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부드럽고 가볍게 날아 오르는. - 완벽한 날들 [도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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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여름에 지쳐서 무겁게 끌리는 걸음으로, 마음은 또 분주하게 자주 걸은 길목이었다. 잠깐 일하게 된 곳 근처에서 양장본 책 위에 와인잔이 올려진 선화, 그 위로는 “BOOK & DRINK”라고 작은 아치형으로 문구가 적힌 간판을 발견했다. ‘문학살롱 초고’의 입구였다.
저런 곳에서 아무것도 재고 따지지 않고 시간을 보내려면, 얼마나 시간을 더 보내야 하려나?
건정 찾아보니 멋진 공간인 것 같아 마음에 담아두면서 버릇처럼 볼멘소리를 주워섬겼다.
지적 허영인지 마음의 양식인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지 지나온 모든 시기에 책이 많은 공간에서 시간을 보냈다. 지금은 그럴 시간이 좀처럼 나지 않지만 그래도 책이 가득 꽂힌 서가를 보면 마음이 풍족하다. 어릴 땐 읽기보다 책등을 살펴보는 시간을 더 좋아하기도 했다. 서가를 구경이나 하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게 즐거워도 됐던 시절이었다.
머리가 굵고 나서는 좀 더 손쉽게 행복해지는 방법을 애용하게 됐다. 꿀떡 넘어가면서 알근하게 기분을 뜨게 만들어주는 향긋하고 입에 단 술의 힘을 때때로 빌리는 것이다. 그렇게 고양된 기분으로 즐거운 마음은 더 부풀리고 괴로운 마음은 둥글게 깎아냈던, 어쨌거나 마음에 더 충실해질 수 있었던 밤들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책과 술이 함께하는 멋진 공간을 좋아한다. 달콤한 술에 쉽게 들뜨고 늘어선 책등을 보면 따뜻한 향수가 스치니까. 문학살롱 초고도 그런 공간이었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 좁은 통로를 지나면 나타나는 벽돌로 둘러싸인 공간은 비밀을 엿보러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정갈하게 책이 정리된 작은 진열대가 입구에서 눈길을 기다리고, 짙은 색의 앤틱한 나무 의자와 테이블이 각기 다른 모양새로 듬성듬성 늘어섰다. 이곳이 정말로 근대 프랑스의 살롱이었다면 퍽 은밀한 초청을 통해 찾게 되는 곳이었으리라.
문학살롱 초고는 책을 판매하고, 문학과 페어링 된 칵테일을 비롯한 다양한 주류와 간단한 안주를 판매할 뿐 아니라, 낭송회와 북토크, 문학과 등을 맞댄 음악 연주, 소셜라이징, 공연 등 다양한 행사를 주최하는 공간이었다. “읽고 쓰는 사람들을 위한 아지트”라는 표현 그대로, 생동하는 문학이 있는 공간이다.
합정을 방문한 친구와 함께 처음 가보게 된 초고에서 ‘완벽한 날들’ 문학 칵테일을 주문했다.
“부드럽고 가볍게 날아 오르는”
다른 메뉴보다 추상적인 설명이 덧붙어 있었다. 궁금해하며 받아 본 잔은 구름 같은 질감의 크리미한 거품층 밑에 연둣빛이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달콤하고 포근하게 혀에 닿다가 둥근 시트러스 향 뒤로 꽃향기가 피어오르는 칵테일. 정말 부드럽고 가볍게 날아오르는 모습과 맛이었다. 칵테일과 함께 서브 된 『완벽한 날들』도 꼭 이런 질감의 글인 걸까? 들떠선 책장을 넘겨 보았다.
