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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버무린 감정들 - 퀴어 [영화]

그야말로 "퀴어"하게 다가오는 작품에 대하여

by 조유진 에디터
2025.07.02 13:52

 

 

이 글은 영화 '"퀴어"의 결말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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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연출하고 007 제임스 본드로 잘 알려진 다니엘 크레이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 “퀴어”가 지난 6월 20일에 개봉했다. 소설가 윌리엄 S. 버로스의 자전적 소설을 각색한 해당 작품은 제81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상영 이후 9분가량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많은 영화 팬들의 기대를 집중시켰다.

 

개인적으로 영화 퀴어를 통해 가장 먼저 연상된 것은 루카 구아다니노를 대중적으로 알리는 데 큰 몫을 차지한 “콜 미 바이 유얼 네임”이다. 안드레 애치먼의 소설을 영상화한 작품은 북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소년의 첫사랑을 감성적으로 그려내며 대중들의 많은 관심을 얻는 데 성공한다.

 

이번 루카 구아다니노의 신작은 성소수자를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단어이자, 낯선/이상한/별난 처럼 다수의 범주에서 벗어난 무언가를 형용하는 “퀴어”가 원작 그대로 제목에 사용되었다. 동성애를 중심으로 다루었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퀴어가 국내에 상영되기 전 까지는 콜 미 바이 유얼 네임과 비슷하게 전개될 것만 같다는 추측이 나왔다. 예고편에 등장하는 청량하게 펼쳐진 바다와 노동의 고난함을 찾아볼 수 없는 중산층 출신의 인물들, 예술적인 미장센의 연속과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찬양까지. 성숙함이 가미된 “콜 미 바이 유얼 네임”처럼 보이는 이 영화의 실상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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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어에 대하여


 

1950년대의 멕시코 시티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한 유대인 청년과 헤어지는 중년 남성의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런 일은 전에 몇 번이고도 해보았단 듯이 시시함을 표출하는 이 남성은 미국에서 도망쳐 온 작가 “윌리엄 리”이다. 그는 마약과 술에 빠진 채 방탕한 생활을 즐기며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서슴지 않는다. 격식을 차린 정장에 중절모, 안경을 써 지적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진짜 그의 모습은 추레하기만 하다.

 

리는 식사 자리에서 상대를 가리지 않고 은근한 추파를 이리저리 던진다. 그러나 되돌아오는 상대방의 반응은 대체로 차가울 뿐. 몇 차례 실패를 거듭한 그를 관찰하다 보면 점차 그가 입은 옷에 눈길이 간다. 자세히 본 그의 바지는 이리저리 구김이 갔고, 외투의 깃은 아무렇게나 접혀있다. 모자를 벗은 앞머리는 힘없이 주저앉았고, 눈가의 주름은 세월을 암시한다. 그러나 눈동자만큼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색으로 빛난다. 젊음과 사랑에 대한 열망으로 치환된 그의 눈빛은 우연히 마주친 “유진 앨러턴”에게 향하고, 향후 일어날 두 사람의 관계를 암시한다.

 

영화 퀴어의 원작은 윌리엄 S. 버로스의 자전적인 소설인 “퀴어”이다. 사실상 미완성으로 끝이 난 원작과 달리, 영화는 3개의 장과 에필로그 형식으로 구성되며 환상과 몽상으로 단편화되어 있는 소설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특히 영화에서 3장을 이루는 정글로의 여정은 영화적 상상이 가미된 부분으로, 원작에서는 그려지지 않는 두 인물이 구축했던 관계의 종말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앞서 소설 “퀴어”를 자전적 소설로 언급했던 것처럼, 윌리엄 버로스는 작품을 당시 자신의 상황에 빗대며 집필하기 시작한다. 실제로 버로스는 멕시코 시티의 대학생인 루이스 마커라는 청년과 교제하며 그와 함께 야헤(환각제)를 찾으러 에콰도르로 여행을 가는 등 사랑에 열정적으로 임한다.

