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애호하던 에디터와의 티타임이라. 익명이 아니되 서로를 모르는 이 애매한 거리감 속에서 나름의 자유를 느껴왔던 본인으로서는 고민이 되는 부분이었다. 바로 그 주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하 참존가)"에 관한 7부작 칼럼의 마침표를 찍는 글이 올라오지 않았더라면, 결정을 내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의 이름을 외우지 못하는 고질병을 뚫고도 뇌리에 남았던 S를 만났다. 어지러운 강남을 조금 벗어난 갈색 찻집이었다. 그는 차보다는 커피를 선호하고 점심에도 바쁜 일정을 마치고 온, 이 시대를 터벅터벅 살아가고 있는 사회인이었다. 조금 지친 사회인 둘이 만나 조금 많이 일상과 괴리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불투명한 막에 둘러싸였던 것 같은 그 시간을 함께 읽으면 좋을 S의 글과 함께 아래에 재구성한다.
I. 사람, S의 이야기를 듣다
인터뷰 요청 받으셨을 때 어떠셨어요?
아 너무 신났어요. 저는 이미 제가 관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거든요. 오래전에 한 번 인터뷰를 진행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와 지금은 많이 달라졌죠. 상황 자체도 많이 달라졌고.
실제로 이전 글과 요즘 글이 조금 결이 다른 것 같아요. 그때는 글에서 감정이 많이 묻어난다고 해야 할까요?
인터뷰를 수락하면서 오랜만에 글을 봤는데, 너무 부끄럽더라고요. 그 당시 상태를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거기서 벗어난 다음, 완전히 떨어진 상태로 보게 되니까... 어쩌면 잔인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다가오는 거리감 속에서 바라봤을 때 감정 과잉이다,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예전 글들의 “감정 과잉”인 면도 좋았어요.
신기한 독자들은 역시 많아요. (웃음) 취향이 다 다양한 것 같아요. <절정> 서론 같은 경우에도 그 당시에 어떤 마음으로 썼는지, 왜 그런 언어 선택을 했는지는 알지만 탁월한 구어체는 아니었던 것 같아서 조금 부끄럽게 다시 읽은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오래된 제 글을 잘 안 읽잖아요. 그래서 읽어보면서 참, 사람 자체도 많이 변했고 내 글도 많이 변했구나. 연역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지금 부끄러움을 느끼듯이 또 4년이 지나서 지금을 보면 분명히 부끄러움을 느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부끄러움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해 보고 싶어요. 그 감정은 어디서 온 걸까요?
누구나 바라는 자기의 상이 있잖아요. 자아상 같은 것. 그게 높으면 높을수록 자기 자신을 못마땅하게 느끼는 정도가 크기 때문에 4년 후의 제가 똑같은 걸 느끼게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을 기쁘게 이야기하는 까닭은 그때 이후로 너무나 많이 변했기 때문에, 그 변화에 비례하는 감정이기 때문인 것 같아요.
성장의 증거군요.
부끄러운데, 뒷맛이 쓰지는 않아요.
2020년도에 썼던 글 ‘청춘에 대하여’나 ‘절정’을 보면 말씀대로 감정이 요동쳤던 시기처럼 보입니다. 그 시기를 어떻게 통과해 오셨나요?
당시에는 관념이 통제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천성적인 문제도 있고, 코로나 시기와도 맞물려서... 원래부터 내면이 혼란한 사람이었는데 취업 준비도 하면서 감정적으로 방황을 많이 하던 시기였고요.
이제 와서 생각해 봐도, 감정의 방황은 노동의 땀으로 씻어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절정>에서 말한, 정신에 살이 뒤룩뒤룩 쪘다는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몸이 고생하면 그런 정신적 나태에서 오는 불필요한 잡념이 사라진다는 게 참... 그래서 입사 직후는 힘들었지만 오묘한 시기였습니다. 몸은 힘들지만, 사념이 없어졌던.
