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절정 [문학]

시퍼런 수정의 검
글 입력 2020.05.04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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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게으른 젊음인 나는

도대체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

무력감이 샘솟는 오후이다.

 

그 쉽다는 토익 스피킹 조차도 일주일째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하루 온종일을 이 조용한 곳, 스터디 카페에 자리 잡아 노트북을 대면하곤 내가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제는 종잡기 어렵다. 주변으로 고개를 돌리면, 각자 무언가를 열심으로 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각각의 생존을 위한 처절함을 방증하고 있었다. 젊음의 마땅한 모습, 나는 일찍이 그를 잃어버리었다.


어디서부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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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늘 사라져 있다.

내겐 그렇게 감각된다.

아침의 명랑한 기운을 안고 이곳에 앉을 때의 어떤 가슴 찬 감정은, 정신을 차리고 보면 없고 시간은 함께 사라져 있다. 그리곤 늘, 지금 이 맘 오후 5시. 내 가장 못 견뎌 하는 시간에 있다.

 

나는 오늘 무얼 했던지.

글을 많이 썼던가, 아니.

읽어야 할 책이 많은데 책에라도 집중하였는가, 아니.

핸드폰을 보거나 잡다한 것에 집중을 빼앗겼는가,

그것도 아니. 공부는 아주 아니.

무엇으로 시간은 사라졌던가. 아아,


내 썼던 글을 돌아다보며, 그 등을 쓸어보며, 고칠 부분이 어디 없나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보았구나. 나는 내 글과 사랑에 빠졌구나. 곤란하다. 지금 글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한편 내 미래의 글에 더더욱의 큰 사랑을 품게 된다는 것이고, 점차 내 진정 꿈인, 시인된 나의 형상을 심상 속에 점차 또렷이 그려내어 잊을 수 없게 되어간다는 것을 함의하기에.

 

나는 어제 쓴 나의 글을 만족하여, 그에서 어떤 안도감과 만족감과 조금의 구원감을 느끼며, 달리 말하자면, 자족의 환상 속을 헤엄치며 시간을 까먹었다. 환상 속에 정처해 시간을 삼키었다. 시인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차라리 그 고민을 하는 것이 옳을까. 이렇게 못할 짓이라면. 그 쉬운 컴활, 토스마저 집중이 안 될 일이라면. 배고프고 어려운 저편 길을 택하여야 하는 것일까.

 

무엇으로 나는 일단의 독립을 성취할 수 있을는지.

시로의 여정은 그다음에야 꿈꿔볼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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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가장 귀중한 시기에 나는 가장 어려운 시험에 빠지었다. 지도에 없는 길로 마음이 쏠리고 있음에. 몰랐다면, 조금 달랐을까. 그러나 결단을 내리질 못할 값이라면, 한심한 고민에 불과한 일이다. 내내 우유부단하기엔 생의 시간이 가차 없다.


아마 배부른 돼지로, 나는 화하였나 보다. 일단 등이 따수우니 나는 그제야 이런 허황된 투정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일게다. 아마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사치. 이것은 비대해진 의식이 짜내는 권태로움일지 모른다.


오늘같이 저물녘 햇발이 내 의식의 숨통을 황홀이 조여올 제, 나는 다시금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깨어나야 한다. 저 바깥에 있을, 어떤 처절함과 눈물겨운 투쟁을, 지금 내 생애의 반경에서 극단으로 멀어진 그 ‘삶’의 전당을, 다시금 데려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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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움이 곧 가장 큰 사치이자 죄악이 되는 곳,

새벽 시장과 공판장의 속,

장사치와 경매인들이 부르짖는 악에 찬 목소리들,

 

생의 지독함과 가차 없음에 스스로를 기꺼이 바친 그 모습들을. 나는 다시금 모시고 와, 눈앞에 둔 뒤에는 열렬히 부끄러워야만 한다. 젊은 권태를 깨어내기 위하여, 삶의 그 처절한 전당을 다시금 획득하여야 한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모든 이 땅의 부모 된 자들, 그들이 삼켜내야만 했던 그 쓴 것을 다시금 이 안 켠 신당으로 모시어야 한다.


대결의 필요와 의지, 어떤 절정.

이런 때에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시가

내 안에는 몇 되지 않는다.


 





절정

 

이육사

 

매운 계절의 채찍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 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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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위태한 상황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쫓기고 쫓기어, 원치 않는 발걸음의 끝, 어떠한 첨단에 선 사나이를 다시금 본다.


북으로 북으로. 북방은 갈수록 추운 나라이고 그의 등을 겨울 채찍이 휘갈긴다. 휩쓸리어 간다. 무엇의 틈바구니에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북방은 얼어붙은 나라이고, 우리 인간은 그 앞에 한없이 작다. 체온을 가진 존재인 한, 몇 겹의 의복으로 싸맬지라도 그의 채찍을 피할 길이 없어, 서서히 얼어붙는 살점 앞에 우리는 아무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간다.

