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이집트 '왕가의계곡' KV60 무덤에서 미라 2개가 발견됐다.
제18왕조 제5대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 그 옆에 잠들어 있는 한 여성.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됐다.
여성 파라오의 삶을 다룬 뮤지컬 <하트셉수트>가 지난 11일 막을 올렸다. '고대 이집트'라는 신선한 배경에 '여성 2인극'이 더해져 관객들의 기대를 한껏 높였다. 그런데, 하트셉수트? 한 번에 외우기엔 영 어려운 이름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알겠는데, 왠지 낯설기도 하고.
그럴 만하다. 그의 업적과 흔적은 의도적으로 훼손됐으니까. 그것도 아주 계획적으로. 이집트를 60년 넘게 연구한 학자 크리스티안 데로슈 노블쿠르는 이렇게 말한다. “신전 내에서 발견된 그녀의 부조나 석당들이 집요하게 망치질로 훼손되어 있거나 산산조각 부서져 있었다."
우리에겐 낯선 이름, 그러나 극을 본 후엔 자연스럽게 호명할 수 있는 이름.
이집트 학자 크리스티안 데로슈 노블쿠르의 책 <미스터리의 이집트 여왕, 하트셉수트>로 뮤지컬 <하트셉수트>를 풍부하게 살펴본다.
모두 보아라, 내가 이뤄낼지니. 다시 시작되는 황금빛 이집트!
이집트 왕비 아흐모세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보자마자 소리쳤다. “하트셉수트!” 고귀한 여인 중 으뜸이라는 뜻이다. 사람은 이름대로 산다고 하지 않던가. 아이는 고귀함의 끝인 파라오의 자리에 올랐다. 휘황찬란한 금빛 장신구를 달고 깃이 기다랗게 늘어진 흰옷을 입은 여성이 무대에 등장하니, 그 모습이 영락없는 파라오다. 전쟁과 기근으로 황폐해진 시대, 이집트 왕위에 오른 그는 선언한다. "모두 보아라, 내가 이뤄낼지니. 다시 시작되는 황금빛 이집트."
하트셉수트는 실제로 '황금빛 이집트'를 이뤄냈다. 20년 넘게 평화를 유지했고, 원정 무역의 길을 다시 열었다. 이집트 학자들은 하트셉수트 재위 기간을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번영했던 시기'로도 평가한다. 눈부신 명성과 달리 무대 위 하트셉수트는 불안해 보인다. 더 큰 무덤을, 더 큰 건축물을 원한다.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지켜줄 충신 한 명을 원한다. 마침 검술 대회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하트셉수트는 그에게 이름을 묻는다. 신원 미상의 여성은 이렇게 답한다. "아문"이라고.
아문. 이집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아문은 "숨겨진"이라는 뜻을 가진 바람의 신으로, 천 년 동안 숭배돼 '신들의 왕'이라고도 불린다. 극에서 강조되진 않았지만 그의 이름을 들은 하트셉수트는 다소 놀랐을 것이다. 하트셉수트의 또 다른 이름 '케네메트문'이 '아문과 한 몸이 된 여인'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트셉수트는 왕위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아문 신화를 지어내기도 했다. 본인은 아문과 왕비의 딸이므로 파라오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신하 될 자의 이름이, 나와 한 몸이 된 신의 이름이라니. 아문은 이를 알고 있었을 테다. 오히려 알기에 이 전복적인 이름을 자랑스레 말했을 것이다. 그는 하트셉수트를 죽이러 왔기 때문이다.
그의 진짜 이름은 아문이 아니다. 그의 진짜 이름은 '조', 하트셉수트 부모가 일으킨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그는 길거리를 떠돌며 검술을 배웠다. 마침내 하트셉수트 앞에 섰을 때, 자신을 '아문'이라 소개하는 행위는 도발이자 선언에 가깝다. 아문은 진정한 복수를 위해 우선 하트셉수트를 지키기로 마음먹는다. 하트셉수트는 자신을 지키는 아문과 함께 '푼트'와 교류하러 떠난다. 푼트는 소위 '신의 땅'이라고 불리는 나라로, 하트셉수트는 실제로 어릴 때부터 이 땅을 간절히 바라왔다고 한다. 종교, 장례 의식에서 쓰이는 유향, 물약, 향료 등이 이 땅에서 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트셉수트는 아문에게 이 땅과 관련된 권한을 주겠다고 한다. 정체를 들킨 걸까? 아니, 정체를 알았다면 대체 왜?
