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OST는 장면을 아름답게 만드는 음악이 아니다. 인물의 감정을 대신 말해주고 상황을 상징적으로 시청자의 머리에 각인시키는 장치이다. 드라마를 기억하게 만드는 것은 명대사, 명연기, 작품의 메시지도 있겠지만 이 모든 것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OST 또한 큰 역할을 한다.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도 그러하다. 원망과 선망 사이, 증오와 사랑 사이의 우정을 그리고 있는 이 드라마의 OST는 섬세한 인물들의 감정 표현이 특징이다. 인물들의 관계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서사로서 작동하는 음악은 단순 장면을 채우는 배경음이 아니다. 이 글에선 OST를 중심으로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다시 읽어보려 한다.

결국 모든 비밀은 들키기 마련이다
최유리의 「Reason」은 피아노의 단선율로 시작하며 극의 몰입도를 단숨에 끌어올린다. 이 곡은 어딘가 미스터리하면서도 상대가 숨기고 있는 무언가가 곧 드러날 것만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린 시절부터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자신을 발견했다. 그 과정에서 생겨난 뒤틀린 자기혐오와 상대를 향한 욕망,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이 곡은 노골적이지 않게, 그러나 분명하게 암시한다. 그래서 대학에서 재회한 은중과 상연의 반가움과 경계심이 공존하는 그 미묘한 순간, 상연이 은중의 남자친구와 비밀을 공유하며 은밀한 관계를 형성해 가는 순간에도 이 비밀스러운 선율은 다시 흘러나온다.
이처럼 이 OST가 사용되는 장면들을 살펴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보인다. 가사에서는 '그 이유를 오늘 너에게 말하게 될 거야.'라고 노래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이 문장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들킨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친구의 남자친구를 사랑하고 있다는 비밀, 친오빠를 둘러싼 진실, 그리고 오랜 시간 마음속에 품어 온 친구를 향한 뒤틀린 감정까지. 회차가 거듭될수록 하나씩 드러나는 비밀들을 이 노래는 가장 먼저 예고하고 있는 셈이다.

시청자가 상연을 끝내 받아들이는 이유
권진아의 「Hope」는 특유의 맑고 섬세한 음색이 돋보이는 곡이다. 이 노래는 오직 천상연이라는 인물을 위해 존재하는 OST다.
세상은 그녀에게 유난히도 야속했고, 누군가를 받아들일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마치 공기 없는 우주에서 겨우 숨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처럼 상연은 늘 위태로운 삶을 버텨 왔다. 그런 숨 막히는 시간은 오빠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알게 되면서 더욱 깊어진다.
하지만 「Hope」는 누군가가 상연을 구원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스스로를 구해내는 과정을 담아낸다. 상연은 스스로 세상 밖으로 걸어 나왔고, 스스로 김상학에게 문자를 보냈다. 무너진 자신을 끝없이 추락시킨 것도 자신이었지만 다시 끌어올려 내일을 꿈꾸게 만든 사람 역시 자신이었다.
은중은 누구보다 상연을 응원하고 다독이며 곁을 지켰지만 상연은 끝내 그 손을 쉽게 붙잡지 못했다. 그럼에도 은중이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상연은 메마른 사람이 아니었다. 온기를 지닌 사람이었지만, 그저 그 온기를 꺼내 보일 힘이 없을 만큼 오랫동안 지쳐 있었을 뿐이다.
'희망은 여기에 있어,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이 가사는 상연의 변화를 가장 잘 설명한다. 희망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녀의 마음속에 존재했다. 다만 오랜 시간 상처에 가려져 있었을 뿐이다. 그 희망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며 상연을 치유해 간다.
