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지나간 세기의 환상, 투란도트 - 오페라 투란도트 아레나 디 베로나 오리지널

"얼음장 같은 공주님의 마음"이 궁금한 밤
글 입력 2024.10.30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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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밝혀두자면, 이 글은 꽤 부박한 오페라 체험기가 될 것이다. 공연장에서 본격적으로 오페라를 관람한 건 처음이다. 오페라와 관련된 지난 경험은, 그 유명한 <라 보엠>의 공연 실황 영상을 강의에서 교재로 접한 것, 그리고 작년 광화문 광장에서 야외오페라 <카르멘>을 까치발 들고 구경해 본 것 정도. 더 근본적으로는 클래식 음악에 대해 의무 교육 수준 이상의 관심을 기울여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렇게 기회가 닿을 때마다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다만 때마다 생각하곤 했다. 역시나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구나.

 

<투란도트>는 워낙에 유명한 오페라라, 대중문화를 통해 자연스레 익숙해진 부분이 있긴 하다. 특히 아리아 “Nessun dorma 아무도 잠들지 말라”의 경우, 2007년경,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영국의 유명한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거듭난 폴 포츠가 부른 곡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당시 대중의 관심을 크게 끌었다. 아마 제목이 익숙지 않은 사람도 감미로운 현악기 선율과 함께 힘 있게 뻗어 나오는 첫 소절을 듣는 순간 바로 낯익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덧붙여, 네이버에서 2015년경 연재된, 오페라 원작을 각색한 웹툰 <공주는 잠 못 이루고>도 빼놓을 수 없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웹툰이 주류 문화로 변모해 나가던 황금기, 꽤 열성적으로 관심작을 매주 챙겨 보는 덕후 청소년이었다. 강렬한 드라마와 화려한 연출로 연재 당시 호평을 얻었던 해당작을 즐겁게 읽은 기억이 남아있다. 이렇게 오페라와, <투란도트>라는 작품에 대해 이런저런 기억을 어설피 돌이켜 보며 공연이 시작되길 기다렸다.

 

 

 

1. 눈과 귀를 사로잡는 스펙터클


 

장대하다는 인상을 자아내는, 거친 화풍의 동양풍 용 문양이 휘몰아치는 어둡고 거대한 성벽 앞에 군중이 일시에 쏟아져 들어올 때의 이른 압도감은 극에 빠져들게 하는 단서가 돼 주었다. 규모에서 오는 스펙터클을 예시하는 스타트 이후, 기대는 극이 진행되는 내내 모자람 없이 충족되어 갔다. 군중 씬의 거대하게 물결을 이루는 움직임, 첩첩이 울리는 합창, 눈부신 색채로 반짝이는 중국 전통 복식과 사치스럽게 우뚝 솟아 화려함을 자랑하는 궁궐 무대 세트, 전통 사자춤이나 부채춤과 같은 볼거리까지. 생각 이전에 말초적으로 눈과 귀를 사로잡는 요소들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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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보일 만큼 아는 게 없는 범속한 식견으로도 <투란도트> 관람은 즐거운 체험이었다. 무엇보다 20세기 초 사람들의 눈에 이 작품이 얼마나 호화로운 볼거리로 느껴졌을지에 대해 거듭 생각해 보게 됐다. 유성영화도 등장하기 이전, 대중음악이 산업화되며 문화의 모든 방면에 스미기 이전이었던 1926년 <투란도트>가 초연됐다. 당시에도 이렇게 거대한 군중, 웅장한 반향, 다채로운 색감 대비, 역동적인 움직임으로 감각을 사로잡도록 무대가 연출되었을까? 그렇다면*, 그때 관중이 느낀 환희는 지금의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수준 너머였을 것이라 짐작이 되었다. 고아한 극장에서 오페라 코트를 말쑥하게 빼입은 신사 숙녀들이 빠져들었을 마법적인 환상에 대해 미루어 보며 극을 감상하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투란도트>는 초연 때도 감각적인 화려함에 대한 찬사를 받았던 게 맞는 것 같다. 당시 평론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고 한다. “The night was filled with splendors, for this is an opera in which the eye and the ear must be equally absorbed. 화려함으로 가득 찬 밤이었다. 이는 눈과 귀가 똑같이 빠져들어야 하는 오페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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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 눈에 투란도트는


 

그러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현세를 살아가는 나는 그 마법에 쉽사리 정복되진 못했다. 극의 메시지나 인물의 감정선에 공명하거나, 캐릭터의 매력에 빠지기엔 너무 두터운 장벽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오페라 하우스 중 하나로 손꼽히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이 <투란도트> 공연 티켓 구매 시 이 작품에 대한 일종의 트리거 워닝이 포함된 프로그램 해설을 읽도록 고지했던 일이 올해 3월 기사화됐다. 다음 문장에 요점이 담겨 있다.

