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은 누구나 쓸 수 있지만 글로 돈을 버는 건 선택된 소수만의 일이라는 생각이 종종 든다. 그럴 때면 글이 야속해진다. 시작에 있어서 모두에게 인자한 미소로 너른 품을 열어 주지만 그 뒤부터는 자신의 몫이라며 차가운 얼굴을 내보이는 것 같다. 물론 세상에 그렇지 않은 일이 어디 있으랴 싶지만, 꼭 글로 먹고 살아야 하나 싶지만, 좋아하면 잘하고 싶어지는 법이고 잘하고 싶어지면 욕심이 나는 법이다. 글이 업이 되어 평생 쓰고 읽는다고 해도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글과 내 사이를 의심하지 않을까?

‘아트인사이트’와 ‘엘엠디엘 프레스’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매거진 <타이핑>은 글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중심축으로 창간되었다. 총 8개의 목차로 글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차마 싣지 못한 뒷이야기들과 과정, 회고와 퇴고 그리고 지금 써 내려가고 앞으로 써 내려갈 마음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중간중간 실려있는 인터뷰와 작가들의 작품은 매거진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고 창간호답게 아트인사이트에 글을 기고하면서도 몰랐던 플랫폼 비하인드도 알 수 있어 에디터에게나 독자에게나 의미가 큰 책이다. 카테고리와 형식이 어찌 됐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비슷하게 글을 삶에 품고 가는 입장으로서 드는 사유와 고민이 겹치는 것을 보고 공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들 비슷한 마음으로 글을 대하는구나 싶어서 위안이 된 동시에 글을 놓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Draft, 초고에 늘어놓는 푸념이 형체가 되기까지
쉽게 쓰이는 글은 없다. 흰 백지 앞에 앉아 글이 술술 써지는 날이 있다가도 그날을 위해 머리를 꽁꽁 싸매며 버티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그런 글도 결코 쉽게 쓰였다고 단정 지을 수 없게 된다. 나는 보통 머릿속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단상 하나만을 쫓아가면서 글을 쓰는 편이라 마지막 온점을 찍기까지 정확히 어떤 말을 쓰고 싶은지 모르는 경우가 다분하다. 글의 말미에서나 형체가 보이는 편이라 글을 시작하고 끝마치기 직전까지는 푸념투성이다.
특히 에세이의 경우는 더 그러하다. 글은 내 푸념에서 비롯되는 물음표를 그럴싸한 느낌표로 만들기에 가장 좋은 친구다. 말로 하면 두서없이 길을 잃어 타인에게 보이기 부끄러운 마음들이 글이라는 무형의 것 앞에서는 충분히 길을 잃어도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준다. 글이 주는 신뢰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매번 스스로 찾아야만 하지만 글 앞에서 몇 번이고 용기 있었던 나 자신의 뒷자락들이 모이면 그 신뢰의 형체가 더듬더듬이나마 형성된다.
Ctrl+Z, 회피없이 회고로의 회귀
지나온 발자국을 다시 되짚어보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대충 덮어놓은 일을 부러 들춰보고 실수를 발견하는 건 잘 그린 수채화 위에 물을 떨어뜨려 급하게 수습해야 하는 일과 같다. 중요한 시험을 볼 적에도 검토라는 걸 크게 고려하지 않던 나는 글을 쓸 때도 회고하는 법이 드물었다. 한 번 적은 답을 고치는 건 내 결정을 더 뭉툭하게 만들었고 그건 답에 대한 확신을 잃게 했다. 실력이 부족한 탓을 검토로 인해 막판에 바꾼 답이 틀린 경우가 많아서라는 이유로 돌렸다. 사실 이제 와 고백하건대 검토하기 귀찮은 마음이 다였지만 말이다.
아트인사이트에서 에디터로 매주 글을 기고하면서부터는 전주보다 더 잘 쓰고 싶은 마음이 나를 기어코 검토하게 만들었다. 시작은 맞춤법이었다. 떠오르는 문장을 급하게 써 내려가다 보면 오타투성이인 글을 접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 보면 문장과 문장 사이 어색함을 발견해 단락 자체를 갈아엎는 일도 파다했다. 어떤 때는 단어 한 개만으로 20분 동안 고민에 빠진 적도 있다. 자주 반복되는 단어는 글을 지루하게 만들어 오직 그 단어 하나에 거슬렸던 마음이 글 전체를 별로라고 느끼게 만들기도 한다. 단어에 집착하기 시작한 건 회고를 하면서부터였던 듯싶다.
커서를 마지막 문장에서 첫 문장으로 옮겨가는 일이 당연해지면서 글의 시작에서 부담은 덜어졌다. 아무도 고치지 말라고 강요하지 않았지만 회고를 통한 글쓰기를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 여겼다. 이 어리고 애석한 마음도 분명 귀찮음에서 비롯되는 일이었으리라.
귀찮음이 사치스러운 감정이 되고 짧은 글이어도 완성도 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은 실수를 제대로 마주하는 태도에서부터 기인했다. 지금 당장도 Ctrl+Z를 누르면 직전의 마음을 돌려볼 수 있지만, 그 마음은 거기에 두고 앞으로 나아가는 글을 반갑게 맞이하고 싶다. 다 회고 덕분이다.
글쓰기가 살리는 대상

