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죽음의 지붕 아래, 이야기 미술관 - 이야기 미술관 [도서]

<이야기 미술관> (이창용, 2024)
글 입력 2024.04.15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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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미술관>의 서문에서 저자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음악이 없는 삶은 대부분 사람에게 상상조차 고통스러운 일일 텐데, 미술은 무엇이 달라서 삶과 무관한 것으로들 여길까? 저자는 미술에 대한 취향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답을 내놓는다. 예컨대, R&B, 댄스, 얼터너티브, 포크 등을 주로 즐기는 나는 록, 재즈, 트로트 등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조금 아쉬울 순 있어도 그럭저럭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미술에서도 내가 좋아하고 아끼는, 삶에서 떼놓을 수 없는 작품군이 생긴다면 없어져도 그만이라는 듯 무관심할 수는 없지 않겠냐는 것이다.

 

재치 있는 발상이다. 다만, 음악보다 미술에서 취향을 찾는 일이 훨씬 어렵지 않느냐는 반문이 떠올랐다. 재즈, 발라드, 록, 트로트 등은 모두 대중음악의 장르이다. 반면 르네상스, 인상주의, 큐비즘 등 가장 흔히 들어보고 친숙하게 느껴지는 사조도, 심지어 팝 아트(pop art, 문자 그대로 대중 예술)조차도 진정한 의미에서 ‘대중미술’이라고는 볼 수 없지 않은가?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대중에게서 인기를 얻겠다는 목표가 미술계에 적절하게 받아들여진 역사는 없다. 미술의 장만큼 상징자본이 공고하게 작동하는 영역이 또 없으니 말이다. 미술의 장에서 대중이 논외인 만큼 대중에게도 미술이 멀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의문을 한편에 품은 채, 책의 안내에 따라 미술 작품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방들을 거닐며, 미술 취향을 발견하기 위한, 조금은 어려울 것처럼 느껴졌던 여정을 기꺼이 떠나기로 했다. 서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어떤 공명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술은 슬픔과 고통에서 나오기도 하고, 기쁨과 간절함에서 샘솟기도 합니다. 우리의 모든 감정에서 예술이 탄생하는 것이죠. 마르크 샤갈이 “예술에 대한 사랑은 삶의 본질 그 자체다”라고 했듯 우리의 삶에도 예술이 자연스레 스며드는 순간이 왔으면 합니다.

 


나 또한 예술이 결코 부차적 영역으로 밀려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술 작품 속에는 늘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에는 삶이 담기고, 삶은 이야기에서 또다시 언어를 얻어 서로 닮아간다. 이야기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하므로, 결국 인간의 근본에 예술이 있다는 마땅한 사실.

 

