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나 국가가 재난의 위험으로부터 구원해 줄 수 없다고 판단될 때, 개인들은 사적 사랑을 요나의 고래 뱃속으로 인식한다. 누가 우리를 구할 것인가? 사랑이 구할 것이다."¹ - 책 <사랑: 삶의 재발명>
국가로부터 버려진 사람들은 사랑을 택한다. 누군가는 비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국가는 사회적인 층위에, 사랑은 개인적인 층위에 속하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사회적 압박이나 현실이 달라지진 않는다.
이 진술을 거부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전태일이다. 전태일은 개인적인 사랑을 사회적인 층위로 끌어올렸다. 그의 사랑은 어머니와 여동생에서 여공으로, 여공에서 노동자 전체로 뻗어나갔고 결국 세상을 바꿨다.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의 삶을 다룬 음악극 <태일>을 ‘사랑’으로 해석해 본다.
의도된 거리감: ‘배우로서 발언하기’와 ‘목소리 외’
대학로 TOM 2관에서 5월 14일부터 7월 20일까지 공연되는 음악극 <태일>은 올해로 다섯 번째 시즌을 맞았다. 장우성 작가, 이선영 작곡가, 박소영 연출이 기획한 ‘목소리 프로젝트’의 첫 번째 작품인 극 <태일>은 음악 10곡으로 구성돼 있으며, 전태일의 삶을 시간순으로 따라간다. 음악 <내일이 되면>에선 어머니와 여동생을 먹여 살릴 생각이 신이 난 어린 시절을, <바보회>에선 평화시장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는 청년 시절을, <내일이 되면 Rep>에선 분신 직전의 순간을 보여준다.
음악 사이엔 배우가 ‘배우’로서 발언하는 시간이 있다. 배우들은 관객에게 전태일을 얼마나 아는지 묻고, 자신을 나아가게 하는 동력을 소개한다. 극을 보는 내내 고민했다. 왜 이런 불리한 선택을 했을까, 왜 관객의 몰입 대신 거리감을 취했을까. 고민은 ‘어쩌면 이 거리감을 의도했을 수도 있겠다’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극본과 조명과 음향으로 몰입을 유도하는 허구의 이야기와 달리 전태일의 삶은 역사적 사실이다. 의도된 거리감은 관객이 극 <태일>을 단순히 이야기로 치부하지 않도록, 타자화에 기반한 카타르시스를 조금이라도 지연하도록 한다. 배우들은 관객의 몰입을 위해 자신을 지우는 존재가 아니라 관객과 함께 전태일을 알아가는 일원이 된다. 의도된 거리감은 관객과 배우가 계속 멀어지도록, 질문하도록, 생각하도록 한다.
이런 시도는 ‘목소리 외’라는 배역에서도 엿보인다. 극 <태일>은 배역을 ‘목소리’와 ‘목소리 외’로 구분한다. ‘목소리’는 태일을, ‘목소리 외’는 태일의 여동생, 엄마, 아빠, 여공, 동료, 공장주 등을 두루 연기한다. 한 인물이 다른 인물을 함께 연기했을 때 관객은 몰입에 방해를 받는다. 그러나 인물을 추가하면 극의 목적인 태일의 목소리까지 분산될 수 있다. ‘목소리 외’는 관객이 태일의 목소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하면서도 한 인물을 악인과 선인으로 구분하는 것을 방지한다.
개인에 대한 사랑에서 연대로
기존 무대가 대통령 선거 포스터와 옛날 간판 등으로 시대적 배경을 드러내려 했다면, 이번 무대는 시대성을 최소화했다. 따뜻한 색조의 목조 기둥과 작은 액자들이 무대를 가득 채우고 허공엔 글이 빼곡하게 쓰인 종이가 걸려 있다.
무대는 크게 왼편, 중앙, 오른편으로 구분된다. 왼편엔 볏짚이 들어갈 듯한 낡은 궤짝들이, 중앙엔 의자와 책상 세트 2개가, 오른쪽엔 사다리가 놓여 있다. 무대 왼편은 전태일의 과거와 어린 시절의 전부였던 그의 어머니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머니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첫날밤 숨어든 사과 궤짝, 간신히 만난 어머니와 함께 잠드는 마루는 모두 무대 왼편에 마련돼 있다.
