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청춘에 대하여 [사람]

오늘의 네거티브
글 입력 2020.04.05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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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지금, 청춘에 대하여

 

가는 시간은 늘 아쉽기만 한 시간이라,

오늘도 아쉬운 속이다.

 

보내는 시간이 귀한 만큼 아쉬움이 클 일이라, 여태의 매 오늘은 너무나 아쉬운 속이었다. 누구께나 청춘은 지나가는 시간이라. 얼마간 뒤돌아볼 미래에, 그래도 참 가득 찬 시간이었지 하고 스스로 기꺼이 위로깨나 할 수 있는 시간들이기를… 그것이 이 시간에 필요되는 것, 최선이 아닐는지. 그리고 그것이 이 시간이 남길 수 있는 최고의 선, 최선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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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독서실에 와 있다. 여기엔 참 많은 청춘들이 있어서, 나는 그네 각각을 속들이 알 수 없지만도 어깨너머로, 말뜻 그대로의 어깨너머로 구경해볼 수는 있다. 각자의 청춘은, 그네 각자 앞에 놓인 책으로 엿볼 수도 있는 것일지. 어떻든 내 보는 것이 그들 청춘의 파편 쯤은 될 것이다.

 

나는 저들 온 청춘들의 제 모습을 알 수 없지만, 파편 나마 뵈는 것으로 생각기를, 참들 치열하구나 싶다. 내게선 어느새 사라진 치열함들. 그 앞에 선 내 부끄럼들이 고개를 쳐든다. 어두운 이곳 독서실 안, 스탠드 불로 비추며 청춘들이 보고자 하는 것, 하고자 하는 것이란… 보는 것은 책이라지만, 실지로 바라보는 것은 그 안의 미래일 것이다. 어두운 곳에 소리 죽여 바라보는, 나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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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 푸른 봄, 더 자세히는 푸른 봄 정오의 광장에 관한 이미지라고 하자면, 여기 이 모습들에까지 꼭 들어맞을 수는 없을 것이다. 청춘이란 어감에 대한 우리 기존의 인식이란 즐거울 수만 있을 마지막 시기, 니트 한 벌로도 추위 느끼지 않을 시기인 봄의 광장 위를 닮았건마는, 그것이 이제의 청춘에까지 꼭 맞는 이야기일는지.

 

지금 시대 청춘의 실 낯이란, 이곳 여기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 대낮, 부러 어둠 속을 찾아와 스탠드 불 하나를 켜, 미래를 바라는 모습들. 봄의 정오라는 낭만적인 바램은, 이 시대에까지 자연스러운 것은 못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그것은 온전히 현재를, 현재만을 위하는 일이기에. 조금 과장하자면 낭만적 바램으로써의 청춘, 온전한 현재만의 청춘이란, 이 시대에 방종과 태만으로 읽히는 경향까지도 종종 본다. 현재만으로 살아감이 이 시대엔 과히 불가한 것으로 여겨지는 따름일까. 알 수 없다.

 

우리 시대에 현재가 가지는 의미란, 그 속의 미래를 위하여 가는 모습에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슬픈 질문이 뒤를 잇는다. 미래를 바라고 위하는 일이 현재의 의의가 된다면, 그로써 지금에 바라보는 닿게 될 언젠가의 미래가 다시 현재가 되어 버릴 제, 의의로써 그 안에 또 다른 새 미래가 계속 꼬리를 잇게 된다면, 바야흐로 도달하여 종착할 미래는 어디에 있는 것이냐는.

 

그래, 어쩌면 우리는 도달하고 정착할 미래를 좀체 알 수 없어 잃어버리었기에, 끝없는 미래의 환상 혹은 꿈속으로 현재를 걷는 모습들은 아닐지. 아닐까? 혹은 미래를 위한 현재가 현재의 의의가 되는 것은, 오직 청춘에게만 해당하는 사항일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언제부터가 청춘이고 청춘 아닌 경계가 되는가. 생겨나는 것은 이렇듯 질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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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가 청춘이고 청춘 아니이냐. 청춘은 그것이 청춘인지를 모를 때이고, 그것이 사무치듯 아름다운 줄을 반쯤은 모를 때이고, 그래서 아직 후회하는 시기 못 되는 때이고, 청춘 아닌 때란 그런 지나버린 날이 이제야 사무치는 아름다움인 줄을 깨달아 가슴 잡아 흐느끼는 때인 것일까.

 

그렇다면, 간혹 지나버린 날에 대한 짙은 후회로 얼굴에 그늘 지우지 않은, 마냥 지금이 좋은 어떤 하얀 머리 노인을 볼 때도 있지. 그 노인은 청춘이냐 물어본다. 그러니 청춘이라 답하게 된다. 청춘이란, 나이와 시기에 대함이라기 보담, 후회에 대함인 것이구나. 흔히 젊은 때가 청춘이라고 이름 지워지는 까닭이란, 아직 젊은 나날엔 지나버림에 대한 후회가 적은 탓이구나 알겠다.