 

윌리엄 버로스에게 “퀴어”는 당시 만나고 있던 애인과의 관계를 남겨둔 기록이자 이들의 관계가 다시 가까워질 수 있는 전환점인 동시에 한 명의 독자를 위해 쓰인 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루이스 마커가 고향으로 돌아간 이후 일방적인 작별을 고하는 편지를 기점으로 극 중 정글로 떠난 두 인물의 여정 또한 이별을 맞이한다. 더 이상의 집필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야기는 선로가 끊어진 기차처럼 결말을 잃어버린다. 이후 퀴어를 내보이길 싫어했던 윌리엄 버로스에 의해 작품은 자취를 감춘 듯 보이다 30년이 지나서야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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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퀴어에 대하여 


 

그렇다면 이번에 개봉한 영화 “퀴어”는 어떨까? 루카 구아다니노가 연출한 퀴어는 원작에 충실한 동시에, 공백이 존재하는 두 인물 간의 감정선을 제 3자의 눈에서 해석해 내려고 노력한다. 자전적 소설이기에 유진 앨러턴의 심정을 알 수 없어 답답해하던 윌리엄 리의 관점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영화를 그린다. 덕분에 관객들은 영화에서 인물들의 행동을 납득할 수 있게 된다.

 

영화의 초반, 같이 남미로 여행을 가자며 무엇이든 대줄 테니 잃을 게 뭐가 있느냐고 리가 애원하자 앨러턴은 “Independence”, 즉 자립성이라고 이야기한다. 앨러턴은 무언가에 얽매이기를 천성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는 텔레파시에 관심을 보이며 야헤라는 식물을 찾아 나서자는 리의 말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리가 그의 머릿속을 장악하고 싶다는 농담을 던지자, 기분이 나빠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화 없이도 이야기가 가능한 상태가 될 만큼 그와 긴밀한 사이가 되기를 원하는 리는 텔레파시를 간절하게 원한다. 따라서 자신도 모르게 앨러턴에 대한 집착을 보이는 동시에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자신만의 유일한 관중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 무엇에 속박되기를 꺼리는 앨러턴과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낱낱이 알고자 하는 리는 긴장감 속에서 조용하게 충돌한다.

 

이러한 두 사람의 사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불안해진다. 마음의 크기가 다른 두 인물의 관계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지 궁금해하는 동시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멀리서 지켜본다. 그러나 끊길 듯 위태롭게 이어지던 그들의 만남은 예상외로 순조롭게 진행된다. 리의 제안에 에콰도르까지 따라간 앨러턴은 마약 금단 현상을 심하게 겪는 리를 부축하여 병원에 가기도 하고, 해변에서 시간을 보내며 평범한 연인처럼 평탄한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야헤를 찾아 나선 정글에서 두 인물은 그 분야의 권위자로 알려진 코터 박사를 만난다. 이는 리와 앨러턴이 육체라는 장벽을 넘어 서로의 감정을 날 것으로 마주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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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에게 주어진 해석의 여지


 

영화를 다 본 관객은 왜 리와 앨러턴이 헤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시간을 보내고도 왜 두 사람의 끝에 이별이 존재하게 되었는지 영화는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아니, 아예 장(Chapter) 자체를 생략해 버린다. 중간중간 비어버린 감정선을 묘사하되, 전체적인 원작의 흐름에 충실한 이 영화는 리가 앨러턴과 헤어지고 난 후, 그의 마음에 소용돌이치는 물결을 표현함으로써 작가인 윌리엄의 생애를 은유하는 동시에 앞으로 남아있을 리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 간접적으로 묘사한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영화의 막이 내린 후 계속해서 곱씹게 되는 궁금증은 "리와 앨러턴이 사랑을 했는가?" 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영화를 중점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사람마다 생각은 다를 수 있겠지만)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다만, 사랑은 그렇게 일관적이고 일반적인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관계에서 발목을 잡는다.