“글 뒤에 숨어서 마치 모든 것에 해박하고 도덕적으로 무결한 사람인 양 글을 매듭짓고 나면 괜히 양심에 찔리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니 어찌 보면 글쓰기는 궁극의 진실함과 숨겨진 비겁함 사이를 줄타기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 16p, 내향인의 글쓰기, 정혜린 에디터
“글쓰기가 내게 소중했던 만큼 내가 쓴 글이 성에 차지 않을 때면 미치도록 괴로웠다. 그 당시 글과 나는 한 몸이었다. 남들의 피드백조차 나를 향한 날 선 공격으로 느껴졌으니까.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멍든 과일처럼 자주 짓물렀다.” / “어떻게든 꾸역꾸역 써 내려간 결과가 나의 최선이었다고 말해버리면 그게 곧 나의 한계로 규정될까 봐 두려웠다. 평생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쓰는 게 죽도록 싫었던 시절이었다.” - 31p, 쓰지 않을 이유가 이토록 많았음에도, 백소현 에디터
“가슴의 요동을 꾹꾹 눌러쓰는 일은 당시의 나에게 꽤 버거운 일이었다고.” - 45p, 선잠, 김한솔 에디터
“허울을 벗겨내고, 뽐내지 않고, 부끄러움을 감내하며 속살을 드러내는 글” - 47p, 선잠, 김한솔 에디터
언급하지 않곤 못 배기겠던 문장들을 옮겨 적으며 한 번 더 되새겼다. 글이 얼마나 많은 대상을 살리는지를. 글이 먹고 사는 일보다 중요한 게 아니라는 현실적인 말을 들을 때마다 분했지만 제대로 반박할 수 있을 정도로 빼어난 논리를 가지고 있지도 않아서 답답한 채로 감내하는 수밖에 없었다. 글이 사람을 살리는 가장 가깝고도 큰 증명은 ‘나’였는데, 그건 나만이 구석구석 느낄 수 있는 사실이었다.
글의 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글의 능력을 일깨우는 일은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글을 쓸 적의 나는 어느 때보다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데 철없이 이상을 유영하고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런 무용한 무력감은 글을 쓰는 행위를 반문하게 했지만 나는 그 무용함으로 살려지는 사람이었다.
타이핑 속 에디터들이 그런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글을 삶에 낀 채로 정진하는 과정에서 드는 생각들이 피할 수없는 생각이라 느껴지는 건 그 어떤 격려나 칭찬보다 큰 토닥임이 되었다. 글을 쓰며 맞닥뜨리는 의문들이 글을 쓰려면 거쳐야 하는 필수적인 관문이라는 걸 안 순간,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백지 앞에 앉을 수 있었다.

190페이지 가득 글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들만으로 꾸려진 이 매거진의 앞날이 기대된다. 출판업이 사양산업이라는 현대 이슈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아 하는 박형주 대표와 이서연 편집장의 인터뷰에서 엿볼 수 있는 글에 대한 굳건한 마음에 나도 스리슬쩍 동참해본다. 글을 쓰고 보는 사람이 있는 한 그 수에 상관없이 <타이핑>의 미래는 창창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