그래서 관객은 더 이상 상연을 친구의 남자친구를 사랑한 파렴치한 인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그녀가 품고 살아온 상처와 고독, 그리고 스스로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를 마주하며 비로소 ‘천상연’이라는 한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Hope’라는 단어는 희망이라는 거창한 명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를 향한 가장 소박한 바람이기도 하다. 네가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 다시 웃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괜찮아지기를 조용히 기도하는 마음. 이 노래를 들으며 상연을 바라보는 우리는 어느새 그녀를 묵묵히 응원하는 또 하나의 은중이 된다.

I find myself inside your eyes and I kinda like it, no I'm not
서리의 「Weird Mirror」는 대학을 졸업하고 온전한 사회인이 된 은중과 상연이 다시 마주하는 시간을 그린다. 두 사람 사이에 오랫동안 켜켜이 쌓여 온 애증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곡이기도 하다. 공동 프로듀서로 다시 만나 일적으로 대립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또다시 서로를 비교하기 시작한다. 내가 갖지 못한 것을 너는 가졌고, 너에게 없는 것을 나는 가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억눌러 왔던 열등감과 자격지심은 작은 갈등마저 비뚤어지게 만든다.
은중은 “너는 이제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지만, 마음은 그 말처럼 단순하지 않다. 자신이 몰랐던 상연의 과거를 알게 되며 연민을 느끼고, 함께 웃었던 시간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상연을 이기고 싶고, 가장 닮고 싶은 우상으로 바라보며 미치도록 동경한다.
상연 역시 은중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그 감정의 결은 은중과 다르다. 상연은 은중을 동정하지 않는다. 그저 가지고 싶고, 동시에 부수고 싶은 존재로 바라본다.
반대로 은중은 타고난 다정함 때문에 상연에게 상처를 주고도 결국 그 상처에 자신이 더 아파하는 사람이다. 다시 손을 내밀고 타인을 위해 기꺼이 진심 어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를 가장 깊이 이해하면서도 끝내 가장 아프게 만든다.
'You’re my mirror.'
곡의 제목처럼 은중과 상연은 서로의 거울이다. 상대를 바라볼수록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결핍과 욕망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끊임없이 끌리면서도, 끝내 그 거울 밖으로 걸어 나와 나란히 설 수 없다.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이기에 가장 멀어질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를 안고 살아간다.
음악적으로도 「Weird Mirror」는 「Reason」과 닮아 있다. 다만 「Reason」이 학창 시절의 불안과 비밀을 담아냈다면, 「Weird Mirror」는 한층 세련되고 도시적인 사운드로 사회인이 된 두 사람의 관계를 비춘다. 같은 감정이 시간이 흐르며 어떻게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가는지를 음악의 질감으로도 보여 주는 곡이다.

변해 가는 삶과 변하지 않는 감정
9화 엔딩, 성인이 된 은중과 상연은 처음으로 단둘이 술을 마신다. 그 자리에서 상연은 대학 시절, 은중이 누구보다 존경하고 좋아했던 자신의 어머니가 이미 그때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몇 년이 지나서야 털어놓는다. 은중에게 동정받기 싫어서 가장 큰 상실마저 홀로 감당한 채 살아온 상연은 “어떻게 어머니가 돌아가시는데 자존심을 먼저 챙길 수 있냐.”라고 묻는 은중에게 담담하게 “이게 나야.”라고 말한다. 감정을 애써 눌러 담은 그 무미건조한 목소리는 오히려 더 먹먹하게 다가온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은중은 당시의 상연을 떠올리며 가슴이 아팠지만, 동시에 더는 그런 말들에 흔들리지 않기로 다짐한다. “너의 엄마 찬스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 너는 이제 내게 아무것도 아니기에.” 은중의 이런 모순된 심경 변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서리의 「Color Palette」는 이 드라마의 주제를 정통으로 관통하는 곡이다.
