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간의 시험대 - 알베르 카뮈, 이방인 1부 [문학]

알베르 카뮈, '이방인' 1부
글 입력 2020.08.09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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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나, 개중 곧잘 공감하게 된 구절 하나를 알고 있다. 인간에게는 주어진 목적인 본질이 없다는 것. 의자에게는 의자가 수행해야 할 본위적인 목적, 앉기 위함이라는 존재 본질이 있으나, 우리 인간에게는 선제 되거나 부과되는 아무런 목적도 성립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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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이 세계에 태어나는 우리의 사실됨 하나와 그럼에도 장차 어떤 생의 목적을 찾고자 갈구하는 우리의 본성 하나가 맞물리면, 꽤 질긴 내적 딜레마가 발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세계로 던져졌다.’ 즉, 피투 被投 되었다는 그 말이 시사하는 바란 꽤 서늘하다. 주어진 아무런 길 없이 그저 던져지듯 이 세계에 떨어진 우리가 아무런 길 없이 살아갈 수가 없었기에. 우리가 길 없이 태어나 길 없이 살아갈 수 있었더라면! 그러나 우리에겐 언제나 모종 생의 의미와 목적이 필요로 했다. 자아의 생존을 위하여.

 

그러니 이제 길은 오로지 스스로의 몫이 된다. 주어진 길은 없지만, 여정과 목표를 필요로 하는 우리는 장차 자신의 길을 써내려고 애쓴다. 그것은 필연이 아니었을까. 다만 슬픈 것은 그 길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가치 판단이, 영원한 미래의 일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는 길과 목적, 그를 통한 어떤 의미가 필요했고 우리는 이제 길을 짜내었다만, 그 길의 옳고 그름은 고사하고, 그 길이 무엇인지, 어떤 형체인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까마득한 것이다, 우리가 얽어내는 길과 목적이 가지는 의미란, 영영 까마득한 것이다. 그러니 후회란 우리의 본질에서 비롯되는, 필연한 행위가 아닌가 한다. 삶에 대한 가치 판단은 다 지난 때에나 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길이 없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란 사실 나의 길, 나의 긍정됨이다. 나는 나의 존재 사실만으로 충만하고 충실한 긍정을 받아낼 수 있는가. 영 회의적인 답변을 떠올리는 질문이다. 나는 자아의 생존을 위해 자와 타 양변으로부터의 자기 긍정을 필요로 하고, 그 긍정의 근거가 될 것은 곧 자신의 삶, 선택이 수 놓인 걸어온 길뿐이다.

 

나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영영 나를 괴롭히고 내게 부과될 그 질문. 나는 썩 괜찮게 살아왔고 또는 살고 있는가. 즉, 내 생애의 여로는 그 어떠했는가. 그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그러나 오로지 혼자 자아낼 수는 없던 것. 평가자인 타인이 필요하다. 아니, 평가자인 타인의 긍정이 필요하다. 인간은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내적인 믿음을 짜내기 어려워하는 존재, 즉 불신하는 자아, 비판하는 자아를 또한 안고 있었음에, 우리 행보의 완성에는 그 행보를 긍정할 타인이 구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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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긴 사변을 전제로 안은 채 카뮈의 ‘이방인’을 본다. 책을 펴자마자 곧 강렬한 구절이 전시된다. 그 첫마디에서부터 벌써, 우리는 아마 모종의 스산함과 불길함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모종의 공통점이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해보자.


**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 

양로원으로부터 전보를 한 통 받았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식. 근조.` 

그것만으로는 아무런 뜻이 없다.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르겠다. 



여기 사람 하나가 있다.

 

그의 일상을 놓고 볼 제, 그는 그냥 평범한 외견의 소유자이다. 그럭저럭 타인과 교류하고, 교제하는 여인도 꽤 있다. 적당한 삶을 영위하며, 만족하는 듯 뵈는 그에게 어떤 야망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완전히 충족된 삶을 살고 있다고 이야기하기는 섣부르지만, 불만은 없는 삶을 살고 있듯 뵌다. 혹 예민한 자는 그에게서 조금의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로썬 아무렇지 않다. 그런 이는 곧 무수한 타인의 하나가 될 뿐이기에. 우리의 관계와 교류는 분명 선별적이지 않던가.