초고에서 새로 나온 당시 ‘완벽한 날들’을 설명한 내용을 보면 “때로는 나긋하게, 때로는 힘차게 자연을 노래하는 메리 올리버의 시처럼”, 이라는 부분이 있다. 그 표현 그대로, 이 책에서 만나보게 된 올리버는 자연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말을 해도 노래처럼 들릴 것처럼, 필치에 음률이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가 계속해서 쏟아내는 자연에 대한 사랑은 결국 생에 대해 끊이지 않는 애정으로, 강에서 바다로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낙관보다는 비관이 익숙한 세태를 살아왔기 때문에, 사랑을 이야기하는 작가는 가까이하기 어렵다고 느껴왔다. 하지만 이미 기분이 둥실 떠올랐기 때문이었을까? 올리버의 글에는 놀랍도록 빠르게 빠져들 수 있었다. 원래는 책을 본 감상을 정리하려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보다도 초고를 마주친 기억, 실제로는 어떤 공간이었는지, 그런 공간을 애호하게 된 이력과, 식전주처럼 마신 독전주讀前酒가 어땠는지 따위를 공들여 설명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진부한 표현도 있듯, 받아들일 준비가 된 마음으로 올리버의 글을 읽어보는 며칠간은 ‘완벽한 날들’에 근사했다. 그때 떠돌던 생각을 붙잡아 두려고 한다.
촉촉하고 풍성한 세상이 우리 모두에게 새롭고 진지한 반응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 세상은 아침마다 우리에게 거창한 질문을 던진다. “너는 여기 이렇게 살아 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이 책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 그 시들은 산문과 달리 무엇을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저 책갈피에 앉아 숨만 쉰다. 그 시들은 몇 송이 백합 혹은 굴뚝새 혹은 신비한 그림자들 사이의 송어, 차가운 물, 거무스름한 떡갈나무다.
- 서문 中
서문은 앞으로 어떤 글이 펼쳐질지를 충실히 예시한다. 올리버는 어떤 인터뷰에서 자신을 ‘보도자reporter’로 소개했다. 그의 글에서 그가 정말로 충실한, 산책하는 보도자였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에게 집 근처의 자연을 산책하는 일과는 으레 생각하듯 한가로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일이 아니라 삶을 충만하게 살아가기 위한 매일의 의례였다. 그리고 그는 산책길에서 길어낸 자연과 생에 대한 사랑을 성실하게 노래했다.
서문에 이어 첫 장 「흐름」에서 그가 말하는 ‘보도’가 어떤 것인지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산문 ‘흐름’에서 그는 해변에서 떼죽음을 맞은 까나리 떼의 생명이 꺼져가는 모습을 유심히 묘사한다. 얕은 물에 고립된 “너무나도 그로테스크한 몸, 지독히도 불쾌한 입”을 가진 아귀가 한편으로 얼마나 영롱하게 초록빛 눈을 반짝이는지에 찬사를 보낸다. 무엇도 망각하지 않고 기억할 듯이 “가장 깊은 우물보다도 깊”은 눈을 한 혹등고래가 만들어 낸 물안개의 세례를 받았던 일을 기억한다. 그러다 이내 자신과 일행들조차 바다에 보트를 타고 나간 “오후 동안 바다생물이 된” 이야기를 이어서 한다.
그는 착실하게 거니는 동안 위처럼 목도하게 된 자연에서의 한순간 한순간을 ‘기회’라고 표현한다. 어떤 순간이 더 대단하고 중요하고를 가릴 것 없이 그는 모든 기회를 소중히 대한다. 살고 죽는 존재를, 그 존재들의 세계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기회. 존재하는 방식 그대로 이치를 실현하는 자연에서 어떤 영원한 관념을 발견할 기회. 그것을 노래하며 자신도, 인류도 그 일원으로서 존재한다는 은총을 되새길 기회로써 말이다.
그런가 하면 아름다움을 강렬히 감각하는 만큼이나, 그가 표현하는 슬픔 또한 깊다.
모든 비참하고 아름다운 날들을 만들고, 부수는 하느님에 대해, 우리가 무얼 할 수 있을까?
…
고사리숲을 늪을 어두운 숲을 지나는 하느님의 무거운 발자국들 물이 불어난 강 같은 하느님의 숨결
…
아직, 이따금,
얼마나 이해를 갈구하는지.