우리에게도 소중하게 생각했고, 사랑했고, 지금도 문득 그리워지는 인연이 있다. 하지만 그 인연이라는 것 또한 시간 앞에서는 얄팍해진다. 팔레트 위에 새로운 색을 더하고, 또 덜어내듯 삶도, 계절도, 사람도, 감정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은중과 상연’은 그 변화를 그리는 드라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변화하는 관계와 상황 속에서도 변치 않는 감정만이 끝내 두 사람을 괴롭히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그 자리에 서서 너를 미워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면 여전히 나 자신만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극 중 은중은 말한다.
“싫은 게 아니라 미운 거야. 싫어하는 건 생각이 안 나서 좋은 거고, 미워하는 건 생각나서 힘든 거야.”
반면 상연은 이렇게 고백한다.
“나에게 삶이란 열어보기 힘든 상자다. 돌아보니 결국 몇 개의 이름만이 남았다. 윤현숙, 천상학, 류은중. 사랑을 줄 줄도 받을 줄도 몰라서 너를 좋아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나는 힘이 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끝내 온전히 미워하지 못한다. 그렇다고 사랑만 할 수도 없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상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상연은 은중을 상처 입히고도 스스로 더 괴로워하고, 은중은 상연을 밀어내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서로의 애증이 상대를 향한 감정인 동시에 끝내 극복하지 못한 자기 자신을 향한 감정이라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알고 있기에 더욱 괴로워한다.
삶을 살아가며 수많은 색들이 오고 간다. 시간이 흘러 그 색이 얼룩이 되더라도 끝내 놓고 싶지 않은 인연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시간에 의해 조금씩 훼손되어 가는 저들의 인연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고 끝내 가슴이 아파지는 것이다.
가장 사랑했고 가장 미워했던 친구를 기록하는 법
14화 엔딩. 은중은 암에 걸린 상연의 마지막을 함께하기 위해 스위스로 향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상연이 쓰러지는 순간 마지막 트랙인 서리의 「Note and Pencil」이 조용히 흘러나온다. 이 곡은 은중과 상연의 서사를 담은 OST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어 가사로 이루어진 노래다. 그만큼 인물들의 감정을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전하고자 했던 곡처럼 느껴진다.
'나는 연필과 같이 하루도 쉬지 않고 적어왔네, 이젠 잠시 쉬어 가려고 하네 우리의 발걸음.'
'너는 종이와 같이 항상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네, 이젠 잠시 덮어 두려고 하네 눈물 마를 때까지'
드라마를 끝까지 보고 나면 이 가사는 두 사람의 마지막을 그대로 닮아 있다.
마지막 순간, 상연은 은중에게 말한다.
“끝내 네가 나를 받아주는구나.”
평생 자신을 누군가 온전히 받아 줄 리 없다고 믿었던 사람. 그리고 그 믿음을 만들어 버린 사람이 은중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끝내 상연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 또한 은중이었다.
이 노래의 연필은 은중이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써 내려간 사람이 은중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이는 상연이다. 상연은 종이처럼 은중의 이야기를 묵묵히 받아 주었고, 이제 눈을 감으며 잠시 그 노트를 덮어 둔다. 은중 역시 가장 사랑했던 친구의 죽음을 더 이상 눈물 없이 떠올릴 수 있을 때까지 그 노트를 쉽게 펼쳐 보지 못한다.
차라리 끝까지 미워하기만 했더라면, 좋은 기억만 남아 있었더라면 조금은 덜 힘들었을까. 사랑과 미움이 너무 오래 뒤섞여 있었기에 남겨진 사람은 어느 하나의 감정만으로는 친구를 기억할 수 없다.
드라마는 그렇게 끝나지만, 마지막까지 귓가에는 상연의 한마디가 오래 맴돈다.
“다음 생엔 좋은 친구가 되어 줄게.”
결국 「Note and Pencil」은 이별을 노래하는 곡이 아니다. 한 사람의 삶을 끝까지 기록해 준 친구, 그리고 그 기록을 언젠가 다시 펼쳐 볼 수 있을 때까지 잠시 덮어 두는 시간을 노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