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당신에게 공부란 무엇인가? 살면서 공부와 참 긴 인연을 가지고 가는 것 같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삶의 모든 경험과 그에 대한 저마다의 탐구가 곧 공부라고 정의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학창 시절에는 또래 친구들이 대개 그렇듯 ‘공부하기 싫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정해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정해진 답을 도출해 내는 반복적인 일이 지겨웠던 것 같다. 그리고 대학에 와서는 ‘이런 게 공부구나’, ‘공부라는 걸 처음 해보는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스스로 문제의식을 느끼고 어떤 주제를 탐구함으로써 결론과 해결방안을 도출하는 과정은 그 전까지의 학습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공부는 항상 내게 고통과 즐거움을 동시에 선사한다. 알지 못하는 것을 알아가는 일은 힘겹지만, 내가 살아가는 세계의 부피를 확장했고 아직 알지 못하는 세계가 존재함을 확인시켰다. 그러나 공부를 왜 하냐고 묻는다면 이것이 그 답이 될 수는 없다. 공부는 분명 나의 지적 성장을 이끌지만, 지적 성장이 곧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공부로 이루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각자의 답이 있을 것이다.

 

여기, 공부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 부교수로 재임 중인 김승섭 교수는 공부를 하며 수많은 이들의 고통과 마주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병원에 오는 환자들의 고통을 보았고, 이 고통 뒤의 사회적 서사를 짐작하였다. 고통의 원인을 의학만으로 다룰 수는 없겠다고 판단한 그는 보건대학원으로 갔다. 그곳에서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 속에서 숨 쉬는 가려진 고통을 목도했다.


어느 외딴 무인도에 불이 나든, 운석이 떨어지든, 지진해일이 나든 그것은 없는 일이다. 아무도 알지 못하니까. 그런데 분명 우리 곁에 존재함에도, 아무도 듣지도 보지도 못해서 없는 일이 되어버리는 고통이 있다. 그의 공부는 그런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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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기가 되는 언어


 

고통받는 사람에게는 고통을 표현하고 설명할 언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내가 문지방에 발을 찧었을 때, 그 아픔을 꾹 참고 삼킨다면 나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바라기는 어렵다. 우선 ‘발’이라는 부위를 칭할 언어가 필요하고, 이후 지금 어떤 상황이며 얼마나 아픈지를 정확한 언어로 묘사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 언어가 사회적으로 편견이나 왜곡 없이 잘 공유되고 있어야만, 나의 고통은 비로소 응답받을 수 있다.


그러나 소수자일수록 기득권층에 비해 이러한 언어가 생성되고 재생산되기란 무척 어렵다. 저자가 이를 설명하기 위해 든 예시를 인용하자면, ‘오늘날 한국에서는 국가가 국민 일반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어떤 설문조사에도 참여자가 성소수자인지를 묻는 질문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성소수자와 그 가족들이 경험한 구체적 피해를 숫자로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제도적으로 막혀있다’.


고통의 표현을 억제하는 외부적 요인에 더해, 책의 내용에 따르면 소수자들은 자신의 소수자적 특성을 발화하는 것에 공포감을 느낀다. 이 침묵이 길어질 경우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고 결국 스스로를 혐오하는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다. 이러한 심리적 압박은 비포용적인 사회일수록 강한데, 사회적 평가에 대한 위협은 스트레스 호르몬을 크게 증가시키는 요인이어서 건강에도 명백한 위협을 준다 - 부조리한 사회의 약자는 내가 나라는 사실 자체가 두렵고 아프다.


 

지금 당장 구체적인 피해를 알 수 없다는 ‘근거의 부재’가 피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부재의 근거’일 수는 없다.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中)

 

 

언어의 부재는 고통을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데, 타인을 잘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막연한 공포나 우려로 인해 차별과 혐오는 더욱 강화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언어의 존재는 이 같은 어려움을 타파할 힘이 있다. 저자의 인터뷰로 책에 소개된 미국의 경제학자 리 배지트는 차별받는 집단이 스스로를 보호할 데이터를 얻는 것을 중요시했다. 예컨대 그녀는 1990년대 초 동성 커플의 사회보장과 관련된 법이 제안될 때마다 ‘추가 비용 부담’을 묻는 정치인들에게 반박하기 위한 데이터를 만들었다. 동성 결혼이 법제화되었을 경우 가족 합산을 통해 매겨지는 세율이나 결혼 전후 지출하는 비용 등을 고려하였을 때, 그녀가 연구한 거의 모든 주에서 동성결혼을 법제화하는 것이 재정적으로 이득이 되었다.


 

 

#2. 잘 모르지만 일단 혐오한다?


