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항 위, 물고기 밥을 뿌린다.
커피잔 위, 설탕을 뿌린다.
다방 바닥 위, 유골을 뿌린다.
모든 것은 하락한다. 위에서 아래로. 중력에 의해서.
모든 것은 흘러간다. 과거는 현재로, 현재는 미래로.
향이 타면 재가 떨어지듯이.
그런데 이 이야기는 현재에서 과거로 흘러간다. 일반적인 진행 방향을 거스른다. 향이 타면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듯이. 그 모습은 중력과는 아주 무관해 보인다. 중력을 거스르는 이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기억이다. 개인 안에서 기억은 중력을 거스르는 힘을 갖고 있다. 연기를 허공으로 끌어올리는 그 힘을 과학계에선 부력이라고 부른다. 향이 불에 타면 주변 공기의 밀도가 낮아지고, 공기보다 가벼워진 연기는 위로 올라간다.
이 극은 그러니까 부력의 이야기다. 중력보다도 큰 힘을 갖고 있는 기억의 이야기.
2014년 2인극 페스티벌에서 시작된 연극 <흑백다방>이 올해 젠더프리 캐스팅으로 돌아왔다. 원래 2월 11일부터 3월 2일까지 한 달 남짓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3월 30일까지 공연 기간이 연장됐다. 한국, 미국, 일본 등에서 이미 500회 이상 공연됐고 올해 연장 공연까지 결정됐으니 <흑백다방>이 웰메이드 연극이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쯤에서 묻게 된다. 우리는 어떤 연극을 웰메이드라고 칭하는지.
관객이 어두운 극장에서 나와 거리를 걸을 때 ‘이게 연극이구나’라고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자신이 속한 곳의 본질을 꿰뚫는, '그것'으로서 '그것이 담긴 큰 세계'를 보여주는 작품. 애초에 우린 그것을 좁게는 문학, 넓게는 예술이라 부르지 않았던가.
부드러운 조명, 안락한 의자, 창문에 드리운 커튼,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U.S Information Agency, 1968). 흑백다방은 미국 공보처의 보고서 「다방-한국의 사교장」처럼 꾸며져 있다. 1980년대 느낌을 그대로 살렸다는 이곳엔 다방 주인과 손님, 딱 둘만 존재한다. 손님이 LP 커버를 보고 음악 길이와 원작 작품을 족족 맞히자 다방 주인은 가볍게 묻는다. "되게 잘 아시네요, 다 외우셨나 봐요." 손님은 답한다. 다소 서늘하게.
“기억해야죠, 80년대는.”
이 대사를 기점으로 연극은 사이드브레이크를 풀고 맹렬하게 돌진한다. 1980년대를 경유해 지금, 2025년까지 오기 위해서.
기다리는 사람, 믿어진 적 없는 사람
책 <도시와 예술의 풍속화, 다방>에서 저자 김윤식은 “다방에 대해 쓰라는 것은 곧 그 시절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방은 그 시대의 사람을 설명하기에 아주 적절하다. 소파에 깊숙이 파묻혀 음악을 듣는 사람, 침을 튀기며 문학과 예술을 논하는 사람, 첫 미팅에 나와 뚝딱거리는 사람처럼.
그중 제일은 기다리는 사람이다. 언제 올지 모를 전화 한 통을, 오기로 한 사람을, 오길 바라는 사람을. 극 중 다방 주인도 공연 10분 전부터 무대에 나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거울을 보면서.
그때 한 손님이 문을 두드린다. 아주 세게, 여러 번. 평화로운 다방에 균열을 내면서.
손님이 다방 문을 쾅쾅 두드리다가 허겁지겁 들어올 때, 비에 쫄딱 젖은 우비도 벗지 않고 의자에 앉을 때, 등산용 가방을 꼭 끌어안을 때, “프림이 건강에 안 좋대요”라는 다방 주인의 말에 "예?"라고 크게 물었을 때, 우리는 손님이 어쩌다 저런 태도를 갖게 됐는지 묻게 된다. 다방 주인은 말한다. 긴장을 풀라고. 그는 마음의 상자를 가져와 양초, 담배, 향을 차례로 꺼낸다. 양초를 고르면 함께 불을 붙일 거고, 담배를 고르면 함께 피울 거고, 향을 고르면 함께 불을 붙여 피울 거라고. 서로를 믿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고.
손님은 답한다. 양초는 촛농을 흘려보낼 것 같아서 싫고, 담배는 담배 빵을 놓을 것 같아서 싫고, 향으로 하자고. 그러더니 다시 묻는다.
"향이 다 타면 우리 사이에 신뢰가 쌓이나요?"
주인은 손님에게 자신을 믿으라고 한다. 손님은 그런 주인을 믿지 않는다. 주인이 자신을 믿는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는다. 저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자꾸 믿는다고 하시니까, 뭘 믿는다고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한다. 이때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손님은 주인을 믿었다가 다칠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주인이 자신을 믿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한다. 믿어지지 못했던 사람처럼. 신뢰 받아본 적 없는 사람처럼.