 

간다. 가야 할 곳 분명치 않은 길을 걷는다. 그것은 걷는 것일까. 다만, 걸어내는 뿐이라. 닿을 곳 없는 여정의 길은 끝없이 숙명 같은 길. 걸어가는 것이 아닌 걸어내는 것이다. 영원한 천형의 길인 것일까? 알 수가 없다. 뒤 켠 십 리에는 멀리 추격자의 소리. 걷지 않으면 따라잡힐 듯 두려움이 계절의 채찍과 함께 날아와 등줄을 탄다. 그러나 어디로까지 걸어내야 하는가.

 

이곳 남쪽에서부터 북녘 저편에 이르는 때까지의 풍경이, 내 안에 흐른다. 점점 굽어가는 사내의 허리와, 그 위에 올라탄 등짐의 무게와, 패여가는 낯과... 그 배경의 산하는 가을에서 겨울로, 겨울은 이내 북방의 칼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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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의 겨울과 북녘의 겨울은 같은 겨울인가 문득 질문해보게 된다. 그 둘은 다른 것 같은데, 왜 그리 다르게 인식되고 무엇이 그렇게 만드는가 질문한다. 위도에 따른 온도의 차, 그 너머 무언가가 북녘에는 있다. 북녘의 겨울은 겨울 이상의 무언가이다. 나는 북방에 가본 적도 없이 잘도 이런 막연한 생각이 들고, 이것은 무엇일까 계속 질문해본다.


북녘에 부는 바람은 바람이 아니일까. 그것은 바람 이상의 무언가. 머리칼을 흔드는 정도의 남풍에는 멀리 남쪽 바다가 따스하다만, 북풍에는 북녘보다 더 멀리, 극점에서 비롯된 한이 서려 있다. 기세 좋게 나부는 그 바람은 머리칼을 풀어헤친 뒤에도 긋지 않아, 피부 깊숙이 가슴으로까지 스며 저린다. 이 바람은 무엇인가. 이 묵직하고 거세며 예리하게 날이 선 것은. 나의 몸, 온 정신을 아득히 흔드는 이 깊고 깊은 것은.


북녘의 겨울은 이렇듯, 해와도 멀뿐더러 바다와도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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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모든 것은 얼어붙어 있을 극점, 온기는 차마 고개 젓고 떠난 모진 땅이다. 이곳에선 무엇으로도 풀리지 않을 듯 앙금 같은 단단함. 얼어붙고도 겹겹이 쌓여 얼어붙은 강인한 결정이, 세찬 바람 속에 순수로 제련된다. 아무 기척도 없는 텅 빈 곳에서, 영원히 연마된다. 어느새 시퍼런 칼날은 벼리이고, 바람 끝에도 그 한이 묻으면, 흘러 흘러 이 사내의 등에 이르러 베이인다.


내 안, 가보지 않은 북녘은 극점과 사뭇 닮아 있다. 그리고 그 둘은 이렇듯 바람으로 이어져 있구나. 극점에서 북녘으로, 빙하의 칼날이 쏘아져 어느 사내의 등줄기에 때린다. 멈출 수 없을 듯한 노도의 복판을, 어리석은 한 사내가 등으로 맞고 있었다. 쨍하니 빛나는, 순수한 수정의 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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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시퍼런 한기를 패고 사내는 간다. 어디로까지 걸어내야 하는가 하는 영원할 질문의 끝으로. 이 땅의 북녘 끝으로 다다른다. 아마 반도의 지붕 개마고원이었을 게다. 해발 1500m, 한반도 최악의 혹한 지대에. 극한에는 영하 40도에 육박하는 얼어붙은 칼바람의 고원.

 

광활한 고원. 무릇, 혹한과 고원이라 하면 반도 내에 한해서 이곳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일이 자연하다. 이곳을, 왜 하늘도 지쳐 채 미치지 못하였을까 상상해보곤 문득, 애초에 그 하늘은 무엇일까, 드디어 이 질문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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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하늘이라 하였던가. 다만 내 머리 위 아득한 멀리 구름 있는 곳, 그 위에 푸르거나 붉은빛을 머금고 있는 저곳을 하늘이라 칭하였던 듯싶다. 그러나, 화자는 무엇으로 저 하늘의 끝을 고하였나. 무엇을 근거로 하늘의 끝을 선언할 수 있었을까.


아마 고원의 높은 곳 어드메서, 그는 구름의 강을 내려다본 것이 아니었을까. 이때 하늘이란 구름 있을 곳이라고 한다면... 나는 종종 발밑에 흘러가는 구름의 강을 보며 하늘이 발아래에 있다고 착각하곤 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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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지쳐 끝이 난 곳 여기. 광활하고 높고, 그만큼 더욱 혹독한 고원. 해와도, 바다와도, 이제는 신록 대지와도 멀어버린 그 고원에, 보이지 않는 시퍼런 수정 검이 가득하다. 이제는 의복마저 찢어발길 듯, 사나운 그것은 소리로나 이곳에 가득하다. 하늘도 지쳐 끝이 나는 마당에 일전의 추격자들이야… 모든 기척이 사라지니 광풍의 소리는 마음에 더 쌀쌀하고 혹한의 땅 이곳 북방에, 서릿발이 칼날 져 있음은 당연하다. 비로소 그는 멈추어 섰으나, 머물 수는 도저히 없다.