아마 배부른 돼지로, 나는 화하였나 보다. 일단 등이 따수우니 나는 그제야 이런 허황된 투정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일게다. 아마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사치. 이것은 비대해진 의식이 짜내는 권태로움일지 모른다.
오늘같이 저물녘 햇발이 내 의식의 숨통을 황홀이 조여올 제, 나는 다시금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깨어나야 한다. 저 바깥에 있을, 어떤 처절함과 눈물겨운 투쟁을, 지금 내 생애의 반경에서 극단으로 멀어진 그 ‘삶’의 전당을, 다시금 데려와야 한다.
- 절정, 서상덕
2년간 저녁이 없는 삶을 살았어요, 지금은 편안해졌지만... 취준생 때는 정신이 없었고, 취업한 뒤에는 현생이 바빠서 사념은 없어졌으나 생각할 시간이 없었어요. 삶이 없었죠.
그 과정을 지나오는 데에 글이 도움이 되지는 않던가요.
너무. 너무 많이 됐던 것 같아요.
감정 과잉인 사람은 일상의 고달픔을 이성의 힘만으로는 극복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생각하거든요. 글이 심리 상담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해요. 나 밖의 누군가가, 호의적으로, 감정적으로 다치지 않게, 하지만 제3의 관점으로 바라보게끔 도와주는.
글을 쓰려고 논리를 엮다 보니 ‘아, 여기서 이렇게 온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모든 게 이 안에 있었는데. 상념 속으로 지나가서 한 번에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었을 뿐.
이제는 몸도 마음도 평온해지신 건가요?
그럼요. 평온 그 자체예요.
마음의 준비가 다 된 상태에서 몸에도 여유가 생기는 딱 그 시점에서, 봄바람이 삭 불 때쯤 그걸 느꼈어요. 안에서 오래된 시꺼먼 게 삭 나오면서, 여기 분명히 존재했지만 지금 분명하게 사라졌고, 앞으로 영영 끝났겠구나 하는 확신을 주는 감각이 있었는데 설명이 어렵네요. 언젠가 표현하고 싶긴 해요.
<무애> 같은 글로 말씀이죠. 가장 아끼실 것 같은 글 같은데요.
그랬었죠. <무애>를 한창 쓸 때만 해도 마음속에 평안이 아직 없던 때였어요.
무애는 마음속에 거리낌이 없다는 뜻입니다. 원효의 <무애가>,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 거기서 따온 키워드... 그건 마음의 해방이었던 것 같아요. 문제는, 해방을 바라서 시작한 일인데 충분히 전개되기 전에 마음의 해방이 너무 빨리 왔다는 거죠. 이제는 써낼만한 동력이 없어요. 글 <무애>가 끝났다는 건 내 삶이 어느 정도 해방되었기 때문이겠죠?
역설적이네요.
아깝기는 합니다. 내적인 고뇌를 거치는 과정에서 제가 겪은 일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기록되지 못하고 휘발되는 것에서 내심 아쉬움을 느껴요.
II. 에디터, S의 글을 묻다
처음 에디터를 시작했을 때가 기억나시나요?
그때는 논리체계와 의식체계가 해리된 상태였어요. 전날 글을 쓰고 자족감을 느끼고 잠들면 다음 날 무슨 내용인지 나도 모르겠을 정도로. 그래서 처음 에디터를 시작했을 때는 내 글이 인정받고 이해받으리라는 기대는 조금도 없이, 그저 감독관이 필요해서 들어왔어요. 독자가 강력하게 상정되고 전제되어 있으므로 해서 나에게 강박이 있기를 바라서... 독자를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쓸 수 있도록 말이죠. 그게 너무 유의미했고요.
