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나면 참담함이 턱 끝까지 차오르지만, 이 시리즈가 찬사를 받고 토론의 장에 오른다는 것은 너무도 반가운 일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소년의 시간(Adolescence)>은 같은 반 여학생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13세 소년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4부작 영국 드라마이다. <소년의 시간>은 국가를 불문하고 SNS를 매개로 남성 청소년 사이에서 빠르게 번지고 있는 인셀 문화를 다룬다.
#1. 인셀을 이해하는 것은 끔찍하지만 필수적이다.
‘인셀(Incel)’은 ‘비자발적 독신자(Involuntary Celibate)’를 뜻하는 용어이다. 원래 뜻은 연애나 성관계를 원하지만 할 수 없는 사람들을 가치중립적으로 이르는 말이지만, 지금 공유되고 있는 의미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인셀’이라는 말을 처음 들어본 사람이라면 아마 설명을 들어도 단번에 그것의 무게를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왜 이제야 알았을까 통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문제는 이미 무섭도록 커져 많은 여성을 죽였고 죽이고 있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인셀 문화는 확산한다. ‘결혼’이 여성의 인생에서 가장 큰 훈장이었던 시대와 달리, 이제는 여성도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평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연인 혹은 배우자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사회의 일반적인 정의이다. 인셀은 이러한 남성 권력의 상대적 박탈에 반발하면서 파생된 사회 현상으로 해석된다. 즉, 여성과의 교제에 실패한 남성들이 자신을 비하하고, 그 에너지가 여성혐오로 전환되어 데이트 제안을 거부하는 여성 또는 불특정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과 강력범죄까지 이어지는 흐름이다.
예를 들어, <소년의 시간>에서 언급된 ‘20:80 법칙’은 20%의 남성이 80%의 여성을 차지한다는 논리이다. 인셀은 자신을 20%에 들지 못하는 남성으로 규정하고 자기연민에 빠져 여성을 혐오하기 시작한다. 주인공인 제이미도 역시 이러한 인셀식 사고에 의해서 자신이 못생겼고, 그래서 여성들에게 인기가 없다고 확신했으며 그것이 모든 비극의 발단이 되었다.
요약하면 인셀 문화는 ‘왜곡된 남성성’, 다시 말해 ‘여성은 남성에 의해 통제된다’라는 가치관에서 비롯된 참극이다. 여성을 매혹하는 요소는 노력이나 성격 따위가 아니라 타고난 신체적 ‘남성성’을 부여받는 자들에게만 허용된다.
어떤 이유로든 상처받은 사람끼리 모여서 서로의 상처를 더욱 부추기는 것이 일종의 청소년 놀이 문화가 되었으니 여기서는 아무도 사랑받을 수도, 사랑할 수도 없다. 그들의 분노가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라는 당연한 명제조차 잊을 만큼 서로를 만나 부풀어 오른다는 것이, 그래서 죄 없는 사람이 자꾸만 죽어야 한다는 것이 나는 너무 슬프다.
#2. 아무리 따라가도 보이지 않는
<소년의 시간>은 원테이크 촬영 기법을 선택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각 회차가 하나의 컷으로만 이루어지고, 리얼타임으로 현장의 시간을 관객과 편집 없이 공유한다. 컷이 바뀌지 않아 우리는 영상을 보는 동안 계속 연기자들과 같은 시공간에 머무른다. 아무리 숨 막히고 버거워도 현실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
이렇게 쉼 없이 따라가 무언가를 보여주는 카메라에 나는 상당히 답답함을 느꼈다. 이것은 사건이 전개되는 속도와는 관련이 없다. 오히려 이야기에 아주 몰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답답함은 사건의 진실, 범행의 이유, 또는 문제의 해결이 종착지여야 할 이 서사에서, 카메라는 그것을 보여줄 수 있는 도구가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제이미라는 고작 열세 살의 어린 소년이 살인을 저지르게 된 배경에는 시공간이 없다. 조사실에서 아이를 심문해도, 학교를 찾아가도 볼 수 없는 ‘인터넷’이라는 세상 속 어딘가에 있다. 카메라는 모든 찰나에 인간과 인간이 같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소통하는 모습을 비추는데, 정작 우리가 찾는 것은 전혀 다른 세상에 있다.