 

혹 예민한 자의 눈으로는 그의 이질감, 모종의 부재나 부실이 드러나겠지만 크게 상관이 없다. 그는 그럭저럭 직장을 다니고 있고, 이성과 교제하고, 친구도 가지고 있다. 무난한 삶이다. 그리고 이번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리곤 ‘아아, 돌아가셨나’ 그뿐이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는 우리 독자로서는 벌써 모종의 스산함, 무언가 불길함을 가지나 그뿐이다. 소설의 세계 속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인들로서는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없기에, 누군가의 열은 의심 말고는 아무런 별다를 것도 없이 조용하다.

 

그의 어머니가 어떠한 인간이었는지, 어떻게 주인공 뫼르소를 키우고 훈육하였는지, 그래서 말년의 둘 관계는 그 어떠했는지, 아무것도 우리는 알 수 없다. 책의 시점은 주인공의 1인칭 시점이고, 그는 그런 하등 것들을 떠올리지 아니한다. ‘아아, 돌아가셨나. 오늘, 아니 어제일지도.’ 그리고 그런 것들은 그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는 사장에게 (장례식을 위해) 이틀 동안의 휴가를 청했는데 그는 사유가 그러한 만큼 거절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그에게 이런 말까지 했다.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 사장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걸 그랬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내가 변명을 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가 나에게 조의를 표해 주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아마도 모레, 내가 상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조문 인사를 할 것이다. 지금 당장은 마치 엄마가 죽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면 기정사실이 되어 만사가 다 공식적인 모양새를 갖추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은 마치 엄마가 죽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이 가지는 의의란, 그 사건 자체에 놓여 있다기보다는 그 사건이 파급하는 자신의 일상적 문제에 가로 놓여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그 자체로 평가되기보다는 어머니의 죽음에 의한 나의 문제로 자연스레 치환되어 있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장례식이 치러지고, 그는 참여한다. 참여, 그뿐이었다. 그는 무엇을 까닭으로 장례식에 가앉았을까. 그 스스로가 아무런 비애나 후회, 애틋함, 송별에 대한 충실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것은 모종 의무였을까. 그러니까 사회적 불문율과 같은, 그런 의무 말이다. 그러나 그는 타인의 시선을 그리 의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무엇이 그를 내키지 않는 장례식으로 이끌었을까. 그에게 모친의 장례식이란, 주말의 휴식시간을 반납해야 하는 ‘귀치 않은 일’에 불과하였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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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을 닫아 놓았습니다만, 어머니를 보실 수 있도록 나사못을 풀어 드려야지요." 그러면서 관으로 다가가기에 나는 그를 제지했다. 그가 내게 말했다. "안 보시렵니까?" 내가 대답했다. "네." 그가 멈칫했다. - p.17


나는 밀크커피를 마셨고, 그러자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그러나 나는 엄마 앞에서 담배를 피워도 좋을지 어떨지 몰라 망설였다. 생각해 보니, 꺼릴 이유가 조금도 없었다. 나는 관리인에게 담배 한 대를 권했고, 우리는 함께 피웠다. - p.19


쾌청한 하루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야외에 나가 보지 못했다. 그래서 엄마 일만 없었다면 산책하면서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 p.23

 

 

그는 장례식 전야에 요양원에 도착해 어머니의 관 곁에 가만 앉아있다. 관을 지키는 이는 ‘당연하듯’ 자식이 모친의 마지막 임종을 확인할 것이라 생각하여 관에 못 박지 아니하였지만, 그런 것들은 주인공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는 뚜껑이 못 박히지 않은 관의 옆에 가만 앉았다. 그냥 뚜껑을 열어보기만 하면 되는데, 마치 그럴 하등 필요가 없다는 것처럼 가만 앉아서 온 밤을 샜다. 그래야만 하는 의무라도 있는 것처럼. 그리고 필요가 결핍된 의무에 자발성은 없다. 누군가 주신 마지못한 의무를 이행하는듯한 모습이다.

