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곳엔 우리가 있다 - 포르투갈의 높은 산 [도서]

글 입력 2021.12.15 23:57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신앙은 장엄하지만 비실용적이에요. 사람이 어떻게 일상적인 생활에서 영원한 개념을 실현할 수 있겠어요? 합리적인 게 한결 더 수월하죠. 이성은 현실적이고 보상이 빠르고 그 작용은 명확해요. 하지만 슬프게도 이성은 맹목적이지요. 이성은 그 자체로는 우리를 어디로도 이끌지 못해요. 역경을 앞두고는 특히 그렇죠. 그 둘의 균형을 어떻게 맞춰야 될까요. 어떻게 신앙과 이성 모두를 지니고 살까요?

 

P.200 2부 마리아

 

 

1.jpg

 


 

영문학의 매력


  

얀 마텔 작가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영어 수업 때였다. 영문학에 처음 매력을 느낀 때를 돌아보기 위해, 고등학교 때의 <파이 이야기> 기억 속으로 돌아가 본다. 영문학 수업으로 매주 몇 시간 동안 원서 그대로의 내용을 하나하나 공부하며 그 의미를 찾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영문학의 흥미를 느끼기보다 가뜩이나 어려워하던 영어로 된 원서를 읽고 이를 응용한 시험 문제를 풀고, 주제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에 버거워했다. 이 책은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를 동시에 믿는 인도 소년이 캐나다로 가는 도중 난파 사고를 당해 호랑이와 조그만 구명보트에 갇혀 태평양 망망대해를 건너가게 되는 모험을 그린 작품이다. 원서를 공부하던 당시엔 이 책이 맨부커상을 받았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어느새 진도를 훅 훅 나가 다른 원서 수업을 하기 바빠서 그렇게 자연스럽게 잊혀졌다.

 

 

131.jpg


 

시간이 지나고, 대학생이 되어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만났다가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는 딱히 기억에 별로 남은 것이 없었지만, 몇몇 친구들은 그 책이 우리가 수업 때 배운 원서 중에 가장 인상 깊었다고, 수능이 끝나고 다시 영화를 볼 정도로 좋았다고 말했다. 친구의 말에 깜짝 놀란 나는 집에 돌아와 <파이 이야기>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고등학생 때 처음으로 읽었던 얀 마텔의 소설에 대한 감정과 기억은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다.

 

영문학이 따분했던 고등학생 때의 나는 <노인과 바다>를 읽을 때와 비슷하게, 허구로 가득 찬 현실적이지 않은 이 소설에서 자꾸만 그 파이의 행동과 모험 속에 숨겨진 함의를 찾으라고 하는 수업이 힘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문학에 관심이 생기고 이것저것 문화예술을 수박 겉핥기식으로나마 접해본 후, 다시 만난 얀 마텔은 정말 색다른 영리한 작가였다. 그때는 작가에게조차 관심이 없어 이름도 잘 기억하지 못했었는데, 그의 소설을 통해 영문학에 대한 마음가짐을 달리할 수 있었다.

 

<파이 이야기>를 통해 신에 대해 조금씩 사유해보고, 거짓 같아 보이는 소설 속에서 작가가 담고자 했던 의미와 의도된 장치들을 찾아보는 첫 발걸음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영문학에 처음으로 흥미를 느낀 순간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고등학생 때 접했던 원서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다행히 번역서들이 잘 나와 있었고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을 주로 읽어가면서 고등학생 때 미리 관심을 가졌더라면, 더 풍부하게 이 소설들을 마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헤밍웨이, 헤르만 헤세, 조지오웰, 도스토옙스키 등 몇 안 되지만 시간을 쪼개 작가의 작품을 모아가면서 작가들을 깊게 만나고자 노력했다.

 

그러다가 지금에야 늦었지만 얀 마텔의 다른 책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만나게 되었다. 이 책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아파하는 세 남자에 대한 이야기가 한 부씩 구성되어 총 3부로 이루어져 있다. 각자 다른 지역에 삶을 꾸려오던 그들을 이어주는 대표적인 매개체인 포르투갈의 높은 산을 중심으로 독자는 사연들의 조합을 퍼즐 맞추듯 읽어나갈 수 있다.