고원의 끝 가장 우뚝 솟은 봉우리, 가장 높은 곳에 달하여 구름의 강을 멀거니 내려다본다. 등은 시퍼렇고 구름은 멀리서도 빠르게 흐른다. 봉우리의 끝은 또 하나의 극점, 발을 고쳐 디딜 곳조차 없는 이곳은 상상의 꼭대기이다. 한 발을 재겨 디딜 곳도 없으니 외발로 서 있을 밖에.


상상의 꼭대기, 반도의 지붕 위 첨단에 있는, 극점에서 비로소 마친다. 순례의 끝과 같은 심정, 무릎을 꿇고 싶으리라. 어디로 가야 하나. 어데다 무릎을 꿇으랴. 무릎 꿇을 데도 없다. 길은 한 점으로 응집된 뒤 소실되고, 비로소 마침이 아닌, 이 이상 갈 곳 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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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득하리라. 날 떠밀어 이리로 이끈 모든 숙명들. 여태 걸어온 여정과 서 있는 곳의 높이와 멀리서도 세차게 흘러가는 구름의 강. 이미 등은 한계까지 시퍼렇고 바람은 외발로 선 나를 떠민다. 재겨 디딜 곳조차 없는 여기, 한계에 다다른 사나이는 비로소 기꺼이 무릎 꿇고 망연하고 싶으나, 찬탄도 하고 싶으나 서 있을 밖에.


길의 끝은 곧 인내의 끝. 약한 한 몸을 이끌어 이 길의 끝으로, 버티며 버티며 걸어낸 끝 한계에 다다른 한 명의 인간은 비로소 마음껏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르고 싶으리다. 자신이 속한 세계, 처한 운명, 한 인간에게 부여되는 온갖 가혹함 들에 벅참과 억울함과, 그럼에도 숙명처럼 받아내고자는 어떤 결연함과, 그럼에도 한계에 다다를 인간 나약함과 그에 대한 근심 등 모든 생각들이 버무려진 숭고한 처연함. 아득하리라.


그러니 눈감을밖에. 무릎 꿇을 수 없나니, 눈감을밖에. 숙명의 무게를 눈감아 생각할밖에. 아득함에 눈 감고, 마음의 공동에는 저 밑 세찬 구름이 그대로 흘러간다. 곧 그 위로 무지개가 하나 핀다. 아아. 이 겨울은 저기 무지개로구나. 강철로 된 무지개, 오색창연히 채색된 강철이로구나. 한계에 벅찬 감정이 눈물의 결정으로 한 방울 떨어져 얼어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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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마지막에 등장한 겨울은 무엇인가. 모든 추위와 광풍과 고통과, 숙명. 극점에서 비롯된 한이 숙명과 섞이어 겨울은 고통의 계절인 동시에 고통의 세상이다. 환경적인 현실이자 사회적인 현실이다. 두 고통은 서로에게 업히어 더욱 감당하기 벅찬 것으로.


그러나 그에게 이 겨울은 강철이면서도, 또 한편 분명한 무지개이다. 고원 위 혹한 지대에서 강철은 그 어떤 것보다 차가운 것, 그리고 그만큼 강인하거나 질긴 것. 숙명만큼 질기거나 극점의 결정만큼 강인한 것. 극점의 결정에만큼 서리한이 서린 것. 그 차갑디 단단한 것을 밟아 건널 수 있을까. 지평선 너머로 이어진, 끝 뵈지 않는 또 다른 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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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된 길은 눈 감은 마음속에서 무지개로 된 강철 다리로 여정을 다시 잇는다. 가야 할 길, 마음의 갈 길이다. 눈 감아 생각할밖에. 아무도 없는 곳 첨단에서, 알아주길 바라는 허영이 아닐 순수한 그 마음은 비로소 숭고하고, 찬 방울 결정이 되어 떨어진다.


여기 발 딛을 길을 잃은 끝에 눈은 감고, 순수의 결정이 하나 떨어지면, 눈앞으로 다시 계시 같은 길이 펼친다. 허공의 위로 펼쳐지는 무지개는 마음의 갈 길. 여기서 무릎 꿇어 마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계속될 숙명은 고통이지만, 다시 길이 펼치고 걸어가는 수밖에. 고통으로 걸어내는 동시에 기꺼이 걸어갈 수밖에.


왜 무지개였던가. 극한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인 개인은, 그 스스로를 구원하는 따름인가. 왜 마음의 새 길은 무지개인가. 끝내 극한을 회피하지 않고 대면하는, 스스로를 긍정하는 때문인가. 이 길은 강철, 그러나 무지개. 걸어내야 하는 길인 천형인 동시에, 기꺼이 걸어갈 숭고한 길인 까닭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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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등을 팬,

시퍼런 수정의 검들이 이제 내 마음에 시리다.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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