 

그래, ‘당연하듯’ 생각하는 우리의 불문율, 아니 우리 감정의 불문율의 많은 부분에 있어 그는 달랐다. 예컨대는 어머니의 임종에 대한,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는 우리의 감정과 태도에서부터 말이다. 그러니까 주인공이 배태하고 있는 이질감은 이 부분 서문에서 가장 여실히 압축된 채로 독자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필두로, 향후 많은 ‘보통의 일’에 대한 ‘당연한 우리들의 태도와 인식, 그 이전의 감정’들은 그를 통해 자꾸만 거절된다.

 

사건이 그에게 일어나고, 그 사건의 당사자인 그가 거기에 있고, 그 당사자를 둘러싼 주변인인 우리가 또한 그곳에 있다. 즉, 하나의 사건에는 사건 자체와 사건의 당사자와 관찰자인 주변인이 있다. 그때 주변인이자 관찰자이자 타인인 우리는 사건과 당사자를 지켜본다. 지켜보면서, 은연중에 평가하고 판단을 내린다. 자기도 모르게 말이다.

 

우리의 생애에는 그것이 선택한 것이건, 선택하지 아니한 것이건 사건이 일어나고, 그 곁에는 스스로 인식하고 있건 인식하고 있지 아니하건 관찰자이자 판단자인 타인이 존재했다. 그 중심에 당사자인 자신의 ‘선택’이 가로놓여 있다. 즉, 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중심에서의 행위뿐인 듯싶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한 인간은 자꾸만 관찰되고 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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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필) 편지를 썼다. 약간 무턱대고 쓰기는 했지만, 그래도 레몽의 마음에 들도록 힘썼다. 왜냐하면, 레몽의 마음에 들도록 하지 않을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략) 그가 "이제 넌 진짜 친구야."라고 했을 때에야 비로소 그 말이 놀랍게 들렸다. 그는 거듭 그 말을 했고, 나는 "그래." 하고 대답했다. 그의 친구가 되는 건 내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는데, 그는 정말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 p.47

 

그녀가 웃을 때 나는 또 그녀에게 욕정을 느꼈다. 조금 뒤에 마리는 나에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그건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이지만, 아닌 것 같다고 나는 대답했다. 마리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 p.51



그는 극도로 이기적인 인간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어렵다. 이기적이라 하기에는 그에게는 강렬한 욕망과 열망마저 결여되어 있었기에. 그에게서 볼 수 있는 열망은 욕정뿐이었다. 정사와 함께 스러지는 그 일시적인 욕망 말이다. 그는 이기적이라기보단,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는 인상을 마구 던져댄다.

 

그에게는 타를 위하는 감정인 공감과 연민은 고사하고, 자신을 위하는 감정인 욕망과 야망부터 결여되어 있었다. 물 위에 떠 흘러가는 대로, 되는대로 살아가는 모양새. 강렬한 욕망은 생과 삶에 대한 가장 강렬한 동기, 그는 그리 욕망하는 것이 없다. 정말이지, 살아있기에 살아가는 듯한 모습을 풍긴다.

 

우리에게는 본질, 그러니까 존재에 선행되는 절대적 전제랄 것이 없다지만, 실제의 삶에 그런 모든 것들이 부재해 있지는 않은 듯하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인간의 숲 속에 기거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모종의 룰인 불문율을 따라야 한다. 아니, 그것은 따라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미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즉, 아무도 선고하지 않은 채로 군림하는 하나의 자격이 된다.