 

처음에는 각자의 이야기가 독립적으로 구성되어 집에 대한 이야기를 서술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1부를 읽고 2부를 좀 읽다가 건너뛰고 3부를 읽었는데, 3부를 읽으면서 얀 마텔 작가의 치밀하고도 영리한 복선, 장치, 연결의 흐름을 읽어가면서 소름이 돋아 2부까지 다시 돌아가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포르투갈에 위치한 높은 산을 대주제로 해서 각자의 소주제가 펼쳐지는 정말 거대한 책을 신선하게 읽을 수 있었다. 보는 내내 이렇게 각자의 주제를 나타내면서도 하나의 의식으로 물 흐르듯 이어나갈 수 있을까 얀 마텔 작가의 대단한 글쓰기 실력에 감탄하면서 주인공들로 하여금 나타내고 싶었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의높은산_표1_띠지무.jpg

 

 

 

뒤로 걷기


  

 

완전히 비극의 주인공이 된 거야! 그런 비극을 겪으면 어떤 이들은 다시는 소리 내어 웃지 않는다네. 술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고, 내 조카의 경우 뒤로 걷기를 선택했네. 벌써 1년째라네. 이 기이한 애도가 언제까지 지속될 것 같은가?

 

P.22 1부 토마스의 숙부

 

 

1부의 주인공, 토마스는 일주일 만에 애인, 아들, 아버지를 잃었다. 이미 오래전 어머니도 죽고 그는 말 그대로 혈혈단신이 된다. 그리고 그 슬픔의 충격으로, 토마스 숙부의 주장과는 다르게 그는 신을 등지고 걷는 것은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발하면서 걷기 시작한다. 인생에서 소중한 모든 것들을 빼앗긴 나머지, 신을 등지고 뒤로 걸으면서 반발하는 그의 모습은 마지막 절규처럼 느껴졌다.

 

그는 고미술 박물관 학예사라 고문서를 많이 볼 수 있었는데, 17세기 중반을 살았던 율리시스 신부의 기록을 발견하고 갑작스럽게 그 기록 속 십자고상을 찾아가는 여정에 나선다. 율리시스 신부는 아프리카 노예들의 비참한 현실을 눈으로 보면서 인간의 참혹한 잔인함을 느끼고 이 고통을 십자고상 조각으로 승화시켜 이를 포르투갈 높은 산에 두었다.

 

 

이제 나의 사명이 무엇인지 안다. 죽음이 나를 데려가기 전에 신을 위해 이 선물을 만들 것이다. 감사하게도 가르시아의 농장에서 지옥처럼 갇혀 있는 그녀를 만났을 때 스케치를 해두었다. 그녀의 눈은 내 눈을 뜨게 했다. 나는 인간이 자초한 파괴를 증언할 것이다. 우리가 동산에서 몰락한 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P.135 1부 율리시스 신부의 기록 중

 

 

famous-belem-tower-sunset-lisbon-portugal.jpg

 

 

신부의 고통에 찬 기록을 따라 토마스는 자동차를 타고 이를 찾아 나선다. 이곳이 집이라는 구절이 반복해서 적힌 신부의 기록을 보면서 자신의 안식처, 행복, 사랑을 잃은 토마스는 신부가 찾아낸 그 집이 무엇인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자 다짐했다. 그 동기에 대해서 감히 상상해볼 순 없었지만, 그의 아픔과 1년 넘게 신을 등지고 뒤로 걷을 정도의 반발심이라면 충분히 인생을 걸고 그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가기 위한 위험한 여정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 짐작해보았다.

 

그는 자동차 연료를 구하러 달려갈 때, 앞으로 달린다. 그리고 결국 교회를 찾아가 십자고상을 제대로 보기 시작했을 때 앞으로 걷는다. 토마스는 율리시스 신부의 십자가에 매달린 유인원을 멀뚱멀뚱 쳐다본다. 교회에서 뛰쳐나와 울부짖으며 구역질하고 결국 마지막 "아버지, 당신이 필요합니다!" 절규한다.

 

 

그게 그의 감정에 맞아떨어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집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갈 땐 그렇게 걷기 시작했지요. 자주 그이는 몸을 돌려 뒤로 걷기 시작했어요.

