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지나치게 입체음향적이고, 눈을 감아도 떠도 사라지지 않는 감각.
지하주차장에서만 맡을 수 있는 특유의 냄새 같은 것. 잊히지 않고, 질릴 수 없는 절대적 생동감.
살아 있다는 것—사람이라면 끌릴 수밖에 없는, 소멸하는 아름다움이 가끔은 마음 아플 정도로 예쁘게 피어난다.
하나
![[크기변환][포맷변환]123148709.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1/20260123123226_rirswktp.jpg)
ⓒ 유진
그날도 길을 지나던 중이었다.
다만 두 발로 걷는 중은 아니었고, 노트북 앞에 앉아 인터넷에 ‘1월 클래식 공연’을 검색하고 있었다. 하염없이 화살표를 누르며 공연 포스터와 포스터 사이를 오갔다. 신년이 시작되었으니 공연을 봐야겠다는, 딱히 이유 없는 생각 하나를 품은 채로.
공연을 본다는 건 대개 좋아하는 아티스트나 프로그램 같은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그때의 나는 그저 ‘일단 공연을 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플레이리스트에 실내악 곡이 대부분인 삶을 살다 보니, 이런 사고방식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 싶다. 이제는 클래식이 교양인지도 모르겠고, 지하철에서든 화장을 할 때든 친구와 헤어진 뒤 혼자 걷는 길 위에서든 늘 실내악이 흘러나온다.
그래, 나에게 이 장르는 더 이상 특별한 이벤트처럼 느껴지기보다는 어느새 일상에 가까워졌다. 그럼에도 그 상태에만 머무를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려면 결국 직접 만나러 가야만 한다는 사실만큼은 여전히 잘 알고 있다. 가야만 볼 수 있고, 눈에 담아야만 보이는 것이 우리의 ‘클래식’ 아니던가.
그러니 나의 기다란 짝사랑을 만나려면, 그 소리를 들으려면, 내가 먼저 다가가는 일도 어찌 보면 당연하겠다. 다만 발걸음의 무게감만큼은 확실히 가벼운.
이 공연을 알게 된 것도, 택하게 된 것도 친구와 함께 걷다가 외관이 아늑하고 사람도 적당해 보이는 카페 하나를 우연히 발견해 “가볼까?” 하고 말하게 되는 것처럼, 순전히 눈길이 갔다는 이유 하나였다. 그냥, 피아노 트리오 ‘트리오 서울’의 공연을 가보고 싶었다.
그들이 누군지, 어떤 곡을 골랐는지 전혀 모른 채로. 왠지 괜찮을 것 같다는 예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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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2일, 금호아트홀 ‘아름다운 목요일 <고요, 그 너머에>’ 무대에 트리오 서울이 올랐다. 트리오 서울(피아노 김규연·바이올린 조진주·첼로 브래넌 조)은 하이든 피아노 삼중주 39번 G장조 ‘집시’, 서주리 '7월의 산'(2025, 한국 초연), 리스트의 '트리스티아', 라벨 피아노 삼중주 a단조 M.67을 연주했다.
공연장 안에서, 특히나 꽤 좋은 기량의 연주 안에서 펼쳐지는 소리의 형태를 가만히 감상하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지금 나는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기에, 다리를 얌전히 모은 채 손과 발이 밧줄에 꽁꽁 묶인 사람처럼 옴짝달싹도 못하고 고개만 잔뜩 들고 앉아 있는 걸까.
그런데 이날, 저 묘사 불능한 소리들이 오후 7시 30분부터 밤 9시 30분이 넘도록 가득했다. 공연이 끝난 뒤, 친구가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말했다.
“연주자들의 열정적인 모습이 부럽고,
자기가 하는 걸 정말 열심히 파고드는 게 느껴졌어.
오늘 공연 데려와 줘서 고마워.”
그 말에 나는 우연히 만난 골목길 카페에서 인생 라떼 한 잔을 발견한 사람처럼, 나의 기발한 운수에 소리 없이 기뻐했다.