 

“A Western projection of the East, it is rife with contradictions, distortions, and racial stereotypes—and yet is also one of the most exhilarating and impressive works ever to take the operatic stage. 동양에 대한 서구적인 관점의 투사로, 이 작품은 모순, 왜곡, 인종적 고정관념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오페라 무대에 오른 가장 흥미진진하고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20년대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문화적으로도, 사회적 지위로도, 경제적으로도 최상류층이었던 고령의 백인 남성. 65세의 푸치니가 1924년까지 써 내려간 유작을 100년이 흐른 지금 20대 한국인 여성의 윤리적 잣대를 대고 재단하는 일은 무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또한 지금의 문화적 가치를 체화하고 있는 사람에게 즉각적인 거부감이 이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오히려 양가적인 측면(예술적 우수함/문화적 민감성의 결여)을 뚜렷이 인식하는 편이 극의 깊이 있는 관람에 유리하기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도 껄끄러운 요철을 전면에 드러낸 것이 아닐까?

 

시차를 충분히 고려하며 극을 감상했는데도, 개인적으로 시대를 뛰어넘는 긍정적인 가치를 발견하긴 어려웠다고 말한다면 이는 충분히 공정한 감상일 것이다. 실은 내게는 이 작품의 오리엔탈리즘적인 면보다도, 극의 주인공 중 하나이며 서사의 시작이자 끝을 이루는 상징적인 인물인 투란도트 공주의 제한된 발언권이 가장 큰 장벽이었다. 공연 내내 머리에서 이런 식의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거의 모든 사람이, 투란도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도통 들어볼 생각이 없잖아? 투란도트만 외계어를 하는 게 아니고서야 이럴 수가 있나?

 

시쳇말로, 내 눈에 투란도트는 ‘억까’를 당하고 있었다.

 

투란도트 공주는 제국의 정통한 후계자로서 자신에게 청혼하는 남자들을 도살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는 설정의 인물이다. 백성과 신하들이 그에 대해 부르는 노랫말을 살펴보면, 그는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로 피보라와 죽음을 몰고 다니며(”Gira la cote 숫돌을 돌려라”), 그가 사랑을 부정하기 때문에 그들 나라의 행복은 끝장났다. 그가 사랑의 신비를 깨달아야만 나라에 평화가 되살아날 것이다.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투란도트가 신랑의 지배를 받아들였으면, 유순하게 되어 자비를 알았으면 하는 것이다. (”O mondo, o mondo 세상은, 세상은”)

 

들으면 들을수록 이상하게 투란도트는 모국의 사람들에게 적대 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그의 아버지조차도, 그가 이방인의 지배를 받아들이길 바란다. 그가 선대가 당한 수모와 그로 인해 생겨난 강한 심리적 거부감을(”In questa Reggia 옛날 이 궁전에서”), 자신이 이방인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죽고 싶을 정도의 수치를 토로해도 누구도 듣지 않는다(”Gloria, gloria, o vincitore 만세, 만세, 승리자에게”).

 

여기에 투란도트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또 다른 주인공, 칼라프는 설상가상 상대에게서 마음을 얻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대결에 승리하여 그를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고자 한다. 투란도트 앞에서 칼라프는 한결같이 구애자가 아닌 정복자의 태도를 취한다. 그런 한편 투란도트의 대척점에서 사랑을 위해 희생하는 여성상으로 제시되는 류는, 칼라프에 대한 지극한 짝사랑으로 무려 ‘투란도트를 칼라프에게 바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다(”Principessa divina 숭고하신 공주님“, ”Tu che di gel sei cinta 얼음장 같은 공주님의 마음도”).

 

이쯤에서 나는 투란도트에게 이입해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 되었던 것 같다. 그는 이제껏 무자비한 학살자처럼 묘사돼 왔지만, 여기에 와 돌아보면 그가 거둔 목숨은 자신 삶의 대응물이었다고 봐야 합당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내가 상품으로 걸려 있는 이 내기에서, 최소한 동등한 대가로 당신의 생명을 마주 내걸라. 충분히 정당한 요구이지 않은가? 더군다나 어째서인지 투란도트에게 애초에 내기에 참전하지 않을 권리는 주어지지 않으니 말이다. 상대방은 목숨을 걸기로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만, 투란도트가 자신의 소유권을 상대에게 넘기기로 한 것은 타의에 의해 강제된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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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풍성하고 입체적인 장면을 그린 작곡가, 푸치니