 

P.245 2부 라파엘의 부인

 

  

2부의 주인공, 라파엘도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죽고 나서 뒤로 걷기 시작했다. 그 행동이 그의 감정에 맞아떨어졌다. 뒤로 걷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눈을 감고 걷는 것과도 마찬가지 아닐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들을 잃고 나서 이 세상에 눈을 감고 등을 보이며 거부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복합적인 의미를 가지고,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아픔을 겪고 난 뒤의 사람들 행동으로서 이를 대표해서 뒤로 걷는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1, 2부에 걸쳐서 나온다. 그들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함께 인간의 습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등장인물의 대사들이 이어진다.

 

 

 

인간의 습성


 

 

우는 습관은 얼마나 기이한가. 울음은 인간만의 습성인 듯하다. 그는 울음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른다. 실컷, 심지어 몸부림치며 울지만, 그 마지막에는 뭐가 남는가? 황량한 피로감, 눈물 콧물에 젖은 손수건. 울었다는 걸 누구에게나 알리는 빨간 눈. 그리고 울음에는 품위가 없다. 울음은 예의범절을 초월한 개인의 언어이고, 표현 방식도 제각각이다. 이것은 타인에게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낯선 발견이다.

 

P.65 1부 토마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습성에 대한 작가의 기록을 몇 개 뜨문뜨문 발췌하였다. 울음에 대한 이유와 목적은 정말 우는 나조차도 모른다. 울음이 나는 이유가 자신에 대한 속상함, 후회, 번민일 수도 있고, 상대와 내가 마주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혐오, 원망일 수도 있다. 우는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눈물이 나는 이유를 모르고 울기도 한다.

 

그리고 울음이 멈출 때까지 울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 목적도 모른다. 누군가 마음 놓고 펑펑 우는 것을 주변에서 쉽게 볼 순 없지만, 우리는 모두 가끔 품위 없이 우는 것이 필요할 때가 있음을 알고 있다. 울면, 어린아이처럼 굴지 말라고 어른 같지 않다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어린아이를 포함한 인간만이 그렇게 울 수 있다. 이성으로선 목적 없는 울음이 허용되지 않지만, 우리의 마음과 감성이 우리를 목놓아 울 수 있게 우리를 풀어준다. 인간의 습성과 동물적 원초적 감정의 중간다리로서 울음을 받아들여 본다.

 

 

신앙은 장엄하지만 비실용적이에요. 사람이 어떻게 일상적인 생활에서 영원한 개념을 실현할 수 있겠어요? 합리적인 게 한결 더 수월하죠. 이성은 현실적이고 보상이 빠르고 그 작용은 명확해요. 하지만 슬프게도 이성은 맹목적이지요. 이성은 그 자체로는 우리를 어디로도 이끌지 못해요. 역경을 앞두고는 특히 그렇죠. 그 둘의 균형을 어떻게 맞춰야 될까요. 어떻게 신앙과 이성 모두를 지니고 살까요?

 

P.200 2부 마리아

 

 

aerial-shot-praca-comercio-square-lisbon-portugal.jpg

 

 

신앙이 있는 것은 인간이 유일하다. 어느 순간엔, 신앙이 가지고 있는 힘은 물리적인 힘보다 말할 수도 없이 강력하다. 이성적인 시각에서 모든 것들을 바라보면, 불편한 것과 비효율적인 행동과 일들이 굉장히 많다. 하지만 마리아의 말처럼, 이성 그 자체로는 우리를 어디로도 이끌지 못한다. 책에서는 신앙이라고 표현한 '적절한 감성'과 이성이 균형을 맞춰 살아가기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그런데도 이 책을 포함한 얀 마텔의 이야기에선 상실이 넘쳐나는 흔들리는 삶 속에서 신앙과 함께하며 안정을 찾길 바라는 그의 마음이 꾸준히 담겨있다. 독자들은 현실에서 이뤄나가기 힘든 그 균형에 대한 자각을 책을 통해 시도해본다.

 

 

 

무엇보다 "인간적인"


  

 

피터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려운 동물의 기술을 익혔다. 그는 시간이라는 경주에서 족쇄를 풀고 시간 자체를 음미하는 법을 배웠다. 강변에 앉아 빛나는 휴식의 상태에 젖는 데 점점 익숙해진다. 그러니 정말 놀랍지 않은가. 오도가 사람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가 오도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놀랍다.