![[크기변환][포맷변환]123452820.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1/20260123123528_vyuepymc.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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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의 공연은 유달리 ‘영화’ 같았고, 동시에 ‘축제’ 같기도 했다.
수업 종을 닮은, 무대의 시작을 안내하는 방송이 울린 뒤의 시간만 해도 그렇다.
약간의 부스럭거림만 남은 공연장 안에 붕 뜬 정적이 길게 머무른다. 모두가 가만히 기다리는 상태로 무대 위에 시선을 얹고 있으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이를테면 벽처럼—보이던 무대 출입문 안쪽에서 현악기가 튜닝하는 소리가 들린다. 객석과는 정반대의 활기찬 대화가 희미하게 흘러나온다.
소란스러운 곳이 지나치게 가라앉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조용하던 공간에 갑자기 생기가 돋아나는 순간. 그때 내 사방에 머물던 정적이 아직도 또렷하게 떠오른다.
공연 중에도 그랬다. 무대를 미동 없이 바라보던 관객석 너머로 소리가 넘실거리며 무대 안쪽을 파고들었다가, 커다란 부채꼴 모양으로 순식간에 확—뻗어나올 때. 서주리 작곡가의 '7월의 산'을 연주하던 순간, 뿌리부터 자라나는 것과 청록의 침엽수.
긴 노래와 짧은 빛이 교차하는 소리 안에 있으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지금 당장 저 세 명의 연주자가 하고 있는 연주 행위를 통해 이 모든 것이 발생하고 있는 걸까. 사람이 내는 소리라는 건데, 그 사실 자체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혹시 그들은 연주를 하는 척 마임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손가락과 활로 현을 오가고 건반을 두드리고 있지만, 들려오는 사운드의 완성도가 지나치게 높으니 연주 행위 자체가 오히려 이질적으로 보였다. 놀랍게도 이 낯섦은 친구도 공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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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들, 지금 연주를 하고 있는 거지?”
그 정도의 수준이었으니, 우리는 트리오 서울의 세련된 완벽주의 미학에 두 시간 남짓을 이십 분처럼 느끼고 만 것이다. 22일, 그러니까 이 목요일 밤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축제’의 현장을 다시 떠올려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둘
하이든, 피아노 삼중주 G장조, ‘집시', Hob. XV: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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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이 ‘집시 삼중주’라는 이름으로 불린다는 사실부터가 내게는 호기심 섞인 의문이었다. 1·2악장은 서정적인 부드러움을 지니고 있고, 3악장은 아주 신이 나는 헝가리 민속 춤의 리듬을 품고 있어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는 설명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는 질문이 남았다.
3악장이 눈에 띄게 재미난 포인트를 지니고 있다는 건 분명했지만, 1·2악장 역시 이에 버금갈 만큼 유려했고, 소리 또한 충분히 미적이었다. 그렇다면 왜 이 곡은 ‘집시’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I. Andante — 걷는 속도로
첫 시작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피아노와 첼로, 그리고 바이올린이 모여 만들어 낸 소리는 내게 직선 주로로 꽂히지 않았다.
무대 중앙을 기점으로 벽 방향을 향해 아래로 깊게 곡선을 판 뒤, 순식간에 양방향으로 높이 뻗어 관객석보다 훨씬 위에서 소리가—아니, 넓은 평화가—들이닥쳤다. 소리가 좋다, 나쁘다를 판단할 수조차 없었다.
피아노는 피아노의, 첼로는 첼로의, 바이올린은 바이올린의 이야기를 했다. 바흐의 곡을 들을 때 느끼는 그 텅 비워짐의 상태로 가만히 앉아 있으니, 지금 저 앞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은 ‘무언가’라는 말로도 모자란, 아주 예쁜 것들이 살아나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늘 소규모 앙상블 공연을 보면 첼로보다 바이올린, 건반 악기보다는 현악기 한 곳에만 시선이 쏠려 어쩔 줄 몰라 했는데, 이 날은 저 세 개를 어떻게 하면 모두 붙잡아 둘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시간이 부족했다.