 

별개로, 오페라에 익숙지 않은 나도 극의 흐름에 저렇게 몰입할 수 있었던 것은 자코모 푸치니가 이야기의 장면을 상상하게 하는 능력이 뛰어난 작곡가였기 때문인 것 같다. 푸치니의 오페라가 오늘날 전 세계 오페라 하우스 레퍼토리의 가장 큰 파이를 차지하게 된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푸치니는 대중적인 기호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동기가 뚜렷한 작곡가였는데,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품에 대해 ‘눈물 짜는 여성 취향’, ‘설탕 바른 얕은 작곡가’라는 식의 비판이 따라다녔고, 스스로 ‘나의 작은 설탕 바른 음악’이라는 문구를 즐겨 쓸 정도였다고 한다. 이걸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만큼 푸치니의 작품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즉각적으로 건드리는 이야기의 서정성, 그리고 그 정서를 끌어올리는 감미로운 선율로 청중을 사로잡았다는 뜻이 아닐까?

 

그리고 푸치니는 음악적으로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데에 열려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푸치니 이전의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는 성악가의 기교를 과시하는 벨칸토 스타일이 성행했고, 특히 베르디는 그런 음악적 전통을 훌륭히 계승해 발전시킬 뿐 아니라 거대한 서사를 통한 깊은 심리적 통찰과 아름다운 음악이 조응하는 작품으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완성했다고 한다. 그런 말기의 베르디를 대체할 차세대 스타 작곡가로 음악 출판사 리코르디의 선택받은 푸치니는 내리막을 걷던 이탈리아 오페라를 그대로 계승하기보다는 당대 혁신을 이루던 음악의 최신 경향을 모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런 푸치니의 오페라 인생에 가장 큰 도전이 <투란도트>였던 것 같다. 이 작품에는 만년의 위대한 작곡가에게 걸맞은 강렬한 서사도 있고, 항상 성공을 거둬 온 푸치니 공식(‘남녀의 행복한 만남-긴 이별-불행 속의 재회’)의 대체제가 될 멜로드라마 속 희생적인 여성상도 있다. 음악적으로는 이탈리아풍의 아름다운 성악 선율은 물론이고, 이질적이고 거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차용된 실험적인 스트라빈스키의 원시주의적 리듬과 불협화음도 있고, 이국적인 느낌을 더하는 민요 가락과 글로켄슈필, 공 소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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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다양한 요소들이 휘몰아치며 장면이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펼쳐지는 것. 그게 내가 느낀 <투란도트>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지금, 이 순간 투란도트를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그의 삶을 헤아려보게 됐던 것일지도 모른다.

 

*

 

마지막으로 말해두고 싶은데, 내가 위 같은 개인적인 감상을 극을 보는 내내 켜켜이 쌓아 가다가 종국에는 칼라프가 사랑의 승리를 부르짖는 노래를 투란도트가 박해에 모욕적으로 굴복당하는 노래로 멋대로 치환하여 듣게 됐다고 해서, 이 오페라가 문제적이라고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이 작품이 오페라 황금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소중한 문화적 유산이라는 점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그저 화려하게 반짝이는 마법에 기꺼이 매료될 수 없는 이유를 곱씹게 되었을 뿐이다. 그리고 궁금했다.

 

지금 이건 나만의 감상일까? 아니면 지금, 이 공연장에, 적진에 홀로 선 듯한 투란도트의 심정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관객이 또 있을까? 오늘날 이야기를 다시 써 내린다면, 푸치니가 완성하지 못한 마지막 순간을 다시 상상한다면, 어떤 다른 결말이 가능성으로 남아있을까?

 

그렇게 지나간 세기의 환상을 자꾸 돌아보게 됐던 밤이었다. 음악으로나 이야기로나, 다시 투란도트를 마주친다면 "얼음장 같은 공주님의 마음"에 귀 기울이고 싶은, 이 끈질기게 이어지는 감상을 다시 떠올리게 되리라. 내가 푸치니의 오페라를 사랑하게 될 일은 없겠지만, 21세기의 냉소주의를 체화한 부박하고 범속한 정서에도 궤적을 남긴 그의 탁월함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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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오페라와의 만남』 (닉 킴벌리, 2013)

『푸치니』 (유윤종, 2018)

「From the Archives: Turandot at the Met」 (Peter Clark)

NYC’s Metropolitan Opera puts trigger warning on Puccini masterpiece ‘Turandot’ in bow to woke culture (Jon Levine, 2024.03.)


 

[이명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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