그때, 엄청난 화살들이 둘을 덮친다.
아문은 생각했을 것이다. 하트셉수트를 죽이려면 지금이 기회라고.
겨눈다 날카로운 칼끝을
겨눈다 날 지키는 널 위해
- 뮤지컬 <하트셉수트> 넘버 '겨눈다' 중
날카로운 칼끝은 적을 향하고 있을까, 서로를 향하고 있을까.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아문은 과연 하트셉수트를 지키게 될까, 죽이게 될까.
실제 하트셉수트, 뮤지컬 속 하트셉수트
뮤지컬 <하트셉수트>는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와 함께 묻힌 여성이 누구일까'라는 흥미로운 질문에서 시작됐다. 철저한 고증보단 비밀과 상상의 영역에 집중했다. '신원미상 여성'의 정체가 그렇다. 무덤에서 하트셉수트와 함께 묻힌 여성은 사실 하트셉수트의 유모였다. 그의 이름은 사트레로, '위대한 유모'라고 불렸다. 하트셉수트는 즉위하자마자 그의 조각상을 만들었고. 그 조각상엔 "두 나라의 여주인을 키워낸 위대한 유모 영혼"이라 적혀 있었다. 뮤지컬 <하트셉수트>는 '유모'라는 철저한 고증보단 '아문'이라는 비밀과 상상의 여성을 택했다.
아문은 실제 인물 세넨무트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세넨무트는 평생 하트셉수트에 충성한 인물이다. 하트셉수트의 장례 신전(장제전)을 총괄한 건축가, 국가 및 재판 운영을 조언하는 관리, 하트셉수트의 딸을 교육하는 가정교사였다. 당시 이집트 사람들은 사춘기 시기에 결혼했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으며, 무덤 내부엔 하트셉수트와 세넨무트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는 방도 있었다. 하트셉수트에겐 죽은 남편이 있었기에 둘의 관계가 공식적으로 묘사되진 않았지만, 크리스티안은 둘 사이에 아이가 있었으리라고도 추측하고 있다.
이쯤에서 묻게 된다. 하트셉수트는 왜 실제에선 세넨무트, 극에선 아문 같은 충신을 찾아야만 했을까? '파라오'라는 절대 권력을 손에 넣고도. 힌트는 하트셉수트의 즉위 과정에 있다. 하트셉수트는 이집트를 '혼자' 다스리지 않았다. 의붓아들인 투트모세 3세와 공동 파라오로서 이집트를 다스렸다. 투트모세 3세가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하트셉수트가 섭정의 형태가 아닌 완전한 파라오로 서길 원했는진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데에 필사적이었는진 알 수 있다. 이 절실함은 극에서 더 두드러진다. 극에서 하트셉수트는 무려 동생(극중에선 투트모세 2세)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다. 그러니 압박감을 견디기 어려울 수밖에.
'고대 이집트'를 구현하는 '2인극'?
책 <미스터리의 이집트 여왕, 하트셉수트>(2004)와 뮤지컬 <하트셉수트>(2025)는 대화를 주고받으며 3400여 년 전의 하트셉수트를 재현한다. 뮤지컬에서 풀리지 않던 의문은 책에서 풀렸고, 책은 뮤지컬을 더 입체적으로 만들었다. 다시 말하면, 500쪽이 넘는 책을 읽고 나서야 뮤지컬을 끝까지 봤을 때의 시원함이 찾아왔다. 기대만큼 아쉬움이 커서였을까?
뮤지컬 <하트셉수트>의 핵심 특성은 '고대 이집트'와 '2인극'이다. 이 핵심 특성이 매력으로 기능할 때 관객은 "좋은 극을 봤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극은 오히려 각각의 특성이 꼭 필요했는지 묻게 된다.