 

저자는 한국 사회의 ‘최소한의 자기검열과 긴장’이 부족한 상태에 대해 반복해서 지적한다. 그가 제시한 예시를 빌려보자. 2010~2014년 진행된 「세계가치조사」에는 “다른 인종의 사람이 이웃으로 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이에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답한 사람의 비율이 스웨덴에서는 2.8%, 미국에서는 5.6%, 그리고 한국에서는 34.1%였다. 물론 한국의 단일 민족적 역사를 생각하면 다른 나라에 비해 높은 비율을 보이는 것은 어느 정도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질문의 내용이 매우 일상적임을 고려했을 때, 한국 사람들은 인종차별적 성향을 보이는 것에 비교적 거리낌이 없어 보인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은 언제 어디에나 있다. 반면 잘 아는 것은 거의 없다. 특히나 정체성과 관련된 사회이슈들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그것에 다가서기 매우 어렵기 때문에 조심스럽고 다각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이러한 연구가 조금씩 진척되면서 시민의 의식 또한 나아가고, 다양한 사람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형성됨에 따라 서로를 더 잘 알아가며 수용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잘 알지 못하는 타인의 삶에 대해 너무 쉽게 돌을 던진다. 빠르게 혐오하고, 험하게 매도한다. 한국 미투 운동의 신호탄을 쐈던 서지현 검사 또한 책에 실린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고발했을 때 (피해자임에도) 온갖 시선과 말로 난도질당할 상황이 두려워 침묵했던 많은 여성들에게 당신의 용기에 대한 감사 인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럼 이제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주변 사람들을 삶을 끌어와보자. 당신의 친구가 미국에 이민을 갔는데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이웃에게 욕설을 들었다. 당신의 딸이 첫 직장에 들어가서 상사에게 성희롱을 당했지만 아무도 지지해 줄 사람이 없어 말을 못 한다. 동양인은 차별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가? 성희롱쯤이야 참고 넘어갈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답은 뻔하다. 아니면 혹시, “나는 인종차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성차별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거랑은 다른 문제야”라고 생각했는가?


아니다. 당신은 차별하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 모두는 잘 모르는 것에 대해, 혹은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것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고, 타인의 삶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고 배워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특권이며, 제 얼굴에 침 뱉기임을 명심하자.

 

 

 

#3. 각자의 고통


 

프랑스에서 1년을 살았던 동안 절실하게 느낀 점이 있다. - 차별과 혐오의 경험은 당사자만이 온전히 느낄 수 있으며, 소수자적 정체성은 중첩된다. 나와 나의 한국인 여성 친구들은 비슷한 경험을 공유했다. 길을 걷고 버스를 타는 일상적인 순간에 종종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당했다. ‘니하오’나 ‘칭챙총’ 같은 단어를 놀리듯 뱉은 뒤 낄낄대며 가는 일이 다반사였고, ‘캣콜링’이라고 부르는 길거리 성희롱을 수도 없이 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백인 여성에게도, 한국인 남성에게도 놀라운 사실이었다. 아직도 그런 일이 있냐며 놀라거나 자신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저자가 만난 영화 「공동정범」의 감독 김일란은 세월호 참사 146일의 기록으로 만든 집회 영상의 주제를 이렇게 밝힌다.

 

 

당신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고통에 연대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은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고 고통을 치유하고자 하는 움직임에 힘을 실어줄 수는 있지만, 그것이 내 것이 될 수는 없다. 더군다나 그 ‘당사자’들이란 모두가 개별적으로 다양한 면과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멋대로 상상한 피해자의 ‘피해자다움’에 그들을 끼워 맞추려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고 해도 각자가 느끼는 고통은 제각각의 것이다.


수많은 정체성 중 한 가지 정체성만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표하지 않아야 한다. 끝까지 - 세대를 거쳐서라도, 특정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겪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고 사회가 그것에 응답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그것이 충분히 이해되고 변화가 일어났을 때, 우리는 특정 성별, 특정 성적 지향, 특정 질병, 특정 인종 등이 아닌 하나의 복합적인 인간으로 바라봐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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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란, 이혁상 - 영화 '공동정범'

 

 

‘평등’을 이야기할 때, 의사결정권자에게서 ‘합리적으로 생각해서’라는 말을 지겹도록 듣는다.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유리하고 편리한 게 아닌지. 그 합리성에 경제적 이익 외의 다른 요소들도 충분히 고려하였는지. 경제적 이익을 계산할 때조차도 편견을 개입시키지는 않았는지. 과연 ‘누구에게’ 합리적인 것인지. 지금에야 당신에게 합리적이겠지만 언제 어떤 형태로든 권력이 전복되고 나면, 그때도 여전히 당신에게 합리적일지.


그리하여 이타성이 결국 진정한 합리성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다정함을 무기로 처절한 싸움을 한다. 전략적이고 냉정하고 때론 거칠더라도, 그 시작은 선함에 있다는 것이 우리를 나아가게 하였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세 가지 꼭지로 정리했지만, 연구하면서 김승섭 교수가 경험한 훨씬 더 풍부한 인사이트가 책에 있다. 아직은 잘 알지 못해서 임시방편으로서의 편견으로 누군가를 대하고 있다면, 이 책으로써 타인의 세계로의 공부를 시작해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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