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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그러므로 인간답게 살아가리라 - 프랑켄슈타인 [영화]

『프랑켄슈타인(2025)』이 말하는 인간다움

by 백승원 에디터
2026.02.23 09:04

 

 

지난 2월 초, 전 세계 언론계가 충격에 빠졌다. 14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워싱턴포스트(WP)의 기자 300여 명이 집단 해고된, 이른바 ‘워싱턴포스트의 죽음’ 때문이다. AI 대전환의 물결은 전문직과 생산직을 가리지 않고 직업 생태계 전반을 위협하고 있다. 매일같이 희망퇴직 권고와 인력 감축 기사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이름만 대면 알 법한 대기업이 앞다투어 구조조정을 단행한다. 이제 “앞으로 뭐 해 먹고 살지?”라는 말은 습관적인 푸념보다 실존에 대한 고뇌에 가까워졌다. 데이터와 속도전에서 AI와 경쟁하는 것은 패배가 예견된 싸움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치화할 수 없는 탁월함, 즉 ‘인간다움’으로의 회귀다. 효율과 편의의 논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 오직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을 탈환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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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0월 넷플릭스에 공개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프랑켄슈타인(2025)』은 메리 셸리의 고전 『프랑켄슈타인(1818)』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구성한 영화다. 오스카상 후보에도 오른 이 작품은 공포심을 자극하는 고전적인 연출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된다는 것’의 본질을 조명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여전히 현시대를 관통하는 생명력 넘치는 ‘고전’이다.

 

 


1부: 괴물은 괴물을 낳는다


 

영화의 전반부는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결핍과 욕망에 집중한다. 어린 시절, 외과의사인 아버지로부터의 정서적 학대와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으로 빅터는 ‘죽음’에 집착한다. 생사(生死)란 본디 신의 영역이지만, 그는 ‘죽음’이라는 자연의 섭리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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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Netflix


 

오랜 연구와 실험 끝에 눈을 뜬 ‘그것(It)’을 보며 빅터는 환호한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한다. 피조물이 오직 한 단어, 자신의 이름인 ‘빅터’밖에 말하지 못하고, 그는 ‘그것’이 생명만 있을 뿐 지능은 없는 상태라 단정짓는다. 자신의 역작이라 믿었던 결과물이 기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을 보며 빅터는 ‘그것’을 외면하고, 핍박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괴물’이었다.

 

피조물에게는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신이 세상을 창조할 적에 인간에게 이름을 주고, 그 인간에게는 다른 피조물의 이름을 짓게 했다. 이름은 존재의 확립이자, 관계의 시작이다. 하지만 빅터는 그를 ‘괴물(Monster)’ 혹은 ‘그것(It)’이라 부를 뿐이다. 흔히 괴물의 이름을 ‘프랑켄슈타인’으로 착각하게 되는 아이러니는,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비극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분간 그 단어가 세상의 전부일 테니까요.

Perhaps for the time being that word means everything to him.

 

 

아이가 태어나 뱉는 첫 마디는 그 자체로 감동이다. 보통은 그 말이 ‘엄마, 아빠’다. 부모에게는 평생 기억에 남을 순간일 것이다. 그러나 빅터는 오로지 ‘빅터’만을 찾는 피조물을 보며 사랑이 아닌 혐오를 느낀다. 사랑받아 본 적 없는 빅터는 자기에게서 난 ‘그것’을 사랑할 수 없었다.

 


괴물은 형이야.

You are the monster.

 

 

괴물은 괴물을 낳았고, 괴물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세상에 던져진다.

 

 

 

2부: Forgive, Forget


 

영화의 2부는 피조물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빅터에게 버려진 괴물은 맹인인 노인과 그 가족의 집에 숨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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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Netflix

 

 

헛간에 좁은 틈새로 노인과 손녀의 대화를 엿들으며 그는 가족 간의 사랑과 언어를 습득하고, 점점 ‘사람’에 가까워진다. 무엇보다 그는 노인과 유대를 통해 비로소 ‘인간다움’에 다가선다. 눈이 보이지 않는 노인은 피조물의 외형적 추함이 아닌 그의 순수함을 알아보고 그의 친구가 된어준다. 자신을 버린 ‘빅터’를 향한 분노로 점철된 삶을 사는 그에게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용서하고, 잊는 것. 그게 진정한 지혜라네.

Forgive. Forget. The true measure of wisdom.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오두막을 급습한 늑대 무리로 인해 노인이 죽음을 맞이하자 피조물은 다시 끝없는 고독에 몸부림친다. 인간처럼 상처를 입고 고통을 느끼지만, 불행에서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인 ‘죽음’이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음을 한탄한다. 신은 인간을 창조하며 이름, 동반자, 그리고 삶의 목적을 주었다. 하지만 그는 빅터로부터 그 어느 것도 받지 못했다. 그러므로 자신이 겪는 이 추위를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었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의 원리


 

영화의 결말, 빅터와 피조물은 서로를 마주한다. 빅터는 피조물에게 죽음도 동반자도 줄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피조물을 처음으로 ‘아들’이라고 부른다. 괴물에서 ‘인간’된 피조물은 빅터를 용서한다고 고백한다.

 


우리도 이제야 인간이 될 수 있는 걸까?

Perhaps now, we can both be human.

 

 

사랑 받지 못해 깨어진 존재는 사랑으로 ‘사람’이 되었다. 『프랑켄슈타인(2025)』이 우리에게 전하는 인간다움이 바로 이것이다. 효율이 중시되는 세상에서 우리는 다시금 ‘Forgive, Forget’의 가치를 떠올려야 한다. 때로는 용서하고, 때로는 잊으며 살아가는 존재가 사람이다. 서로의 이름을 붙여주고 삶의 목적을 공유하는 동반자가 되는 것이 사람의 방식이다. 적자생존은 정확한 사람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적합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져도 부서져도, 그대로 인간답게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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