II. Poco Adagio. Cantabile — 조금 느리게 — 노래하듯이
피어나버린 2악장이다. 일렁이는 소리의 합이 공간을 어지럽힘 하나 없이 마음을 들었다 놨다 울렁이게 만든다. 아이가 웃는 얼굴만큼 예쁜 소리 원형이 뒤로 갔다가, 앞으로 오며 수줍은 왈츠를 췄다.
때로는 옆으로도 발걸음한다. 그럴 때는 조금 더 다정하게, 서서히 향하니 나른한 안정감이 깃든다. 두 개의 현악기만으로도 이만한 서풍을 불러올 수 있구나. 피아노가 또박또박 걷는 모습이 이렇게 또렷하게 보일 수 있구나.
바이올린이 가장 앞에서 노래할 때, 첼로와 피아노의 뒷모습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깊게 패인 소리로 노닥거리는 손동작을 닮은 형태로, 바이올린에 빛이 들 때 이런 모습으로도 함께 합을 맞춰 줄 수 있구나 싶었다.
세 개의 얇은 소리가 끊임없이 서로의 영역을 지켜 내며, 너그럽게 엮여 들었다.
III. Rondo all’Ongarese. Presto — 헝가리풍 론도 — 아주 빠르게
평생 추지 못할 리드미컬한 길을 재빠르게, 살릴 곳은 다 살리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순식간에 활달해지고 능숙하게 어깨춤을 나노 단위로 춰버린다.
...교수님들의 팀플이 이렇게 무섭다. 속절없이 박수 치고 마는 것이다.
서주리, 7월의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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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산’이라니. 마냥 초록빛 여름을 떠올리면 될까. 매미가 우는 무더위를 닮은 모습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조진주 바이올리니스트의 안내에 따라 몇 개의 문장을 주워 담았다.
‘겨울에 작곡한 여름의 음악,
원으로 이어지는 시작과 끝,
깊은 슬픔.’
I. Metasequoia — 메타세쿼이아
피아노가 바닥을 내려찍음과 동시에 기둥이 세워진다. 그리 길지 않게 이 동작이 반복되고, 대지가 잠시 조용해진 사이 첼로가 바람이 되어 결을 들여다놓는다.
하늘과 땅바닥 사이, 기둥과 기둥 사이를 현악기 두 대가 흐린 날 속으로 파고든다. 피아노가 끊임없이 밑둥을 내려치니, 가는 길만큼은 분명해진다.
듣기 좋은 이명이란, 현악기 두 대가 그려내는 가로선이 만들어 낸 여백과 머묾 안에서 이런 방식으로도 그려질 수 있구나.
미동도 없이 가만히—. 흰 눈과 찬 바람 사이에서 마주한 7월의 나무는, 그 자체로 살아 있고 살아 있음에 애달프다.
II. Golden Bells — 영산홍
그러니까, 니스칠이 필요한 삐걱거리는 시소를 타다가 물 표면 위에 잠깐 머물다가도, 발끝을 내려놓고는 불시에 아주 깊숙이 푹—잠수해버리는 것이다. 이 동작이 네 번쯤 반복되다가, 금세 안녕.
III. Sonamu — 소나무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거대한 양탄자 같은 것이 받침대가 되어 주는 장면을 멍-하니 바라보다, 이 노래의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잠시 헷갈려 혼자 난감해졌다. 그러다 불현듯, 아, 맞다. ‘소나무’였지.
그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한’이 자연스레 따라든다. 애간장을 태우는 마음들이 솔바람을 타고 논다. 지나온 곡의 시소가 불현듯 되돌아오기도 하고, 휘파람을 닮은 순간도 있어 울먹이는 이의 강한 염원이 사방을 메운다.
버텨 내는 발바닥, 향을 나부끼는 소나무. 아득함도 번뜩임도 서슬 퍼렇게 드러내지 않은 채, 모든 것은 점이 되고 투명한 선이 되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본다. 미련 한 톨 남기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두고 사라졌다.