그걸 잊은 적은 없지만 유난히 미술 작품 속의 이야기는 화석처럼 땅속에 묻힌, 범접하기도 어렵고 생동하지 않는 낡은 것으로 취급해 왔던 것 같다. 그러나 <이야기 미술관>을 거닐며 새삼 깨달은 것은 아무리 저 높이 걸린 액자 속에서 오랜 시간 칭송받은 작품이어도 그것이 만들어진 순간에는 언제나 가장 가까운 현재가 임박한 이야기를 투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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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베르트 모리조의 그림 속 모성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다. 여류화가의 길을 개척한, 자유롭게 계속 그림을 그리겠다는 조건을 내걸고서야 결혼할 결심을 할 수 있었던, 평생 800여 점의 그림을 남긴-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이었던 그의 그림 속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아이를 물끄러미 보는 언니의 모습. 함께 화가로서의 길을 걸었으나 그림이 팔리지도 않고, 여성이기 때문에 직업 화가로서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하여, 결국은 강요당한 결혼을 하게 된 언니 에드마 모리조의 표정을, 베르트는 조용히 들여다본다. 당대의 비평가들은 그를 두고 여성만이 감각할 수 있는 모성애를 잘 보여주었다는 식으로 호평했다고 하지만, 저자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아이를 내리깐 눈으로 조용히 바라보는 에드마의 모습을 담아낸 베르트의 복잡 미묘했을 심정을 그려본다. 아마 베르트에게는 화가의 길을 더는 걷지 못하게 된 에드마의 현재가 자신의 가능했던 한 가지 미래와도 같이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그 심정이 오늘을 사는 감각과 지독하게도, 별다른 바 없이 느껴졌다. 이렇게 <이야기 미술관>의 영감의, 고독의, 사랑의, 영원의 방을 거니는 동안 깊이 묻혀 있었던 이야기들이 생동하는 것을 느끼면서, 또한 모순되게도 생동이 있기에 이어지는 종말, 죽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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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의 방에서 만나본 베르트 모리조의 이야기 속에서는 예술에 대한 열망이 조용히 질식해 간 것을 목격했지 않은가. 고독의 방에는 “나에겐 죽음의 천사가 늘 함께 있었다”고 말했다는 뭉크의 이야기가 있었다. 가족들은 너무 이르게 세상을 등지고, 자신 또한 끝없는 병환에 시달리며, 세 명의 연인에게서 배신과 상처만을 얻은 뭉크는 벼랑 끝에 내몰린 심정으로 “자연을 꿰뚫는 거대하고 끝없는 절규”를 듣고 그 유명한 <절규>를 그렸다고 한다. 그런 한편 <태양>과 같은 그림에 빛나는 희망을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의 천사의 날갯짓을 알기에, 오히려 생을 더욱 찬란하게 감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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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방에는 영원한 기다림의 순간이 담긴 밀레의 이야기가 있었다. 가족의 응원을 받으며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먼 길을 떠난 밀레는 생활고에 시달리느라 고향을 다시 찾지 못했다고 한다. 밀레를 그리던 사랑하는 가족들은 결국 마지막까지 그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들의 기다림은 밀레의 안에서 죄스러움과 비애로 끝없이 덧그려졌을 것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심부름을 보낸 어린 아들이 돌아오길 애타게 기다리는 부부를 그린 그의 <기다림>이라는 그림에서 노을이 영원히 불탈 것처럼 붉은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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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영원의 방을 나서면서 순간마다 임박하는 죽음을 떠올리라는 직언을 마주한다.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라는 그림의 중앙 하단에는 일그러진 두개골 형상이 그려져 있는데, 이는 개인적인 탐욕으로 중대한 실정을 저지르려는 왕에 대해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 즉 죽음 앞에 덧없을 인생을 생각하며 순간을 쫓는 것이 아니라 불변할 가치를 추구하라는 비판을 남긴 것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처럼, <이야기 미술관>에서 마주치는 이야기는 먼지만 살짝 털어내면 선명한 색채를 금세 드러내며 되살아났다가, 또한 그 생동하는 이야기가 액자 속의 순간으로 고요히 잦아드는 죽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영감의, 고독의, 사랑의, 영원의 방은 죽음의 지붕을 나란히 덮어서 ‘이야기 미술관’을 축조해 낸다.

 

‘대중음악’이라고 했을 때 저마다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것들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케이팝 아이돌, 음악방송, 공연, 음악차트, 밴드, 재즈, 댄스, 콘서트, 페스티벌, 뮤직비디오, 유튜브 플레이리스트 등. 한동안 꽤 화제가 된 “지금 무슨 노래 듣고 계세요?” 콘텐츠에서 사람들이 답하는 아무 노래. 대중음악은 거리에, 사람들의 손안에, 축제에, 범람하는 콘텐츠 속에, 밤이든 낮이든 노동하든 즐기든 쉬든, 언제 어디에나 있다.

 

미술은 경우가 다르다. ‘대중미술’은 너그럽게 봤을 때 어떤 ‘주의’나 시도일 수는 있어도 실재하는 영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래서 <이야기 미술관>으로의 초대가 더욱 귀하다. 세상의 모든 미술 작품이 다 사라지게 두어도 이것들만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작품이 모인 나만의 작은 방주가 오늘 새로 지어졌다. 살고 죽는 이야기까지 함께 올라타는 곳이다. 당신만의 미술 망명처는 또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곳에 어떤 이야기가 모여드는지 귀 기울여 볼 때 삶이 더욱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안내를 기꺼이 자진하는 이 책과 그 시작을 함께해보는 것도 좋으리라.

 

 

[이명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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