- 세 개의 역사와 벌새 한 마리 中
존재만큼이나 부재에서 일어나는 아름다움도 작지 않다. 예컨대, 날마다 찾아오기에 마음을 주었던 벌새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제비고깔과 백합 위에서 초록 보석 같은 머리를 흔”드는 그를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감각-올리버의 표현대로라면 “부재의 핑 하는 작은 울림” 또한 기회인 것이다. 그는 사랑한 많은 것들이 이울어 가는 것에도 엘레지로 헌사를 남겼다. 스러지는 것들, 부재에서 존재를 기억하는 일은 너무도 슬프고 힘든 일이지만, 괴로움이 아름다움을 퇴색시키진 않는다. 참 다행인 일이다. 견딜 수 없이 비통한 상실의 순간에조차, 남은 이들에게 그런 의미화는 망각과 더불어 계속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진통제가 되어준다.
메리 올리버는 2019년 84세의 나이로 작고했다고 한다. 예전엔 잘 느끼지 못했는데, 나이를 먹어갈수록 정말 세상의 모든 좋고 아름다운 것들엔 (그리고 실은 추잡하거나 사소하거나 창대하거나 어쨌든지 정말 모든 것에) 끝이 찾아온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끝은 비극이 아니다. 영원할 것만 같던 것이 관 속에 묻히는 순간을 목도하는 일에 좀 더 익숙해져야 할 터다.
이 산문집에는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들」이라는, 올리버가 다른 작가에 대해 남긴 짧은 평론 세 개를 모은 장이 있는데, 그는 그중에서도 랄프 월도 에머슨이라는 시인에 대한 커다란 애정을 드러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에머슨의 부재로 인해 문학적, 사색적 삶뿐만 아니라 감정적, 공명적 삶에 있어서도 궁핍해짐을 느낄 이유가 100가지는 되지만, … 나는 가치 있는 일을 시작할 때마다 에머슨을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수준 이하의 상태에 있을 때도 그는 내 곁에서 자애롭고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나를 바로잡아준다. … 우리가 맺을 결실은 예측 가능하다.
이 글의 마지막은 그의 글로 장식하고 싶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식물의 법칙처럼 도덕의 법칙을 확신한다. 나는 17년 동안 해마다 6월이면 내 땅에 옥수수를 심으며 거기서 스트리크닌(마전이라는 식물의 나무껍질과 씨에서 얻는 독)이 나진 않는다는 걸 안다. 나의 파슬리, 비트, 순무, 당근, 갈매나무, 밤나무, 상수리나무도 마찬가지다. 나는 정의는 정의를 낳고 부정은 부정을 낳는다는 걸 믿는다.
- 에머슨 : 서문 中
정말 그의 말대로다. 메리 올리버의 부재를 부러 떠올리면 세상에 대한 별의별 회의가 스치지만, 온갖 부재의 슬픔을 선명히 느끼면서도 “우리가 맺을 결실은 예측 가능하다”고 여전히 말하던 사람임을 기억하며 또한 나를 바로잡을 수 있다.
그의 ‘완벽한 날들’은 “날씨가 없는”, 그러니까 대단한 이야깃거리 없이 적당한 햇볕과 살랑이는 바람에 날씨를 잊게 되는-“최고 날씨의 작고 유익한 움직임들”에 몰입하여 “가장 강력한 가정에(심지어 확실성에까지) 이를 수 있”는 그런 날들이다.
그런 날을 나도 떠올려 볼 수 있다. 하늘에 떠 가는 구름 한 조각을 보고 갑자기 행복에 겨울 때.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때. 눈을 시리게 하는 햇볕이 잔물결 위에서 반짝이는 것에서 눈을 뗄 수 없을 때. 혹은 올리버보다는 훨씬 세속적인 삶에선, 방금 내린 커피 향이 믿을 수 없이 황홀하게 느껴질 때, 좋아하는 노래에서 새롭게 기분 좋은 소리를 찾았을 때, 안부를 주고받는 말에서 다정함을 충만히 느낄 때.
그렇게 지금 이대로 온전하다는 감각을 알 듯하다가도, 어떤 날엔 그렇게 느끼는 방법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날, 메리 올리버의 글을 다시 찾게 될 것 같다. 그리고 다시 ‘부드럽고 가볍게 날아 오르는’ 완벽한 날을 기억하게 되리라.
[이명화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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