리스트, 바이올린·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트리스티아, S.723c
![[크기변환][포맷변환]IMG_7645.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1/20260123123729_lvdneusk.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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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을 듣기 전에는 한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풍경을 바라보는’, ‘어두워진’, ‘어리석은 사람’.
피아노가 돌덩이를 내려놓고 첼로가 두꺼운 빗금을 칠 때에도, 성마른 눈으로 검은색 안경 너머의 광활한 바윗돌 언덕을 응시하는 사람이 여전히 ‘거기’ 있었다.
바이올린이 남겨진 이상을 건네면, 첼로는 파도 없는 검은 바다가 되어 그의 발끝을 적신다. 이 곡에서 사람의 형상은 점점 악기의 그림자 쪽으로 기울어 갔다.
첼로가 어디까지—정말 어디까지 제자리에서 구덩이를 파고들 수 있는 건지.
이제야 알았다. 이런 나무가 될 수도 있구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동굴을 지니고 있구나. 저 악기가 연주가의 몸을 떠나 이토록 가볍게 들릴 수도, 인간미 하나 없이도 낯설 만큼 따뜻한 그늘을 그려낼 수도 있구나.
불시에 밝은 여명을 들여다보는 순간, 별 박힌 건반 소리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숨소리 하나, 기척 하나 없이도 거친 몸짓 없이 저만큼 바닥까지 사뿐히 내려간다.
조급하지 않게 다시 올라올 때의 기색은 어떠한가. 놓칠 것 하나 없이, 향할 수 있는 방향 그대로 오를 수 있을 만큼만. 별이 될 필요 하나 없이.
들이킬 수 있을 만큼만, 세 개의 소리가 중심점에서 서로에게 대응하다가 딱 떨어지게 멀어졌다.
라벨, 피아노 삼중주 a단조, M.67
![[크기변환][포맷변환]IMG_7681.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1/20260123123739_uylbosf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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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Modéré — 보통 빠르기로
그새 저 세 악기에 조금 적응되었다고, 마냥 낯설게 느껴지던 지나치게 절묘한 합이 아주 조금은 익숙해진 상태로 1악장과 인사했다.
라벨의 곡은 들을 때마다 같은 생각을 한다. 그냥—가만히, 주는 대로, 악기가 긋는 선을 따라가기만 하면 잊고 있었거나, 혹은 잊지 못했던 장소로 데려다 놓인다.
비취색, 혹은 연하늘과 연보라가 섞인 오묘한 색의 음표를 악보 위에 걸어 둔 것 같다. 흥미롭고도 우아하다. 현악기가 듣기 좋은 것을 알아서 되감아 올 때마다 모습과 표정이 달라지니, 눈 한 번 꿈뻑이지도 못한 채 첼로 한 대를 뚫어져라 바라보게 된다.
II. Pantoum. Assez vif — 판툼 — 꽤 빠르게
잠시 자취를 감출 듯 번뜩이는 권청색 물감이 앞뒤로, 양옆으로 공간을 가득 채워 나가길래 무대 위로 시선을 올려 천장을 멀찍이 구경했다. 광택을 들여놓는 방식도 어찌나 자유분방한지.
번뜩— 들락날락.
거침없이 총력을 다해 밟아다 놓는 별자리라니.
지금 발 놓은 곳이… 우주였어?
III. Passacaille. Très large — 파사칼리아 — 매우 넓게
첼로 소리를 들으며, 이런 말을 하는 악기구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대양만 한 포용을 소리로 전달할 수 있다는 사실부터.
그 사방으로 엮여드는 것들에 귀 기울이느라 생각을 얹어낼 틈이 없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사사롭게 울적해하다가, 돛단배 위에 걸린 달 하나에 괜한 원망을 떨쳐낸다.
가녀리게 염원하는 두 개의 목소리가 하나로 겹칠 때에도 고독은 여전하고, 곁에는 아무도 없다. 피아노 소리만이 바닥을 둥둥—덮어 놓는다.
IV. Finale. Animé — 피날레 — 활기 있게
클래식의 이 알다가도 모를 흑과 백, 어둠과 빛은 참—믹스팝 저리 가라다.