초반 글은 해리된 글이 많아요. 특히 <예언자> 시리즈는 정말 열심히 썼는데 저도 못 알아보는 게 많아요. 뭐야 이게? (웃음)
그럼 현재의 S에게 에디터,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직장인으로서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자기 존재감에 굉장히 큰 하나의 기둥이 되어줘요. 자금력을 바탕으로 회사 바깥에서 자신의 삶을 찾는 것이 이 시대의 대부분 직장인들의 행태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다’라는 꼬리표는 자아 색깔을 지탱해 주는 큰 기둥이긴 하거든요.
또 글을 쓰고 게재한다는 것에는 당연히 보이고 싶은 마음이 포함되어 있어요.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가감 없이 가리키는 행위인 거죠. 누군가가 읽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쾌감이 분명히 존재하는데, 어느 순간 보니까 제 글을 좋아하는 사람이 몇 명씩 나오고... 그렇게 응원을 받다 보니 지금은 그 짜릿함 때문에 글을 쓰는 것 같아요.
제 글은 호불호가 많이 갈려요. 좋아하는 부분도, 싫어하는 부분도 짐작은 가구요.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두의 사랑을 받을 수는 없지만 마니아층을 만들 수 있는” 글인 거죠.
그렇군요. 그럼, 그 좋아하는 점과 싫어하는 점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마음에 들었던 부분은 생각이 느껴져서였어요. 주관적인 점이 많이 묻어난다고 할까요.
제가 생각하는 장점도 비슷한 것 같아요. 만족할 만한 깊이에 도달한 사유가 선행된 후에야 글을 쓰는 것 같아요. 글에 그런 걸 담아내고 싶은 고집, 아집이 있어요. 자기 파괴적이기는 하지만... 남들과는 다른 이야기, 생각, 색깔의 글을 쓰고 싶은 거죠. 짧게 쓰면 2시간, 길게 쓰면 14시간을 쓰는데 그런 시간을 투자할 때는, 그 안에 고유함이 담겼으면 했어요.
단점은 좀 난해합니다. 아직 한눈에 따라가면서 읽히는, 그런 글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해서... 독자 입장에서는 수많은 언어의 파동이 지나가는데, 뇌리에 남은 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요.
그 장황한 언어에서 의미를 찾는 것도 독자가 글을 읽는 한 가지 방법이겠죠. 사실 글을 보고 연배가 있으신 줄 알았습니다. 특히 오프라인 모임 후기 같은 글.
그 이야기 정말 많이 들었어요. 40대 후반?
학교에 다닐 때 한국 근현대문학을 다 읽고 나가자는 터무니없는 버킷리스트를 세워서 도서관에 꽂힌 장서의 6~7할 정도를 읽었어요. 문체는 그 과정이 남긴 거라고 생각해요. 고어까지는 아닌데 옛 문체가 많이 녹아 있어요. 뭐, 개성 있어 보여서 채택한 것도 있구요. (웃음)
눈에 띄는 문체이기는 합니다. 글의 길이도 그렇고요. 연작의 형태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긴 호흡을 선호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일반화를 싫어하는 편이에요. 그래서 제 글에서도 단순화나 일반화를 사용하지 않고도 정확하게 이해받고자 하는 욕망이 있는 것 같아요. 의도가 왜곡되지 않으려면 글에도 물리적인 양이 필요하고요.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다, 흩어진다. 모래처럼 바스러지는 단어들을 바라보았다. 태어나는 문장은, 장차 태어날 문장의 예감에 의해 부서지기를 반복한다. 글이 길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분량의, 즉 양적인 문제만은 아니었다. 전체적인 일관성과 논리적 정합성을 고려한다면, 글은 커다랄수록 감당하기 어려운 것, 누수가 많은 성긴 양동이 같다. 양동이가 커질수록 막고 덧대어야 할 구멍이 따라 커가고, 그 구멍으로 문장들이 새나간다. 그러기를 반복하는 어드메, 지치고 지친 다음에야 자포자기하듯이 마구잡이로 써내려 간 나의 글들이었다.
- 사랑이 지나간 후에, 서상덕
다음 글에 대한 계획이 있으신가요?
