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주기적으로 찾아보는 영상이 하나 있다. 길을 걷던 사람들이 하나둘 멈춰 서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따라 부르기 시작하는 플래시몹 영상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잠시 멈춰 서서 합창을 하는 부분을 보면서 이상한 부러움을 느꼈다. 몇 번을 다시 봐도 그 부러움의 정체를 정확히 말로 옮길 수 없었다. 그래서 계속 다시 보게 되는 것 같다.
지금 나는 외국어 학습 앱으로 300일째 접속 중이다. 2025년 하반기에 큰돈을 들여 프로 구독까지 끊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단어를 외우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다. 새 언어를 배울 때마다 단어를 외우거나 문법을 정확히 익히는 대신, 분위기와 문맥으로 대충 때려 맞히는 쪽을 택한다.
중학교 때 원디렉션 노래를 알아듣고 싶어서 영어를 손에 잡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언어 학습 방식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정확한 의미보다 느낌으로 먼저 들어가는 것. 점수로 보면 늘 어중간했지만, 사람의 말투와 분위기를 읽는 데는 그럭저럭 쓸 만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게 있다. 나는 '느낌으로 대충'을 선택해 온 사람인데, 동시에 늘 '원본 그대로'를 갈망해 왔다. 외국 소설을 한국어 번역으로 읽을 때마다,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새어 나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작가가 고른 단어, 문장의 리듬, 그 언어 특유의 농담—그런 것들이 번역을 거치며 100% 반영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참으로 아이러니인게 그 오리지널리티를 원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정확히 잡아내려는 노력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원본을 갖고 싶다는 마음과, 정확함을 향한 수고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같은 사람 안에 있다.
그런데 이건 모순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 번역이 필요 없는 상태다. 정확하게 옮겨진 의미가 아니라, 애초에 옮길 필요가 없는 직접성. 베토벤 가사를 따라 부르던 사람들이 가진 건 정확한 해석이 아니었다. 해석이라는 단계 자체가 없는 상태였다. 나는 그 상태를 갖고 싶다. 더 좋은 사전을 갖고 싶은 게 아니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런 상태를 가진 언어를 이미 하나 가지고 있다. 한국어다.
최근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원본의 느낌을 받고 싶어 했던 그 마음을, 어쩌면 외국 독자들도 한국어 텍스트 앞에서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평생 다른 언어 앞에서 느꼈던 거리감을, 이제 누군가는 한국어를 향해 느끼고 있다.
그럼 나는 정작 한국어를 그렇게 살고 있었을까. '슬프다'와 '애틋하다'를, '그리움'과 '아쉬움'을 구분해서 잘 쓰고 있었을까. 어쩌면 외국어 앞에서만 편법이었던 게 아니라, 모국어 앞에서도 줄곧 편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번역이 필요 없는 말을 이미 갖고 있으면서, 그 말을 제대로 쓰지 않고 있었다.
그 말의 의미는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게 아니다. 최초의 문자였던 수메르 설형문자도 본래는 곡식의 양을 적던 장부였을 뿐, 거기에 사랑이나 영웅담이라는 의미는 없었다. 그 의미는 그 기호가 아주 오래, 충분히 많은 사람 사이에서 쓰이는 동안 천천히 따라붙은 것이다. 한국어가 나에게 번역이 필요 없는 말인 것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그랬던 게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이 언어와 함께 쌓아온 시간이 만든 결과다. 나는 그 시간을 이미 갖고 있다. 다만 제대로 쓰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내가 진짜로 해야 할 일은 단어를 몇 개 더 외우는 게 아닐 수도 있다. 이미 가진 시간을 제대로 들여다보는 일이다. 한국어를 더 잘 쓴다는 건 정의를 더 정확히 아는 게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쌓여 있는 그 시간에 얼마나 깊이 들어가 있는가의 문제다. 외국어도 그 시간을 함께 하는 방법으로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