극 중 시간이 흐르면서 무대 사용은 중앙과 오른편으로 넘어간다. 무대 중앙에서 전태일은 평화시장 공장에 취업해 “빨리” 일하고, 노동권 향상을 위해 “바보회”를 조직한다. 전태일은 노동자로서 하루에도 몇 시간씩 앉아 있던 “의자”를 밟고 일어서서 “우리는 바보다, 바보들의 모임”이라고 선언한다. 노동 현장이 개선되지 않는데도 바보처럼 일만 하던 처지를 자조하며, 앞으로는 기꺼이 바보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무대 오른편은 전태일과 여공들의 교류가 자주 일어나는 공간이자 공장주 및 근로감독관과의 갈등이 두드러지는 곳이다. 무대 왼편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향했던 사랑은 무대 오른편에서 여공에 대한 공감과 연대로 연결된다. 개인을 향한 사랑은 개인을 억압하는 사회를 향한 분노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책 <가짜 사랑 권하는 사회>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예시로 이를 설명한다. “로미오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었다고 가정해보자. 만일 줄리엣이 로미오를 정말 사랑했다면 그녀는 그가 간절히 원했던 독립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이를 악물고 슬픔을 이겨내며 독립운동을 했을 것이다.”²
전태일은 어머니를, 여동생을, 여공들을, 노동자들을 너무 사랑했다. 그는 그들이 행복하길 바랐지만 사회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억압했다. 그래서 그는 선택했다. 분신으로서 사회에 항거하기로.
접속사 “그렇지만”의 힘: 촛불
“그렇지만 누가 그것을 알아준단 말이냐. 그렇지만 누가 함께 가자고 한단 말이냐. 그렇지만 누가 내 곁에 있단 말이냐.”(음악극 <태일>, 음악 <그렇지만>) 전태일은 알고 있었다. 온몸을 던져도 세상이 바뀌지 않을 수 있고, 함께 하려는 사람이 없을 수 있다는 것. “그렇지만” 그는 가기로 했다. 혼자서라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겠지만 기어코 행하는 마음을 우리는 ‘선‘이라고 부른다.
선은 궁금하게 만든다. 악은 궁금하게 하지 않는다. 악의 형태는 단순하니까. 반면 선의 형태는 다양하다. 하루 종일 일한 돈으로 풀빵을 사서 여공들에게 건네주는 것, 교통비가 없어 4시간 30분 동안 집으로 걸어가는 것, 걸리면 해고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평화시장 곳곳에 설문조사 종이를 돌리고 그 결과를 신문에 내는 것. 우리는 그의 행위를 보면서 묻게 된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대체 어떤 마음이 그를 움직이게 한 거지?
그럼에도 전태일을 ‘선한 사람’으로 부르기가 망설여지는 것은, 그의 행위가 ‘선’으로만 납작하게 해석되는 것이 우려돼서다. 우리 사회에서 선하다는 말은 순응과 비슷하게 해석된다. 책 <전태일 평전>의 저자 조영래는 “우리 사회에서 ‘선량’하고 ‘성실’한 사람일수록, ‘열심히 일해서 주인의 은혜에 보답하고’라는 식의 생각을 품기 쉽다”고 언급했다.³
나는 전태일을 보며 ‘선의 전복’을 떠올린다. 선은 악보다 다양하다. 선은 악보다 궁금하게 만든다. 선은 결국 타인을 살린다. 선은 맹목적이고 바보 같은 무언가가 아니라, 얼마나 외롭고 힘들지를 알지만 그럼에도 가야 한다고 믿는 용기에서 나온다.
사람들이 교과서에서 보고 기억하는 전태일의 모습은 강렬하다. 그 강렬한 장면을 시각적·청각적으로 재현했다면 관객들은 더 몰입하며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음악극 <태일>은 분신 장면을 과감하게 생략했다. 기름을 뿌리는 장면도, 라이터를 켜기 전 망설이는 장면도, 몸이 타오르는 장면도 연출하지 않는다. 대신 무대는 암전되고, 무대 위에 놓인 촛불들만이 고요히 빛난다. 촛불은 전태일의 몸과 함께 관객 한 명 한 명의 마음속에 피어난 분노와 소망을 연상시킨다.
음악 <내일이 되면>에서 여동생의 손을 잡고 “내일이 되면 괜찮아질 거야”라며 웃던 전태일은 “다녀올게!”라고 외치며 가운데 공간으로 사라진다. 같은 넘버가 리프라이즈됐을 때, 분신을 다짐한 전태일은 똑같은 공간으로 걸어 나간다. 내일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다녀오겠다는 말은 끝내 하지 못했지만.
객석에 남겨진 우리는 시대성이 짙지 않은, 현대와 비슷한 무대를 보며 생각한다. 우리는 전태일이 바라던 내일을 살고 있는가?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전태일이 보여준 선의 행위가 다양했듯, 무대 위 촛불 하나하나가 바람에 흔들리고 어둠을 밝히는 방식이 달랐듯 우리의 내일은 각각 다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만 가야 한다”고 다짐하던 목소리, 그가 보여준 선의 다양성과 전복만큼은 잊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그의 사랑까지도.
참고 문헌
¹ 임지연. (2021). 사랑: 삶의 재발명. 은행나무.
² 김태형. (2023). 가짜 사랑 권하는 사회: 진짜 사랑을 잊은 한국 사회, 더 나은 미래로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갈매나무.
³ 조영래. (2020). 전태일 평전 (개정판). 아름다운전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