요즘의 경미한 고민입니다. 인정욕구는 갈증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충족이 되었고, 이전에 글을 쓰게 만들었던 내적인 네거티브도 사라졌습니다. 그 이야기를 썼던 것이 피드백 모임의 “글이 사라졌다.”라는 내용이었어요.
이제는 간단하게 쓰는 연습을 하려고 합니다. 지금까지 짧은 호흡으로 써본 적이 없어서 글을 쓰기 전 부담감이 큰 것 같아요. 이미지의 강박이라고 할까요. 집착이라는 걸 알지만, 머뭇거림이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머뭇거림이요?
누구도 시키지 않고, 누구도 비난하지 않지만 다만 내가 긴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는 이미지의 집착으로 해서 머뭇거림이 발생하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내면이라는 게 휙휙 바뀔 수는 없는 거니까. 그 과정 중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는 조금 가벼운 글도 볼 수 있겠네요.
네, 약간 가벼운 글. 또 아무래도 제 글 대부분의 소재들이 부정적이어서 긍정적인 소재로 쓰는 연습이 안 되어있어요. 구상해야 할 것 같아요. 가벼운 즐거움을 쓰고 싶어요. 가벼운 즐거움을 쓰지만 가볍게 쓰고 싶지는 않은, 그런 생각?
이제는 인정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이 되어서 비로소 긴 글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된 것 같아요. 다만 안 해본 일이라, 아직 소재를 물색 중입니다. 사실 천하제일 긴 글 쓰기 대회가 있으면 1등을 할 자신이 있어요, (웃음) 긴 글에 적합한 문체가 나도 모르게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제 짧은 글에 맞는 문체도 개발해 봐야죠.
눈에 들어오는 소재가 있으셨나요?
없어요. (웃음)
그나마, 비로소 쓰고 싶은 욕망이 사라진 그 자리에 읽고 싶은 욕망이 들어찼어요. 예전에도 그 욕구는 있었지만, 한 장을 읽은 자리에 두 장을 쓰고 싶었던 욕망 때문에 전개가 잘되지 않았거든요. 이제는 가능하니까 읽었던 책을 가지고 오피니언을 남기는 것도 분명히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책에 대한 기억이 길이 남을 거니까요.
학생 때 읽으셨던 한국 근현대문학은 소재로 어떠신가요?
아, 다시 읽어야죠. 기억은 없지만 향수는 남아있어요. 한국 근현대만이 가지는 어떤 처연한 맛이 있어요. 그렇지만 비루하지는 않은, 처용가처럼요. 체념의 정서... 일상적으로도 그 정서를 꽤 좋아합니다. 그러니 언젠가는, 돌아갈 겁니다. 다만 지금은 세계문학 전집으로 시작하고 싶어요. 한국 근현대문학은 나이가 더 들었을 때 사무치게 느껴질 것 같아서요.
책을 읽는다는 건 허세일지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제 이 허세가 몇 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정말 심했거든요... 그러다 어느 순간 내면의 어느 부분에서 충족감이 느껴지고, 어느 지점이고, 어떤 이유에서, 얼마만큼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가 충족됨에 따라서 고차원적 사유에 대한 욕망이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요. 이 지적 허영에의 욕망이 끝나면 언제 다시 읽을지 모르니 최대한 읽어두려고 합니다.
확실히 생각의 가지가 남다르신 것 같습니다.
제 안에 있는 도발적인 의식이 글을 전개해 나가는 힘이 되는 것 같긴 해요. 처음에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지만, 이제 서론이 지나 4~5페이지가 지날 때쯤 되면 ‘다듬자’라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그런 문제적인 의식이 많이 사회화된 것은 글 덕분이구요. 하필이면 그걸 글로서 풀어내는 사람이 되어서 내가 먼저 보고, 먼저 비판하고, 먼저 수정하고. 그렇게 기고를 한 것이 마침내 나의 생각이 된 것이, 저에게는 엄청난 축복이었던 거죠. 이제 문제적인 의식이 거의 없어요. 나름대로 사회화가 다 됐습니다. (웃음)
III. 니체, 그리고 인생에 대하여 이야기하다
그 도발적이고 발칙한 문제의식. 먼 길을 돌아서 니체로 왔네요. <이방인> 2부에서 니체의 문장을 인용하기도 했고, <두 초인>에서는 아예 니체에 대해 직접적으로 다루고, <참존가>에서도 니체의 영원회귀가 나옵니다. 니체를 어쩌다 좋아하게 되신 건가요?