다방에서 사람 죽는 거 봤어?
신뢰는 기대만큼 행동하리라는 기대에서 나온다. 기대가 있어야 신뢰가 생긴다. 기대가 없으면 신뢰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까 “신뢰는 의지에서 생"긴다. 누구를 얼마나 믿을 것인지, 그 믿음에 얼마나 부응할 것인지의 문제니까. 이때 ‘누구를 얼마나 믿느냐’에서 ‘누구’에 들어가는 주체는 한정적이다. 우리는 "당신은 국가기관(국회, 정부 등)을 얼마나 신뢰하십니까?"라는 질문엔 익숙하지만 정작 국가기관에겐 물어본 적 없다. 국민을 얼마나 믿느냐고. 믿으면 왜 믿느냐고, 믿지 않으면 왜 안 믿느냐고 따져 물어본 적 없다. 극 배경인 1980년대에 국가기관은 국민을 믿지 않았다. 하지 않았다는 말, 했다는 말 모두.
손님은 믿어지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의 독재 정치에 항의해 벌어진 도서관 방화 사건의 주동자로 지목됐고, 계속 부인했지만 형사에게 뺨을 아주 세게, 여러 번 맞아 청력을 잃었다. 손님을 믿지 않은 첫 번째 사람은 다방 주인이었다. 손님은 울부짖는다. 왜 자기를 안 믿어줬냐고. 손님이 다방 바닥에 유골을 뿌리려고 하자 주인은 손님을 다급하게 붙잡으며 말한다.
너 그런 애 아니잖아, 그때도 불 지른 적 없잖아.
둘 중 하나는 죽어야 이 고통이 끝난다며 달려드는 손님에게 주인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 여기선 아무도 안 죽는다고, 다방은 사람과 사람이 이야기하는 곳이니까. 또 다른 국가기관인 경찰에게 믿어지지 못했을 때 손님은 소리친다. 제발 좀, 꼭 좀 믿어달라고. 손님은 다방 주인에게 커피를 쏟으려다가 그만두고 자신에게 뿌린다. 다방 주인은 맞지 못한 커피를 그대로 자신에게 뿌린다. 이때 우리는 깨닫는다. 믿어줄 사람은 서로밖에 없다고, 개인과 개인밖에 없다고.
소리 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
모든 것을 토해낸 손님이 LP판에 손을 갖다 대자 고요하던 다방에 노래가 흘러나온다. 1980년대의 손님이 친구들과 함께 즐겨 들었던 그 노래, 흑백다방에서도 계속 나오고 있었지만 관객도 듣지 못했던 노래.
너무 진하지 않은 향기를 담고
진한 갈색 탁자에 다소곳이
말을 건네기도 어색하게
너는 너무도 조용히 지키고 있구나.
너를 만지면 손끝이 따뜻해
온몸에 너의 열기가 퍼져
소리 없는 정이 내게로 흐른다.
- 노고지리 '찻잔'
책 <가비에서 카페라떼까지>에 따르면 1980년대에 찻잔은 그리움의 상징이었는데, 노고지리의 ‘찻잔’ 가사가 대표적이었다. 산울림 김창완이 작곡한 '찻잔'은 “시내의 한 다방 창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여인의 쓸쓸한 모습을 연상하여 만"들어졌다. 실제 무대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다방 주인이었지만 이 순간을 기다려 온 사람은 오히려 손님 아니었을까.
1955년 인수 전 흑백다방의 상호가 ‘칼멘다방’이었다는 사실은 어쩐지 의미심장하다. 칼멘, 다시 말해 카르멘은 라틴어로 노래 혹은 시를 뜻한다. 둘을 1980년대에 붙들어 놓는 것, 지켜보는 관객을 80년대로 데리고 가는 것 역시 노래 아닌가. 실제 흑백다방은 2009년에 폐업했고 현재 문화예술 행사를 여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사람과 사람이 이야기하는" 다방이 없어진 지금, 우리에겐 그럴 공간이 필요하지 않아진 걸까? 아니면 필요한데도 없어진 비극에 이른 걸까?
다방이 아니었다면 이 이야기는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방이 아니면 향을 피울 수 없고 다방이 아니면 마주 볼 수 없고 원하는 노래를 틀 수 없으니까. 무엇보다 진득하게 서로만을 보고 마주 앉을 수 없으니까.
진득함, 너의 이야기가 다 흘러나올 때까지 이 시간을 멈추지 않겠다는 끈질김. 우리는 그러기 위해 연극을 본다. 돈을 내고서라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당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배우와 관객이 서로 주고받은 기억은 또 다시 새로운 부력이 되어 중력을 기꺼이 이겨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