 

그것은 예컨대 어머니의 임종 앞에서 느껴야 하는 것, 우리가 한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고 평가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인 어떤 감정과 태도이다. 인간으로 이해되고 인정되고 받아들여지기 위한, 즉 평가를 위한 인간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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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것들이 결여된 채 세계로 던져진 인간은,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설은 자꾸 이런 질문을 던진다. 우리에게 정말이지 존재를 위한 어떠한 선제된 조건과 목적, 본질도 없는 것인가. 물론 인간에게 존재에 선행되는 어떤 도구적 목적이 있을 리야 없다마는, 인간이 하나의 인간으로 타인들에게 초청받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전제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듯싶다. 인간이 타인을 필요로 할 따름에야......

 

인간은 숲에 떨어져 홀로 존재할 때에만 자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피투된 존재로서, 아무런 선행된 목적과 조건 없이, 존재하는 대로 그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홀로인 때뿐이다. 그러나 숲을 떠나 마을로 들어올 때는 인간은 하나의 통과 절차를 밟게 된다. 그것은 인간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한 조건에 대함, 인정받기 위함이고 평가를 통과하기 위함이다.

 

뭇 인간이 갖추고 있는 모종의 동질감인 감정과 감각, 연민과 욕망, 본능과 이성의 대결의식. 이것이 결여된 타인에게,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갖추게 되는가. 그런 이는 우리에게 이방인이다. 우리. 감정과 감각, 연민과 욕망, 본능과 이성을 갖추고 있다 ‘믿는’ 우리에게 그 결여된 존재는 이방인이다. 그는 난대로 살아가는 스스로 삶에 퍽 불만이 없지만, 그는 모르고 있다. 언제 그가 이 인간의 마을에서 추방될지를, 혹은 처형대에 오르게 될지를.

 

‘인간이라면 이러이러해야지’ 어머니의 임종 앞에서 우리가 갖게 되는 감정과 같은, 그러한 ‘인간의 감정’은 인간이기 위한 조건일까. 아니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질일까. 그런 것들을 가지지 못한 채 태어난 인간의 자식은 장차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설은 자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주인공은 자신이 어떤 추방과 몰락의 길로 접어드는지를, 아직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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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쏟아지는 빛은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느 한순간 우리는 최근에 새로 포장한 길을 지났다. 뜨거운 햇볕에 아스팔트가 녹아 터져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천천히 가면 일사병에 걸리기 쉽고 너무 빨리 가면 땀을 많이 흘려서 성당 안에 들어가선 오한이 나요." 그 말이 옳았다. 빠져나갈 길이 없는 것이었다. - p.29

 

그것은 내가 엄마의 장례를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고, 그날처럼 특히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줄들이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펄떡거렸다. 불로 지지는 것 같은 그 뜨거움을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게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 본댔자 태양을 떨쳐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은 채 칼을 뽑더니 태양 빛 속에서 나를 향해 쳐들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되었고, 번쩍하는 긴 칼날 같은 것이 되어 내 이마를 쑤셨다. - p.73

 

하늘 전체가 갈라지면서 불비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나의 전 존재가 팽팽하게 긴장했고 나는 손으로 권총을 꽉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손잡이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날카롭고도 귀를 찢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흔들어 털었다. 나는 내가 대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었던 어느 바닷가의 그 특별한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그 움직이지 않는 몸에 다시 네 발을 쏘았다. 총알들은 깊이 들어가 박혀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았다. - 1부 完



태양이 불타오른다.

 

그의 운명에 모종 스산함과 불길함이 스밀 때는 이렇듯, 태양이 불타오른다. 그 태양은 안 그래도 결여된 그의 감정과 감각을 마저 태워버린다. 사고를 마비시킴으로써 의식으로 짜내던 페르소나마저 무디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너무도 예민한 감각의 소유자인 그는, 불볕의 아래에서 빠져나갈 길을 잃었던 것일까. 알 수 없다. 그냥, 태양이 그의 뇌를 빨갛게 달구어 태워버리고 있었고, 그는 시야를 잃어버린 채로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겼다. 이제 심판이 시작된다. 그 심판은 죄의 심판을 가장한, 인간의 자격에 대한 재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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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계속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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