불문율을 옹호하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이웃을 사랑해라. 인간은 누구나 선한 씨앗을 갖고 있고, 대개 인간의 행동은 타당하다. 이런 걸 별로 안 좋아해요.
니체와 카뮈가 반가웠던 이유는 그 생각에 공감을 받아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좋아했고 그래서 많이 위로받았고... 그런데 <참존가>를 끝으로 이제 그 친구들도 많이 보내준 것 같아요. 이제는 옛날만큼 “도와줘”하는 마음의 의존감이 많이 옅어졌어요. <참존가>를 쓰면서 남아있던 마지막 의구심이 비로소 모두 정리가 된 채 활자화가 되었어요.
마지막 의구심이 뭐였나요?
6편의 내용이었나. ‘사람이 사람을 필요로 하는 이상 사람을 긍정해야 하는데, 나에게는 무조건적인 긍정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물론 지금도 없는 것을 만들어낼 생각은 없지만 비로소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납득했기 때문에, 이제는 시간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키치가 필요할 수 있다는 말씀이죠.
네. 그 서평이 원래는 그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키치를 낱낱이 해부해서 박살 내버리겠다는 의도였는데, 쓰다 보니까 불가능하더라고요. 그래서 결론도 바뀌었고... 어느 날 불현듯 이 부분에 대한 비판적인 문제의식이 유의미하게 대두해서, 그걸 재해부하고 재해석해서 다시 글을 쓰지 않는 한, 이 문제의식에 대한 사고는 그 글귀대로 정리되어 있을 거예요. 이제 니체 형님 빠돌이가 끝났습니다.
키치 하면 또 <참존가>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죠. <참존가> 7부작 정말 인상 깊게 봤습니다. <참존가>를 이렇게 긴 연작의 주인공으로 고르신 이유가 있을까요?
다른 책에도 마찬가지지만, <참존가>연작은 책 서평을 쓴 게 아니라 책 때문에 다시 기억난 내 생각의 토막들을 쓴 것 같아요. 글을 쓸 때마다 늘 고민하는 건데, 형이상학적이고 논리적인 내용만 전개하면 흥미가 떨어진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공감할 만한 적절한 사례를 배치하고 싶은데, 서평에서는 책 이야기가 결국 사례를 대체할 수 있으니까요.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 예를 들어 ‘우리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같은 상념들이 책의 주제로 묶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책 이름이 멋있고... (웃음)
책이 계기가 되어서 미결된 문장들이, 각각 파편으로서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많은 문장들이 통합화가 되었어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고마워요. 저도 이렇게까지 길게 쓸 줄 몰랐거든요.
상념에 대한 결론이 궁금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덕분에 제가 <이방인> 서평을 다시 봤는데. 처음에 그걸 써놨더라고요. ‘인간 존재에는 본질이 없다. 하지만 생의 의미를 갈구하고, 감각하는 우리에게는 바로 그 본질인 목적이 필요하다.’ 그게 저는 인간이라는 종의 딜레마라고 생각하거든요. “목적은 없어. 그냥 자유롭게 살아.”라고 해도 안되는 거예요. 그게 우리 DNA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허영과 허세의 근원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뭔가 달라, 나는 개별 되고 독립된 존재야.' 고유한 존재이기를 원하는 우리가 희구하는 어떤 존재 감각.