방금까지 진흙 속에서 진주 찾기 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은하수로 뜨개질을 시작하더니 유성우를 있는 힘껏—거의 종이가 찢어질 정도로—흩뿌린다.
우아하게 이어 붙이고, 아주 격정적으로 고아해지려—작정을 한 것이 분명하다.
앙코르 — 하이든, 피아노 삼중주 G장조, ‘집시', Hob. XV:25 3악장
![[크기변환][포맷변환]IMG_7679.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1/20260123132030_fiihcxei.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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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앙코르가 아니었다면, 하이든의 이 피아노 삼중주가 왜 ‘집시 삼중주’로 불리는지 아직까지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앙코르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야말로 열띤 순간이었다. 긴장감보다는 해방감이 가득했고, 손이 완전히 풀린 채 다시 만난 첫 곡의 재빠른 리듬 속에서 폭발적인 활력과 만개한 웃음이 쏟아졌다.
무대 위에서든, 무대 아래에서든 내성적인 면모를 보이던 우리의 클래식 스타들은 악기만 들면—음악의 품 안에 들어가면—저렇게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다.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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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이든으로 시작해 하이든으로 모든 여정을 마친 트리오 서울. 무대 위의 열기는 첫 곡의 3악장을 닮아 있었고, 관객에게 남은 것은 같은 곡의 2악장에 가까웠다.
22일이 많이 춥다길래 기모란 기모는 다 챙겨 입고, 목도리와 롱패딩까지—이불을 둘러싼 수준으로—꽁꽁 싸맨 채 조그만 좌석에 앉아 있었음에도 꼼짝없이 소리에 빨려 들어가 더운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다 앙코르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열기에 확—목 뒤가 뜨끈뜨끈해졌다.
공연이 끝나고 친구와 생각보다 춥지 않은 밖을 걸으며 지나온 시간을 되짚었다.
친구는 서주리의 ‘7월의 산’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처음에는 봄 같았는데 계속 듣다 보니 봄이 조금 늦게 온 겨울 같았다고 했다. 또 첼로가 나중에는 활이 끊어질 것처럼 열성적이어서 더 인상 깊었다고도 말했고, 나는 그 말을 금세 흘려보내고 싶지 않아 휴대폰을 꺼내 톡톡 적어 두었다.
이 짧은 대화, 저만한 한 줄을 얻고 나니 객석에 앉아 있던 내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그들의 연주에 시선을 빼앗기면서도,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해보고 싶은 일들을 자꾸만 나열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약간은 노래가 흐르는 재즈 카페에서 칵테일 한 잔을 시켜 놓고 멍하니 계획을 정리하는 기분처럼, 귀는 반쯤 열어 둔 채 생각 속을 헤매다가 윤이 나는 소리가 들리면 불현듯 앞을 보고 음미했다.
가끔은 나와 같은 시선으로, 혹은 눈을 감은 채 음악을 듣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뒷모습도 보았다. 곡이 마음에 들어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는 관객과, 무대 위에서 행복해하는 연주자들을 바라보다 보니 그동안 쌓였던 모든 긴장이 풀려 버렸다.
아—그제야 눈치챘다. 나는 뭔가를 배워야 한다는, 느껴야만 한다는 무게감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것을.
![[크기변환][포맷변환]IMG_7654.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1/20260123123858_gwutfxrz.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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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신이 나 있었다. 무대 위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세 사람과 환호성을 보내는 관객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키득거리던 순간까지.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왔을 때의 몸 상태도 딱 그랬다. 에너지 드링크를 한 잔 마시고 나온 사람처럼 개운했고,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세 악기가 남긴 잔향이 오늘의 하이든 2악장 선율로 끊이지 않았다.
그래, 이러려고 여기 온 건데. 잊고 있던 발걸음의 이유가 다시 마음 안에서 또렷해진다. 음악 안에서 행복해지면 그만이지.
![[크기변환][포맷변환]IMG_7683.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601/20260123124347_xuupneyz.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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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과 이 120분 사이에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소년이 저리 웃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