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나의 이름은 마리아>는 프랑스 배우 ‘마리아 슈나이더’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그녀는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1972년 작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로 어린 나이에 큰 명성을 얻지만, 그 이면에는 영화계 성폭력의 비참한 현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마리아 슈나이더의 이야기는 2024년에 ‘영화로’ 다시 태어나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걸까? 제목 ‘나의 이름은 마리아’ 또는 원제 ‘Being Maria’는 무엇을 폭로하고자 했을까? 혹은 그저 조용히 전하는 것일까.



크기변경[회전]리뷰 마리아.jpeg

 

 

마리아는 화려한 영화 세트장을 선망하는, 그리고 엄마와 둘이 사는 어린 딸로 처음 등장한다. 배우인 아빠가 일하는 촬영장에서 업계 사람들과 대화하며 설렘을 느끼는 한편, 새 가정을 꾸린 전남편을 찾아갔다는 사실을 엄청난 배신으로 느끼는 엄마. 마리아는 부모 둘 중 누구에게도 온전한 보호를 받지 못했다. 결국 집에서 쫓겨난 그녀는 아버지의 소속사를 찾아가고, 그렇게 절박한 마음으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런 마리아에게 첫 주연을 제안한 사람이 바로 베르톨루치 감독이었다. 적나라한 누드 신이 많은 대본이었지만, 그는 최대한 ‘예술적으로’ 표현할 것이니 개의치 말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마리아 역시 걱정보다는 열정이 앞서 훌륭하게 연기를 해나갔고, 연상의 상대 배우인 말론 브란도와도 동료로서 서로 생각을 나누며 교감하는 듯했다.

 

 

크기변경5.jpg

 

 

주위에서는 베르톨루치 감독이 포르노를 찍고 있다며 비난이 낭자했지만, 마리아는 자기 일에 자부심이 있었다. ‘예술’이며 ‘일’로서 누드와 성행위는 작품적 ‘장치’이자 ‘소재’일 뿐이기에 거리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 날 대본에 쓰여있지 않은 즉흥 연기가 감독과 남자 주인공의 합의 후에 강행되었고, 그녀의 울부짖음은 그대로 영화에 실렸다. 사과 한마디 없이 말이다.


영화는 선정성으로 고소까지 당했으나 감독과 말론은 온데간데없이 혐의를 피해 갔고, 마리아만 남았다. 직업적 자부심은 한순간에 박탈당했다. 이 사건은 그녀를 배우나 직업인이 아닌 섹스 심볼로 낙인찍어버렸고, 계속 좇았어야 마땅할 커리어적 성장은 뭣 모르던 시절의 꿈처럼 느껴진다.


페미니즘 논의에서 여성의 ‘대상화’ 혹은 ‘타자화’는 정확히 이런 방식의 폭력으로 드러난다. 남성 주체(감독과 남성 주연 배우)는 마리아를 협업하는 주체로 인식하지 않고 수동적인, 육체적 관능성을 가진 대상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그들의 인식 속에서 마리아의 주체성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기에 그녀의 모멸감과 수치는 신경 쓸 일이 못 된다. 마리아는 배우가 아니라 ‘예술’을 위해 이용 가능한 여성성의 오브제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영화 속 캐릭터인 마리아와 현실의 삶을 사는 마리아를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참으로 끔찍한 무의식이다.

 

 

크기변경2.jpg

 

 

 

들리지 않는


 

마리아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이후 좌절감에 사무쳐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슬픔은 수렁처럼 깊어 중독이란 이름으로 발 묶였다. 삼촌의 아파트에 찾아갔다가 스쿠터를 도난당했을 때, 그 슬픔은 터져 나와 오밤중의 아파트에 울려 퍼졌다. 시끄러운 소리에 베란다로 나온 남자들의 그늘진 형체는, 쳐다보지 말라고, 꺼지라고 난폭하게 외치는 마리아의 외침에 그 어떤 위협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 가만히 서 있다.


들리지 않는 것인지 듣지 않는 것인지 몰라도, 마리아의 고통은 아빠에게도, 같이 마약을 하는 남자에게도 전해지지 못했다. 인터뷰에서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버리자, 에이전트는 진실은 중요치 않다며 그녀를 꾸중한다. 아마 그래서, 그녀는 원수처럼 지내던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계 여성 직업인의 경험을 연구하고 있다며 찾아온 ‘누르’에게 마음을 열었을 것이다. 악쓰며 말하든, 서러워 말하든, 침묵하든, 그녀의 고통이 들리는 사람이 필요해서.


고통을 뚫고 나온 마리아는 카메라와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자신의 이름을 말한다. 우리는 듣는다. 이 사람의 이름은 ‘마리아 슈나이더’이구나. 이렇게 존재하기 – 지워지지 않고, 축소되지 않고, 살아남기 – 위해 많은 일을 겪었구나.

 

 

크기변경6.jpg

 

 

 

영화의 세계


 

영화는 바깥 세계란 없는 것처럼 그 속에서 벌어지지만, 결국 현실 세계에 보여지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은 영화가 시작되면 그 세계에 빠져들고, 극장의 불이 켜지자마자 현실로 돌아온다. 영화 현장 또한 현실 세계이며 실제 삶을 가진 사람들이 연기한다.


영화를 찍으면서 벌어진 사건이 삶을 뒤바꾼 마리아 슈나이더를 다시 한번 영화화한 이번 작품은, 영화가 허구와 현실에 동시에 존재하는 중층을 조명한다. 여러 층위에서 깔끔하게 분리되지 못한 지점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강제로) 캐릭터와 분리되지 못한 마리아. 대상화되는 여성 캐릭터들과 현실에서의 성폭력. 영화계 여성 인권 증진에 애썼던 마리아 슈나이더 2011년 별세, 할리우드 미투 운동이 시작된 2017년, 그리고 그녀의 삶이 스크린에 재현되는 2025년. 이 기간 영화 ‘산업’의 변화가 영화의 ‘주제’를 바꾸고 있는 것.

 

 

크기변경3.jpg

 

 

영화 <나의 이름은 마리아>는 11월 26일 극장에서 개봉한다.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