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탕달 신드롬(Stendhal syndrome),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본 사람들이 흥분 상태에 빠져 호흡 곤란, 어지러움, 환각 등을 겪는 현상이다. 르네상스의 발생지인 피렌체에선 매년 12명 정도가 해당 증상으로 병원에 이송된다고 한다. 주요 장소는 미켈란젤로의 작품 앞, 보티첼리의 방이다.
스탕달 신드롬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이런 증후군을 한번 생각해 보자. 미술관만 가면 머리가 멍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지는 증후군. 유명한 그림이라기에 들여다보지만 왜 유명한지 모르겠고, 대단한 감동을 받지도 못하고, 예술 사조나 예술가 이름을 들먹이는 사람들 틈에서 괜히 주눅 들어 '나는 미술관이랑 잘 안 맞나 보다'라고 결론을 내리게 하는 증후군.
사실 이건 나의 이야기다. 마네 <풀빛 위의 점심식사>와 모네 <루앙 대성당 연작> 등을 보유한 파리 필수 코스 오르세 미술관에서 내가 산 건 포스터도 엽서도 필통도 아닌 미술사 책이었다. 특유의 빳빳한 종이 위엔 그림과 글자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이 책을 쓴 사람들처럼 그림을 즐겨보고 싶었다. 그림 하나, 붓질 하나에서 역사와 이야기를 뽑아내고 싶었다. 나중에 파리에 또 올 일이 있다면 지금보다 더 크게 감동할 수 있길 기대하면서.
혹시 당신도 '미술관만 가면 멍해지는 그대'인가? 미술관 복도를 한 번이라도 '텅 빈 눈'으로 걸어본 적이 있는가? 그런 그대들을 위해 책 <한 권으로 읽는 인상파>는 넌지시 속삭인다. 친절한 설명과 흥미로운 스토리만 있다면 당신도 기꺼이 미술을 즐길 수 있다고!
일본 유명 유튜버가 설명해 주는 '인상파'
이 책의 저자인 야마다 고로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여러 가지다. 편집자, 비평가, 70만 구독자 유튜버. 그는 유튜브 채널 '야마다 고로의 어른을 위한 교양강좌'에서 서양 회화의 거장과 명작을 소개한다.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서양미술사를 공부한 고로와 미술이 너무 어려운 독자 간의 간극을 메워주는 존재가 바로 책 속 '어시스턴트'다. 이 책은 야마다 고로와 어시스턴트의 대화로 이뤄져 있는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고로 밀레는 바르비종파의 대표 화가로 알려져 있어요.
어시 바르비종이요? 맛있는 치즈 이름 같아요.
미술관은 고로 같은 선생님과 가는 것도 좋지만, 책 속 어시스턴트처럼 서로 킬킬거리며 농담을 주고 받을 만한 친구와 함께 가는 것도 좋다. 전자 같은 이미지를 원하지만 후자일 수밖에 없는 내가 선택한 방법은 뭐라도 배우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그림이 좋으면 좋은 거지, 배울 게 또 뭐 있냐고?
그림은 평면적이지만 무엇보다 입체적인 예술 장르다. 음악이나 문학과는 다르다. 음악은 '그냥' 좋을 수 있다. 악기를 몰라도, 음악사를 몰라도 일단 듣기만 하면 느낄 수 있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글이 쓰인 시대 전후로 어떤 문학 사조가 유행했는지 알면 좋기야 하겠지만 글은 그 자체만으로도 즐길 수 있다. 즐길 만한 요소는 모두 글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 꼭 그 작품이 유명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와 공명하는 지점이 하나쯤은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림은 특수하다. 맥락을 알아야, 이야기를 알아야, 그 그림이 어떤 양식을 파괴하고 등장했는지를 알아야 좋다. 현대 미술은 특히 더 그렇다. 작품만 봐선 어디가 어떻게 좋은지 판단하기에 곤란하다. 보자마자 아름답다는 찬사가 나오는 종류의 예술도 아니다. 현대 미술의 매력은 작가들이 어떤 관습을 지긋지긋하다고 느꼈는지, 그것을 파괴하기 위해 어떤 개성을 발휘했는지를 알았을 때 극대화된다. 이 감상법은 책의 주제인 인상주의 미술에도 적용된다.
<이삭 줍는 여인들>,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왜 좋냐고?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부터 살펴보자. '유명한 그림을 봤다'는 감상 이외에 어떤 감동을 받을 수 있을까? 감동을 받는다면 대체 어떤 부분에서? 고로의 시선을 천천히 따라가보자. 그림 뒤쪽엔 이미 수확을 끝낸 밀짚 더미들이 있다. 그 앞에서 이삭을 줍는 사람은 여자들뿐이다.
왜일까? 남자는 농사를, 여자는 농사가 끝난 밭을 청소하는 모습을 담은 걸까? 아니다. 이들은 남편이 사망했거나 병에 걸려 스스로 돈을 벌어야 하는 미망인과 극빈층 여성들이었다. 당시 프랑스엔 밭 주인들이 밀을 수확할 때 일부러 이삭을 떨어뜨리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 여성들은 그걸 주워 끼니를 해결했다. 고로는 프랑스가 농업 국가인 만큼 국민들이 이 그림에 감동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설명한다. 어떤가. 처음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다음은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다. 미술 교과서에서 이 작품을 처음 봤을 때의 당황스러움을 잊지 못한다. 이 그림이 교과서에 실릴 만큼 유명한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하기도 어려웠다. 당시엔 여자만 나체로 등장하는 것이 파격적이었으려나, 그런데 고작 그 이유로 유명해졌을 리가 없지 않은가. 고로는 이 작품이 지금까지 회자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두 작품을 끌어들인다.
첫 번째는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의 <파리스의 심판>이다. 라파엘로 산치오 <파리스의 심판>의 모작인 이 작품은 색감과 분위기만 보면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는 영 달라 보인다. 이때 고로는 우리의 시선을 그림 오른쪽 아래 부분으로 돌린다. 한 여자가 턱을 괴고 있고, 그 뒤엔 한 남자가 앉아 있고, 그 옆에선 한 남자가 여자 쪽으로 손을 뻗고 있다. 마네의 그림과 짜놓은 듯 비슷한 구도 아닌가?
이쯤에서 의문이 들 법하다.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의 <파리스의 심판>에선 모두가 옷을 벗고 있는데, 마네는 왜 남자에게만 옷을 입혔을까? 여기서 두 번째 그림이 등장한다. 티치아노 <전원의 합주>다. 마네의 그림처럼 남성들만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그림과 함께라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가 유명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당시 라파엘로와 티치아노 작품은 고전 중 고전이었다. 마네는 유명한 고전 명화 형식 안에 19세기 파리의 유행을 그려 넣어 그 파격을 인정받은 것이다.
평면적인 그림 위에 역사와 문화라는 층위가 더해질 때, 우리가 보는 그림은 평면의 세계에서 탈출해 입체의 세계로 나아간다. 우리는 하나의 그림에서 몇백 년 전 역사를, 오늘날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그 과정은 어려울지언정 풍요로울 것이다. 그 시작을 책 <한 권으로 읽는 인상파>와 함께 하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