 

후회가 적은 탓이구나. 그렇담 후회는 어찌 적게 하나? 모르지. 그래서 여기 이 청춘들은 미래를 바라고 준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선 지나버린 모든 것들에 대해 아예 까마득하거나, 혹은 지나 스치는 매 순간에 미리 그 후회를 거부할 준비가 마련돼있어야 하기에. 미래에 지금을 후회함이 자연스런 일이라면, 그에 어떻든 거부를 애쓰는 것이 또 우리 자연스런 마음이라면, 그 마음엔 근거가 필요할 일이다.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후회를 거부하기 위해서 필요한 근거란… 그 근거란 지나간 시간 그 안의 내 행동과 마음, 또 지나온 시간 여기의 내 행동과 마음이 될 것이다. 이제 여기 청춘들의 얼굴을 다시 슬쩍 본다. 무어 그리 진지한지 책에 깊이 골몰하는 저 얼굴들. 보는 것은 책이지만, 실지로 바라보는 것이란 그네의 미래와 후회에 대한 거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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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엔 수능을 담고 있는 책과 의료 전문원, 법학 대학원, 회계 전문 자격증 등'전문직' 세 글자를 담고 있는 책들, 그리고 소위 그냥 책이라 불리는, 문학과 인문학 서적들도 있다. 드디어 이 일반, 현시대의 청춘 속에 들어온 것 같아 생각이 많다.


이 어둠 속, 무슨 책을 좇아야 나는 미래를 잘 준비하는 일인가에 대하여. 어느 선택이 올바른 미래로 가는 길인지에 대하여. 그로써 지금 포기한 낮의 광장이 미래의 후회로 남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하여. 즉, 가버린 귀한 시간에 대한, 미래의 내 짙은 아쉬움에 대하여. 생각이 많아진다.


무얼 택하고 무얼 좇아야 할까. 그리고, 이런 알 수 없는 것들에 분명한 답을 골몰하는 것은 얼마간의 의미를 가질까. 많아지는 것은 언제나 생각뿐이다. 그리고 많아지는 것이 생각에서 그치면, 언제건 참 곤란한 일이 생긴다. 풀 길이 없는 고통으로 들어가 헤매이는 일. 궁리할수록 차오르는 늪의 수위 같은 감각. 도망칠 수 없는 내면의 고통으로 들어가 큐브를 짜 맞출 궁리를 할수록 큐브는 이지러지다.


내 아버지 말씀마따나 답을 안다면야 쉬울 일, 그러나 답을 미리 알 수 없기에 어려울 일이다. 생의 답이란 늘 결과론적이었던 때문에. 후행적인 평가로써 내리어지는 것, 혹은 스스로가 기꺼이 그리 느낌으로써 규명되는 불완전한 것인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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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자리에 와 앉아, '오늘의 할 일'이라는 제목으로 계획부텀 쓰기 시작했다. 노트북 우측 하단, 거기 저 혼자 떠 있는 날짜가 아직의 내겐 받아들이기에 너무 생경하여, 이 황망한 감각 앞에선 늘 할 일을 찾게 된다. 그러고 보면 내 군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 오늘의 할 일.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보직으로 발령받았는데, 담당 간부의 교육 파견과 사수 병사의 말년 휴가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앉았던 내 자리, 그 모니터와 전화기 앞이 떠오르는 단어이다. 관등성명조차 입에 익질 않아 어리바리한 티가 물씬 흐르던, 그때 쪼그라드는 나를 웃음에 떠올리게 만드는 단어이다. 오늘의 할 일. 하루 안에 처리해야 하는 일은 많고, 가르쳐 주는 이는 없고, 전화는 계속 오고, 이 모든 당황스러운 앞에서 나를 붙잡기 위하여 적어야 했던 단어, 오늘의 할 일이었다.

 

워드프로세서 빈 백지를 띄워, 오늘의 할 일 제목만을 덩그러니 써두고 황망히 길을 찾던 그때가 떠오른다. 어쩌면 지금, 그때만큼 치열치는 않아도 얼마간 황망한 따름인가보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당황 어린 질문이 내 안에 떠오르면, 언제건 돌아오는 이 단어의 앞.

 

길은 너무 많아 황망한가 뵈질 않아 황망한가를 잘 모르겠다. 어쩜 둘 다일는지도 모르지. 어쩜, 이것이 청춘의 문제일는지도 모르지. 청춘을 아름다이 여기는, 즉 청춘 지난 이들은 하나같이 우수에 젖어 회고하매 당시와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중얼거리다. 그때 이런 선택을 하였더라면, 하는 흔한 이야기. 다 알고서나 하는 이야기.

 

생각기론, 그네들 지금에 비로소 택할 자유가 적어지고, 기꺼이 떠올려 기대할 무언가의 미래인 희망이 자연히 적기 때문이라고. 몽매했기에 가능했던 미래와 희망에 대한 단순하고도 알이 꽉 찬 확신들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아닐지 싶다. 내 주변의 쓸쓸한 어른들은 그리 보였다. 이런 말을 하는 얼굴들이란 하나같이 참 그리 보였다. 그들의 쓸쓸함이란, 지나가 버린 나의 황금기에 대함이었다. 더하여, 그것이 축복인지를 몰랐던 무지에 대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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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할 자유가 적어진 때에, 차라리 마음껏 택할 수가 있던 과거가 사무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순리대로의 흐름이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반드시 내 지금 무자비한 택지의 앞이 기껍게 생각되진 못하겠다. 못하겠다. 이 택한 길의 과정과 끝을 알 수 없다면, 고로 어느 길을 택하건 그 끝 즈음의 내가 어떤 얼굴을 짓고 있을지 알 수가 없다면, 이 갈림길 앞은 참 살 떨리는 감각을 짓게 되는 것이다. 어쩜 내 과장된 감상일는지도 모르지.