 

리는 앨러턴을 만나기 전까지 이 사람 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만나며 육체적인 관계를 갈구한다. 하룻밤을 보내기에 적합하지 않다 싶으면 다른 사람을 공략한다. 그에게 있어서 하룻밤을 보내는 행위는 육체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수단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상대에게 많은 공을 들이거나 투자해야 할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면 미련 없이 포기한다.

 

그러나 그는 앨러턴을 만난 이후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마치 오랜 시간 기다려 왔던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소년 같은 미소를 짓고 서툰 몸짓으로 자신의 마음을 온전하게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앨러턴이 한 발짝만 물러서도 일주일에 두 번만 다정하게 대해달라며 그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최소한의 애정을 갈구한다. 그 단조로운 말이 무색하게도, 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파헤치고 꺼내어 앨러턴를 이루는 모든 것에 대해 알고자 하는 사람이다. 말없이도 대화가 가능한 관계를 원했던 그는 상대방과 자신의 완전한 동화를 원했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텔레파시라는 비과학적인 방법을 찾아 광적으로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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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앨러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기저 속 "순응"과 "자립심"이라는 존재를 인식해야 한다. 그는 자신에게 반한 이후 계속해서 직진해 오는 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 앞에만 서면 서툴러지는 중년의 남성을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관찰한다. 앨러턴은 그를 이해하기 위해 (그리고 약간은 호기심으로) 전에 가본 적 없던 퀴어 클럽에 발을 들인다. 속내가 훤히 보이는 그와 기꺼이 어울리며 스스럼없이 그의 집에 드나든다. 이러한 행동은 리가 앨러턴이라는 사랑의 객체를 가지고 싶게 만드는 데 일조한다. 앨러턴은 리의 적극적인 감정 표현을 받아들이며 그의 제안에 대체로 따르는 듯한 행동을 보인다.

 

그러나 의욕 앞선 마음이 때로는 독이 된다. 리의 적극적인 애정 표현은 점차 과해지고 결국 앨러턴의 자립심을 건드린다. 홀로 서 있는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고, 자신과 하나가 되기를 기대한다.

 

“차갑고, 미끄럽고, 잡기 힘든 물고기”에 속하는 앨러턴은 길들여지기 쉬우면서도 자신을 잃고 싶지 않아 하는 인물이다. 구속에 익숙하면서도 자유를 추구한다. 이러한 모순은 동성애에 대한 자기 관찰과 얽매이며 터뜨려진다. 결국 자신이 퀴어가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그는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어 있다고 고백하며 두려움을 쏟아내는 것으로 두 사람의 결말을 예견한다.

 

*

 

영화를 보며 완벽하게 만족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예상하지 못한 전개로 이야기가 흘러갈 수도 있고, 좋아하던 배우의 분량이 적을 수도 있으며, 연기나 연출이 아쉽게만 느껴지기도 한다. 관람객 전부를 만족시키기엔 개개인의 취향이 너무나 다르다. 무엇보다도 두 시간을 웃도는 영화 속 의미 있게 다가오는 장면으로부터 체감되는 무게는 천차만별이다. 10점 만점이라는 숫자 하나로 전부를 평가하기에는 작품으로부터 느껴지는 시시각각의 감정이 뭉뚱그려지지 않나, 라고 생각해 왔다.

 

퀴어라는 영화가 나에게 다가오는 방식이 바로 그랬다. 분명 아쉬운 부분도 있고, 매끄럽지 않은 장면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지만 계속해서 알아 나가고 싶다. 객관적인 항목으로 평가하는 것보다 주관적인 시선에서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영화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얼버무린 감정들에 대하여 날 것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작품에는 매료되기 쉬웠다. 직관적인 제목처럼 퀴어하게 다가오는 작품에 한 번쯤 마음을 빼앗겨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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