하기 위한 몸짓을 바라보고 있으면 웃음이 먼저 새어 나온다. 하지만 모든 발버둥이 사채 상환과 빚에 막혀버린 의대 진학의 꿈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 웃음은 쓴웃음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남아있는 혈연의 끈을 놓지 않는다.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고, 차라리 내 삶에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고 쏘아대면서도, 막상 가족이 잘못되는 순간엔 자기 사정을 모두 제쳐둔 채 뛰어가게 되는 존재. 비록 나는 이렇게 비루하게 살더라도 너만큼은 나처럼 고생하며 살지 않았으면 하는 존재. 이를 위해 어느 특별한 노력과 이유도 필요하지 않은 관계가 가족이라는 사실을 이 영화는 일말의 희망처럼 바라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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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도의 감 하나가 제대로 열리기 위해서는 상처를 내고 다른 나무에 접붙이는 과정이 필요하다. 선영의 가족이 동호의 등록금을 위해 서로를 할퀴고도 결국 같은 울타리 안에서 버텨야 했던 것처럼, 서로를 지탱해야만 비로소 진정한 가족이 되는 셈이다. 결국 이 영화가 말하는 가족이란 완전히 달지도 쓰지도 않은 지점에서 그 적정한 익음을 찾아가는 과정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울고 웃으며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영화, <고당도>는 오는 12월 10일 전국 극장에서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