 

선택할 자유가 무궁하다는 것이 청춘의 축복이라면, 무궁한 자유에 따르는 무궁한 책임들은 청춘이 떠안아야 할 짐일 것이다. 그 책임이란 내적인 고뇌와 번민이 전부라지만, 그것만으로도 참 묵직한 양감의 것이 아닌지. 이 모든 번민을 떠안고 의심과 두렴과 회의와 가끔의 무력감과 자포자기를 떠올리는 충동적 발상과, 그 외 지금 채 떠올리지 못한 비슷비슷한 네거티브를 안고 걸어 나가는 것. 이것이 우리 지금 청춘의 모습이 아닐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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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땠든 걸어가야만 한다는 사실만이,

변치 않고 저기 굳게 서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맞는 해는 언제나 이미 쨍한 뒤이다. 낭패감과 부끄럼을 안고 그럼에도 꾸물거리는 시간이 지나, 어김없이 스터디카페에 와 앉는 매일. 이곳 스터디카페는 퍽 어둡고 조명은 아늑하다. 쨍한 해를 피해 들어온 동굴 같은 이곳, 한낮의 밤인 이 공간엔 사람이 참 많고 그 머릿수만큼이나 책도 많아, 내 자리를 찾아 돌아드는 동안 흐르는 눈길 켠으로 그 모든 책들의 이름들이 눈동자에 닿아 온다.


삼삼오오 모인 이들은 수능 책, 저 이는 CPA 책, 또 어떤 이는 PEET 책을, 심지어는 알아볼 수 있는 자가 ‘법 法’자 뿐인 무시무시한 책. 보는 책은 각각 다르지만, 바라 그리는 것은 모두 같을 것이다. 꿈이겠지. 그러잖고서야 대낮부터 이 좁고 어둡고 아늑한 곳엘 돌아들어, 각자의 책들에 골몰하며 미간 좁힐 이유가 하등 없을 테니.


오늘, 바깥 날씨는 간만에 화창하던데… 요 며칠의 하늘엔 구름만 잔뜩 끼어 골이 나 있던 참이라 화창한 오늘이 더 간지러웠다. 그래도 이리로 돌아들어야겠지. 내 아직 할 일이 남은 탓에. 내 하는 일이란 까짓것, 졸업을 위한 한자 시험과 토익 시험과 컴활 시험 준비라지만, 그래도 할 일이 남은 탓이다.


그러나 역시 의욕 적어지는 오늘 같은 때면, 나는 내 책에서 눈을 떼고 주변의 여러분들을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아무렇지 않은 것일까. 슬쩍하는 눈으로 그네들의 뒷모습을 관찰하였다. 어제와 꼭 같이 여전히 책 속에 묻힌 저 모습들. 심각한 혹은 절실한 눈들을 하고 있다.

 

이 동굴 안이 무어 그리 사랑스러울 리야. 누구껜들 기껍겠냐만, 그럼에도 각자 기어이 발 끌어 돌아오는 까닭이란, 이 안에 제 꿈의 희미론 모습이 어른거리는 때문, 그뿐이겠지. 잡을 듯 뵈는, 달리 말하자면 잡잖고선 곧 흩어질 듯 위태론 제 꿈의 손짓을 따르는 것이겠지. 각자는 책을 피어두고, 그를 대하여 심각하거나 절실한 눈들을 하고 있었다.

 

저들의 눈은 심각하거나 절실하거나, 어떤 모양이건 눈동자에 별을 띄우고 있었다. 맞대하는 것은 책 편이지만, 실지론 그 책자 아득히 너머를 바라고 있는 눈빛들. 아름답다. 대낮에도 시커먼 이 동굴 속을 돌아들어, 그보다 좁은 각자의 책상 위엘 책 하나 피어두고 무엇 그리 볼 게 있다고 저렇게 살뜰한 눈들을 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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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가장 낮은 곳에 처한 개구리에게는 바라볼 것이 하늘과 달과 별뿐이라 그런 것일까. 아니면 지극히 어두운 때에야 보이는 별들엔 누군들 하염없어질 따름인 것일까. 어땠든, 동굴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내려 오면 약속인양 별을 바라보게끔 된다.


아니, 우린 저편 위의 별만을 바라기 위해 가장 낮고 어두운 곳으로 찾아드는 것일지 모르겠다. 스스로 기꺼이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 똬리를 틀게 만드는 것이 저 별들뿐이라면. 나도 나의 꿈만을 열심으로 바라기 위해서, 내일도 떼이지 않는 발을 끌어 이 동굴 속을 찾아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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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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