그러니 한집에 사는 가족도 제이미가 누구인지 알 수 없고, 매일 학생과 교사가 모이는 학교에서도 케이티의 죽음을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 겉모습은 영락없이 평범한 소년인 제이미가 화면 너머 접한 무한한 이미지, 글은 다 어디에서 와서 어떻게 한 인간을 바꾸어놓은 걸까.
두 번째는 세대 격차에 관한 것이다. 극에서 주로 카메라가 뒤좇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기성세대이다. 경찰은 경찰의 방식으로, 심리 분석가는 심리학의 방식으로, 부모는 부모의 방식으로 문제에 다가간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이 사건의 근본을 마주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한 번도 겪어본 적도, 상상해 볼 수조차도 없는 살인의 동기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질문을 해본들, 케이티와 제이미는 친구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친하지 않았다는데, 인스타그램에서 둘이 나눈 댓글도 큰 의미 없어 보이는 이모티콘이 전부인데, 어떻게 그들이 제이미가 칼을 휘두른 이유를 찾을 수 있겠는가.
기성세대는 그들이 아는 세상 내에서 최대한 합리적인 추론을 하고 있다. 그들이 아는 세상 내에서 최대한 아이들을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건, 아이의 방에 컴퓨터를 들여놓은 순간, 아이의 손에 핸드폰을 쥐여준 순간 당신은 아이를 홀로 물가에 내놓았다는 것이다.
물가가 어디인지 모르는 이상, 이제 아이의 생존은 우리의 손 밖을 떠났다.
#3. 변명할 여지를 주지 않지만, 특정인을 비난하지도 않는다.
제작진의 인터뷰를 보면 이 시리즈는 쉬운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뭍으로 꺼내놓는 것이 목적이다. “이 소년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그들은 이것이 당신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의도적으로 캐릭터를 설정했다.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느끼도록 유도했다. 특히 그것은 제이미 엄마 아빠의 캐릭터성에서 두드러지는데, 그들은 결백한 동시에 책임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우리는 몰랐잖아” - 그렇긴 한데,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걸까.
이 시리즈가 우리 사회에 질문을 던지기에 탁월하다고 느껴지는 점은 바로 이러한 양면성에 있어서 절대 한쪽에 무게를 싣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이미가 살인을 저지른 흉악범이라는 사실은 명명백백하고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동시에 제이미를 사회에서 동떨어진 악마로 만들지도 않는다.
3부 심리분석가와의 상담에서 제이미는 일상적인 질문에 똑똑한 답변을 곧잘 한다. 웬만하면 누구도 그 아이를 문제아 취급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과 가까워지는 질문에 무심코 답변할 때, 남성 관리인에게는 꼬리를 내리지만, 여성 상담가에게는 버럭버럭 소리치며 욕설을 퍼붓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작은 몸에 잠재된 거대한 악을 서늘하게 직감한다.
문제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물질성을 잃음으로써, 훨씬 더 복잡하고 흐릿해진 우리 세대의 문제. 과연 함께 극복할 수 있을까?
글을 쓰는 동안 알 수 없이 엄습하는 두려움에 여러 번 눈물이 나려 했다. 오히려 영상을 볼 때보다도 더 현실을 직면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의제를 꺼내놓고, 자꾸만 얘기하고, 해결이 시급하다는 걸 이 세대를 살아가는 동료들이 의식하도록 노력해야만, 비로소 미지의 공포로부터 조금이나마 안도할 수 있지 않을까.
영국 사회와 정치계도 이에 반응하여 이미 많은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소년의 시간>이라는 시리즈의 성공을 눈물로 축하하고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