첫째, 고대 이집트 배경이 필요했나? 관객들은 한국 배경에선 보지 못하는 이집트의 모습을 기대했을 것이다. 의상과 무대는 기대에 부응하려 최선을 다했다. 위엄 있는 파라오의 의상도, 검을 쓰는 데에 적합한 아문의 의상도 인상적이었다. 이집트풍 기둥, 도자기, 검, 활 등 하나하나에 공을 들인 무대도 마찬가지였다. 이집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넘버가 없어 아쉬웠지만 전달력을 위해서였다면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고대 이집트여야만 가능하냐고 물으면 고개를 젓게 된다. 하트셉수트는 '이집트'에서 흔치 않은 '여성 파라오'다. 관객은 미디어에서 많이 재현돼 온 군주와는 다른 모습을, 그만의 특별한 사연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극은 ‘여성 파라오’라는 특수성 대신 자기 편이 없어 불안해하는 보편적인 군주의 모습에 집중했다. 가짜인 채로 살아가고 있다며 괴로워하는 이유도 알기 어렵다. 하트셉수트가 가면을 쓰게 만드는 존재가 무대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파라오의 면모보다 기록 훼손에 집중하고 싶었다면, 누가 그의 기록을 해치려 했는지가 드러나야 했다. 기록을 없애려는 자가 없는 무대 위에서 외치는 '기록되지 않는 사랑'은 공허하게만 들린다. 이 아쉬움은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둘째, 2인극이어야만 했나? 이 극은 하트셉수트의 괴로움을 전제로 한다. 그의 괴로움을 납득해야만 하트셉수트가 왜 아문을 포섭하려 하는지, 왜 큰 무덤을 세우려 하는지, 왜 아문에게 푼트를 주려 하는지, 왜 어떤 사랑은 기록되지 않는다고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정작 무대엔 하트셉수트를 괴롭게 만드는 인물이 없다. 하트셉수트의 기록을 없애려 하는 인물도, 하트셉수트와 아문을 위협하는 인물도 나오지 않는다. 하트셉수트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 찬미하는 신하도 없으니 극중 하트셉수트의 위엄이 덜 느껴진다. 정리하면, '하트셉수트를 하트셉수트답게' 만드는 인물이 없다. 그러니 관객은 '하트셉수트가 힘들구나', '나중엔 기록이 없어졌구나' 하고 머릿속으로만 이해할 뿐이다.
물론 반드시 적이 무대에 나와야 하는 건 아니다. 뮤지컬 <하트셉수트>는 죽은 동생을 상징하는 조명과 시도 때도 없이 하트셉수트를 괴롭히는 음악으로 그 빈자리를 채우려 했다. 하트셉수트와 아문을 서로의 적으로 상정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둘의 갈등은 과거 이야기가 풀리면서 맥없이 해소된다. 납작한 악인이 등장한다면 오히려 사양이지만, 실제 하트셉수트의 여동생이나 여성 하인들이 등장해 둘 사이의 감정을 고조시킨다면 어땠을까. 인물을 추가하기 어려웠다면 인형극, 오브제, 그림자극,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같은 시도를 해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한편 이 극은 2인극의 핵심을 보여주기도 한다. 바로 배우다. 2인극에서 배우의 역할은 상상 이상으로 극대화된다. 화려한 검술과 노래에 더해진 연기는 다소 급한 서사에 개연성을 부여했다. 그러니 더 묻게 된다. 당신들이 보여주고 싶은, 우리가 보고 싶은 하트셉수트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지, 여기서 더 나아갈 지점이 있지는 않은지.
<하트셉수트> 배우와 관객을 모두 매료한 문장은 하나다. "이집트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 옆에 함께 죽은 신원미상의 여성은 누구일까?" 한 줄만으로 상상력을 자극하는 질문을 가진 것은 특권이다. 그러니 아쉬워 하면서도 하트셉수트와 아문의 이야기를 상상해보고, 온종일 노래를 돌려 듣고, 한 번 더 보자며 예매 사이트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쯤에서 감히 기대해본다. 뮤지컬 <브론테>가 뮤지컬 <웨이스티드>에서 또 다른 브론테를 만들어냈듯, 이 하트셉수트가 또 다른 하트셉수트를 만들어주길, 그 둘이 만나는 지점에서 모두가 각자만의 하트셉수트를 품을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