 

P.366 3부 피터와 오도(유인원)

 


3부는 상원의원이었던 피터가 갑작스럽게 유인원, 오도를 사들여 자신의 가족 고향인 포르투갈로 와서 생활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렇게 보면 각 부가 연결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유기적으로 정말로 영리하게 얽혀져 있는 책임을 말하고 싶다.

 

인간의 습성을 계속해서 이야기하는 1, 2부를 통해 인간을 파헤쳐보면 나약한 어린아이 하나가 남겨져 있음을 강렬하게 느꼈다. 그리고 현실과 비교했을 때, 우리는 너무나 이성에 대한 앞선 마음으로 감정을 무시하고, 소중한 존재를 잃어버렸을 때 제대로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잘 바라보지도 못하는, 진단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삶에서 적절한 감성, 신앙(개인적으로는, 종교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믿음 등 지혜로운 믿음을 총칭하고자 한다)이 필요함을 주장하는 작가의 의도를 알아갔다. 더 나아가 작가는 1부 마지막 유인원 모양을 한 십자고상, 2부의 죽은 남편 몸속에 있는 침팬지와 새끼 곰을 통해 동물을 끊임없이 등장시킨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작가는 3부에 인간이 아닌 유인원, 동물을 주인공으로 세운다. 지금까지 못난 점, 부족함이 눈에 보였던 인간의 행동들에 비해 정말 단순한 오도의 행동을 보면서 인생 처음으로 동물의 원초적인 본성과 마음을 닮고 싶었다. 피터처럼, 오도를 하등 동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숨 쉬는 생명체로서 그의 행동을 바라보고 그 여유로움과 오직 현재를 살아가는 미학을 따라가 보았다.

 

 

어떤 행동을 할 때 오도는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하게 그 행동을 할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치에 맞는걸까? 왜 생각(인간의 특징)은 우리를 어설프게 만드는 걸까?

 

P.351 3부 피터

 

 

침팬지 얼굴을 한 1부의 십자고상, 그리고 침팬지가 들어 있는 2부의 죽은 남편의 시체, 포르투갈로 오게 된 3부 침팬지 오도. 작가의 의도가 책 여기저기에 놓인 단서를 통해 깨우쳐지는 순간이다. 이성적이라는 매몰찬 논리와 자기 합리화로 세상을 대하는 인간보다 어쩌면 동물들이 더 '인간적인'이라는 단어에 어울린다고 처음 생각이 들었다. 침팬지 오도가 피터를 힘으로 제압하고 집을 망쳐버릴까 걱정했던 나도 마찬가지로 전자에 가까운 인간이었다. 하지만 오도는 누구보다 피터가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옆에서 조용히 있어 주고 추모까지 하고 사라졌다.

 

 

2.jpg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이의 마음과 안정적이고도 행복한 삶을 의미하는 집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열정에서 오히려 인간의 미약함을 느꼈고, 가장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인간만 가지고 있는 이성 속 멋진 생각과 논리, 효율적 행동이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모두가 느낄 수 있는 단순한 삶 속 흐름에서 인간적인 것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신화적 장소에 가서 신과 가까워지고 싶어 하고, 인간의 한계를 넘고 싶은 욕망을 마음속에 가지고 살아간다. 히말라야 등반을 도전하거나, 산속 절에 올라가 간절한 기도를 올리거나, 높은 공간에 올라가 도시를 내려다보기 위해 펜트하우스에 살고 싶어 하는 욕구 모두가 그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공간이었던 "포르투갈의 높은 산"에 대한 묘사는 우리가 평소 상상하는 신전, 깨달음의 장소와는 사뭇 다르다. 작가는 일부러 신화적 장소의 높은 산 형상을 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상상과는 다르게 전혀 바꿔서 묘사했다.

 

결국엔 책 <포르투갈의 높은 산>은 그 산속 전설이 내려오는 기적과도 같은 것을 두 눈으로 보기 위해 상실에 빠진 주인공들이 아등바등 노력하는 이야기라기보다 우리에게 내재된 믿음을 조명한, 믿음에 대한 이야기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곳엔 무엇보다 "인간적인" 우리가 있고, 그 믿음으로 우리는 상실의 세계에서도 집을 찾을 수 있다.

 

 

 

컬쳐리스트 이수진.jpg

 

 

[이수진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