실존주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나, 개중 곧잘 공감하게 된 구절 하나를 알고 있다. 인간에게는 주어진 목적인 본질이 없다는 것. 의자에게는 의자가 수행해야 할 본위적인 목적, 앉기 위함이라는 존재 본질이 있으나, 우리 인간에게는 선제 되거나 부과되는 아무런 목적도 성립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 인간의 시험대, 서상덕
가장 묻고 싶었던 질문을 드릴 때가 왔네요. 존재가 가볍다면,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요?
존재 외적으로,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모든 존재와 생명이 그 자체로 불변하고 고유한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존재 외적으로는 우리가 뭘 하든 의미가 없어요. 욕망의 거대한 인도를 따라 엔트로피가 모이듯 여기까지 온 거고, 너무나 거대해서 느낄 수 없는 큰 힘에 따라 인도되고 있을 뿐이에요. 가치중립적 진리라는 게 설령 존재한다 한들 “중력이 존재한다”라는 말 같은 어디에나 적용되는 진리가, 우리가 스스로에게 바라는 진리일까요?
결국 존재 외적으로는 가치가 없거나 의미가 없는 거죠. 삶의 의미는 주관적입니다. 다만 우리는 불신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객관적이기를 바라는 것 같아요. 자신의 존재 바깥에서 그것을 발견한다면 귀납적으로 참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삶의 의미라는 것은 가치 중립적인 진리로서의 무언가가 아니라 주관적인 것, 즉 믿음이고 신념입니다. 그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믿음에 불과한 것이 결국 시간이 지나 먼지처럼 흩어진다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있을 뿐이죠.
없어지면 뭐, 다시 만들면 되죠. 그러니까 삶에 의미가 없다, 라기보다는 명징한 진리가 없는 것이고 주관적으로 만들어가는 의미와 만족감은 분명 존재하는 거예요.
그 주관적인 의미를 만드셨나요?
네. 저는 지금 삶에 만족합니다. 이 이야기를 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내 삶이 주관적으로 의미 있다고 여기는가? 물론. 왜? 무엇으로?
이겨내 온 것이 있고, 극복한 것이 있고, 견딘 바가 있고, 그 과정에서 생각한 바가 있고 그것이 충분히 숙성되었고 이제는 바야흐로 조금의 타당성을 내포하기 시작하였고, 그리하여 조금 더 객관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고 그런 한편은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고, 나아가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났으며, 결과적으로 포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많아졌고, 그리하여 내 삶이 더욱 평온해졌다. 이 모든 것이 내 주관적인 세계에 있어 너무나도 의미 있는 것들이어서...
누군가는 이걸 의미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나는 이걸 의미 있다고 생각하니까. 누군가가 나를 긍정한다면 이 의견에 공감하는 거고, 그렇게 사람이 모이면 그게 키치가 되는 거죠. 강렬한 진리 같은 건 없어요. 각자가 만드는 겁니다.
긴 인터뷰 시간 동안 정성스럽게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으신 말씀 있으신가요?
(잠시간의 휴식 후) 이 인터뷰를 정리할 H에게 큰 위로를 표합니다. 나아가 또 한 편의 긴 글이 태어났는데, 이 글을 접하게 될 독자분들에게도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이제는 짧게 쓰려고 노력할 테니, 계속해서 관심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에디터들에게 정말 고마워요, 온정적인 감사가 아니라 정말 차갑게. 저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S는 글을 쓰는 사람처럼 말했다. 글을 쓰듯 말한다고 해야 할까. 하나의 생각에 대해 고집스레 사유하는 그의 글처럼 오해의 여지를 두지 않으려는 듯 하나의 질문에도 아주 기다란 답을 읊었다. 인생의 의미를 묻는 말에 곧바로 대답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날들이 있었을까. 정돈된 대답 뒤에 정돈되지 않았던 혼자만의 생각들이 그림자처럼 비친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물었을 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의 대답이 돌아왔듯 오랜 고민 후 마지막 문장을 남긴다.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그리고 되도록 그 날들에 글도 함께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